시청자ㆍ네티즌ㆍ관객ㆍ소비자는 하나 <올드보이>를 보는 내내 영화에 몰입하였다. <올드보이>를 보기 몇 년 전에 <식스센스>를 보았고, 그 이전에는 <유주얼 서스펙트>를 보며, 반전이란 이런 것이구나 했다. 어느덧 영화들은 반전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찬물에도 위, 아래가 있듯 반전에도 위, 아래가 있었다. 살짝 시도한 반전, 잘 시도한 반전, 어설프게 했다가 도리어 욕 먹는 반전. 관객들의 눈이 정확해져서 영화는 정교함과 치밀함을 높이려고 애쓴다. 영화제작의 노고를 생각하면, 영화를 어여삐 여겨야 한다. 하지만,
비용과 시간에 있어서 관객들은 한시도 끈을 놓지 않는다. 영화가 개봉되면 그것은 시장에 놓여진 물건이다. 홍보와 마케팅의 비중이 높아진다. 그것들이 제작비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이다. <연예가중계>와 CF에서 볼 수 있는 배우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한다. 재미있든 재미없든, 입담이 좋든 아니든 상관 없다. 일단 끼워 넣는다. 시청자일 때는 TV에 나온 배우와 영화를 보고 끌리고, 네티즌일 때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현란한 광고와 기사에 낚이고, 영화관에 가서 관객이 된다. 표를 사고 들어가 엔딩 크레딧이 오른 후, 소비자가 된다.
용서는 없다?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영화관에 갔다 왔다고 하면, 지인들이 물어본다. “뭐, 봤어?”, “용서는 없다”, “어땠어?”, “( )” 라고 한다. “( )”의 내용은 하춘화 아줌마의 “잘했군 잘했어”와 같이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을 보면 부부싸움 초읽기가 예상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일종의 반전이 셈이다.
반전은 잘 해야 본전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반전 기법을 많이 접한 관객들은 이 장면이 반전인지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그만큼 상투적으로 되어 버렸다. “( )” 역시 반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다 보니 정교함과 치밀함이 더욱 감각적으로 나아간다.
<용서는 없다>도 반전이 있고, 이를 과학과 단서들로 풀어간다. 볼수록 “( )”가 늘어가지만, 결과적으로 “( )”에 들어갈 내용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용서는 없다.
완전히 벗은 몸보다 덜 벗은 몸이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 <용서는 없다>는 여성 토막 살인 사건으로 시작한다. 기존 영화에서 보여주던 사체의 모습은 ‘저것이 사체다’라면, <용서는 없다>에서는 ‘이것이 정말 사체다’라고 보여준다. 세밀한 모습은 더욱 감각적이고 자극적이다. 감각과 자극은 관객들을 몰입시키지만 어디까지 보여 주는지 보면 이것은 미끼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용서는 없다>에서 토막난 사체는 갈수록 신기함보다는 그저 그런 사물로 치부된다. 눈에 익숙해지면 심도 있는 과학과 기술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초반 부검 장면에서 자세히 보여주다 보니 사체가 마네킹으로 느껴질 뿐이다.
CSI와 미드를 통해 단련된 관객들은 이 정도도 아무렇지 않게 볼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좀 더 섬세함을 보여주려 한 점은 봐줄 만하다. 완전히 벗은 몸보다 덜 벗은 몸이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듯, 살인 행각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하려다 보니 관객의 상상을 막는다. 과학을 활용하면 수사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지만 자연스럽지 않으면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한다. 용서는 없다.
너 죽고 나 죽으면, 관객도 죽는다 영화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닌 경우도 있다. 꼭 그럴 필요도 없다. 왜 해피엔딩을 선호하는가? 시쳇말로 “끝이 좋아야 전체적으로 좋다”는 말처럼, 해피엔딩은 마무리가 잘 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와 관람료는 무관하다. 상관성이 있어 보이지만 가변적이어서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영화관 문을 나와 햇빛을 보고, 길을 걷고, 잠들기 전에 따져 보게 된다.
<용서는 없다>는 영화관을 나서, 신촌 거리를 걸으며 점점 잊어버렸다. 영화는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기억에 남는 잔상은 그리 강하지 않다.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했다. 너무 강하면 오히려 약해 보일 수 있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인물에게 다소 많은 이야기를 부여 하면, 인물의 성격과 행동이 억지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열쇠가 자물쇠 구멍 안에 들어가 부드럽게 돌아 문을 열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숨만 가쁘고 결과는 밋밋해지고 재미는 덜 해진다.
마지막 부분에서 죽을 만큼 힘든 상황을 맞은 강민호(설경구)를 보면서 인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찡해진다. 류승범의 사연도 기가 막히다. 이해가 된다. 하지만 기분은 불편했다. 소위 “너 죽고 나 죽자” 였기 때문이다. 여러 매체 등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들을 접하다 보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더더욱 없어 보인다. 비슷비슷 해 보이는 요소들 때문에 이미 생긴 관습은 선입견이 되어 영화를 속단하기도 한다. 아마도 감독은 이 때문에 결과를 모두 파멸로 몰아 넣은지도 모른다. 자칫 허무한 결과로, 이거 뭐야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관객들은 긴장을 한 순간에 폭발시키거나 해소하지 못한 채 김만 새게 된다. 용서는 없다.
