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과 설정의 오묘한 경계선.....★★★☆
2008년 크리스마스이브. 각 세대를 대표하는 6명의 여배우들이 패션지 <보그> 화보 촬영을 위해 모였다. 컨셉은 ‘보석보다 아름다운 여배우들’. 그러나 익히 예견됐던 것처럼 이들 여배우들은 스튜디오 등장에서부터 메이크업, 의상선택에 이르기까지 신경전을 펼친다. 화보 촬영에 꼭 필요한 보석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여배우들의 심기는 꼬이기 시작하고, 이 와중에 고현정과 최지우는 소리를 지르며 급기야 한 판 붙는다. 과연 이들은 화보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형식적 독특함을 말하고는 하지만,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된 영화는 언뜻 떠올려 봐도 몇 편의 영화가 스쳐 지나갈 정도로 <여배우들>의 형식이 그다지 독특하다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여섯 명의 여배우들을 모아 놓고 마치(!) 실제인 냥 그들의 수다와 관계에 대해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점이다. 오히려 형식에 국한에 말하자면 <여배우들>은 페이크 다큐의 형식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측면이 존재한다.
아무튼, 최근 들어와 TV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리얼리티를 표방한다. 그러나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 논란에서 보듯 100% 리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최소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상황 설정은 제작진에서 제시한 기준에 맞추기 때문이다. <여배우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각본엔 이재용 감독 외에 출연한 여섯 명의 배우가 고스란히 올라있다. 촬영할 때 감독이 어떠한 상황을 제시하면 거기에 맞춰 여배우들은 평소 자신들의 언어로 상황에 맞춰 대사를 쳤고(수다를 나눴고), 이런 과정을 여기저기 포진한 몇 대의 카메라가 세밀하게 담아냈다고 한다. 그러니깐 고현정과 최지우가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한 판 싸움을 벌이는 그 상황이 만들어낸 것이라면(설정), 그 과정에서 배우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든가 몸짓은 평소 그들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리얼리티)는 것이다.
<여배우들>은 우선 각자의 세계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여배우들의 묘한 경쟁 심리를 보여준다. 윤여정은 혹시 자신이 다른 여배우의 대타가 아닌가 하는 조바심을 드러내고, 김옥빈은 제일 먼저 도착했으면서도 일부러 차 속에 숨어 적당한 시간에 등장하려 한다. 스텝들의 가장 큰 고민도 이들의 경쟁의식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에 모아져 있다. 옷을 바꿔 입을 때마다 각각의 배우들에게 이들은 “이 옷은 언니만이 소화할 수 있어요” “단연 언니가 최고다”라며 온갖 수식어를 남발하고, 이를 듣는 여배우들의 입가엔 비록 그것이 입에 발린 말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영화는 중반부까지 배우들의 경쟁에서 우러나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 빠른 편집과 마치 패션쇼를 보는 듯한 여배우들의 화보 촬영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 치중한다.(개인적으로 화보 촬영에서 가장 돋보인 건 김민희인 것 같다. 그녀는 마치 놀이터라도 되는 듯 즐기는 기운이 역력하다) 그러다 고현정과 최지우가 화장실에서 한 판 붙은 후 영화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감미로운 음악의 향연 이후 여섯 여배우들의 토크쇼로 이어진다. 그러니깐 중반부 이후 눈에서 귀로 무게점이 옮겨가는 것이다.
<여배우들>이 리얼과 설정의 경계선을 지나간다고 할 때, 가장 박수를 받아야 할 지점은 어쩌면 자신들의 이미지에 남길 상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밀어 붙인 여배우들의 용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콤플렉스를 자신들의 입으로 토해내고(비록 그것이 설정이라 하여도) 자신들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누가 가장 이쁜지 말해보라”고 잠깐 들린 신인 남자 배우에게 물어보고는 돌아오는 대답에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담해지는 장면은 대단히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고현정은 일본과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다른 여배우에 대한 질투를, 최지우는 자신의 결벽증에 대한 고민을, 이미숙은 100세까지 여자로 살고 싶은 욕망을, 김민희는 자기보다 인기가 높은 다른 배우에 대한 질시를, 김옥빈은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치 <강호동의 무릎팍 도사>처럼 마냥 즐겁게 이어질 것만 같던 여섯 배우의 토크쇼는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들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얘기하는 지점에 이르러, 여섯 배우의 눈에 비친 눈물과 함께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진한 도장을 새겨 놓는다. 이 때 비로소 영화의 처음, 화면에 깔린 자막이 조금은 이해될 것도 같았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여배우가 있다”
※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유머감각이며, 가장 큰 공로자는 고현정이다. 최지우에 대한 견제부터 시작해 전반적인 분위기를 리드하는 고현정의 센스는 왜 그녀가 매력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 정말 그녀는 고혹적이며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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