낯이 익은데, 우리 뵌 적 있지 않나요 영화광 출신의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면, 영화 곳곳에 오마주나 기존 영화의 냄새가 물씬 나는 장면을 구성하기도 한다. 잘 스며 들어 쓰임이 적절해야 한다. 원한에 대한 복수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을 연상케 하고, 범인을 빨리 잡지만 점점 복잡해지는 상황은 추격자가 떠올랐다. 강민호(설경구)의 딸 혜원(김열)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아메리칸 뷰티>에서 안젤라(미나 수바리)가 장미를 뿌려 놓은 욕조 안에 있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 외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장면들이 있다.
감독과 관객들은 영화를 많이 봤다. 감독은 촬영 전, 중, 후에 비슷함을 알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스타일로 나타내려고 할 테고, 관객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하여 이 장면은 그 영화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보기가 수월해지고 많은 영화를 접하면서 자연스레 대사 한 마디, 한 장면도 쉽게 놓치지 않는다. 감독의 스타일을 제대로 보여주어 이것이 암묵적 이해로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먼저 찍은 놈만 장땡이 된다. 뻔한 작업 멘트도 맛깔나게 해야 이성에게 호감을 준다. 용서는 없다.
배우들의 연기로 관람료를 퉁치다
설경구는 <그놈 목소리>에 출연하여 유괴된 아이의 아버지 역할을 잘 연기하였다. 강민호(설경구)가 이성호(류승범)의 친구이자 공범인 박평식(박상욱)을 쫓는 과정과 마지막에 차를 몰고 이성호(류승범)의 옛 집으로 가는 장면에서 <그놈 목소리> 냄새가 짙게 났다. 배우에게 안 좋은 점인, 이전 역할 재현되기는 유사 장르, 비슷한 상황에서 오히려 중첩이 된다. 앞뒤 자르고 언급한 장면들만 보면 <그놈 목소리>로 느낄 수도 있다.
이성호(류승범)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아무런 감정을 못 느끼는 냉혈한으로 나온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뻔뻔한 표정을 짓는다. 당장 주먹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인간으로 나온다. 종전 류승범이 출연한 영화에서 보여준 재기발랄하고 유쾌하고 껄렁껄렁한 모습은 찾기 어렵다. 마치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의 차분하고 냉정한 모습을 느끼기도 한다. 한편으로 <추격자>에서 지영민(하정우)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영화에 첫 출연한 한혜진은 그간 드라마에서 보여준 연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첫 숟가락에 배부를 수 없지만, 앞으로 영화 출연과 본인의 연기를 생각해서라도 발성과 톤을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문제 해결의 중심에 있지만 아직은 부족한 연기와 발성이 다른 출연진들에 묻힌다.
<용서는 없다>는 그나마 설경구와 류승범의 연기만 남았다. 용서는 있다.
꼭 등장하는...... 언제부터인지 경찰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동료 간의 갈등이 나온다. 선배와 후배, 동료,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선배는 짠밥과 경험으로 후배를 누르고, 후배는 신기술과 명석함을 장착하고 나타난다. 선배는 사사건건 따지는 후배를 나무라고, 후배는 선배의 체계적이지 않은 방식들과 대치된다. 결국 후배는 새로운 시선과 잘못된 관행을 비집고 들어가고, 선배가 이를 도와주고 결정적인 순간에 희생을 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인물을 배치하다 보면 갈등이 당연히 등장한다. 예를 들어, <투캅스 1>에서는 고참 형사(안성기)의 비리와 관행에 신참 형사(박중훈)이 일일이 따지고 든다. 물론 나중에 후배도 그렇게 되지만 처음부터 파트너가 구도는 아니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전입 형사와 기존 형사와의 (서울과 지방 형사) 체계적 수사 방식의 편차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둘다 범인은 못 잡는다.
<용서는 없다>에서도 고참 형사(성지루)와 신참 형사(한혜진)가 그런 구도를 띠고 있지만, 비중은 크지 않다. 고참 형사들은 기존 관행을 답습하는 인물들로 나온다. 그러다 보니 연기력 있는 조연들이 출연해도 눈에 띄지 않는다.
뉴스를 보면, 사건 수사에 있어서 방식이 노후하고, 덜 과학적이라는 보도를 보곤 한다. 그러나 몇 일 밤을 고생해서, 소위 '노가다 수사 방식'으로 범인을 잡아내는 경우가 아직 많다. 아직까지 동물적인 감각과 끈질김이 우선으로 보인다. 이런 모습에서 선배들의 경험이 녹록지 않음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용서는 없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가 다르듯, 관객은 영화관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 아무리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해도, 연기가 좋아도 전체적으로 영화가 당기지 않으면 그만이다. 화장실 출입 전, 후가 같으려면, 들어갈 때의 심정이 해소되어 좋은 잔상과 기억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래야 관람료가 아깝지 않다.
또한 한 편이 종합 선물세트인 패러디 영화가 아닌 이상 여러 냄새들을 살짝 접하면, 이것 또한 관람료 생각이 간절해진다. 관객은 영화를 보고 별점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소비자다.
입장료는 좀 아쉽고, 내용은 좀 불편하고, 이 영화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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