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갈수록 무덤덤해지고 지루해진다...★★☆
온갖 재난재해가 휘몰아치는 지구 멸망의 날에 평범한 가장이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 두당 10억 유로(현재 환율로 약 1조 8천억원)나 하는 노아의 방주에 올라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 짧은 의문에서 드러나듯 <2012>의 서사는 민망할 정도로 허술하기 그지없다. 단적으로 비밀의 누설을 막기 위해 유명 과학자나 루브르 박물관장도 거침없이 살해하는 이들이 지구 멸망을 체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민간인이 접근하는 것을 방치하고, 이의 중계 행위에 아무런 제재조치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지구의 대부분이 파괴된 상황에서 핸드폰 통화로 재난 현장을 설명한다니 이거 원.
아무튼 마야인의 달력에서 유래한다는 2012년 멸망설은 그 자체로만 보면 꽤 그럴 듯하다. 한 과학 전문 케이블에서 했던 다큐멘터리를 보고는 나름 공포에 떨었던(?) 기억도 난다. 그게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터무니없는 지구 멸망설의 하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맥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면 TV 다큐나 영화 <2012>에 의하자면 지구를 살리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란 건 헛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과다한 화석 연료의 사용이라든가 환경 훼손이라는 인간들의 지구 파괴 행위를 보면, 안 그래도 지구 멸망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듯한데, 이의 방지 노력과는 무관하게 지구의 멸망은 예정되어 있는 것, 그것도 몇 년 후에 예정된 것이라니 말이다. 롤랜드 에머리히가 <투모로우>에서처럼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 행위의 결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고 한다면 지금보다는 드라마가 좀 괜찮아 졌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서사는 민망할 정도로 구멍이 뻥뻥 뚫려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영화에서 구현된 온갖 재난을 모아 놓은 듯한 화면은, 그 자체로만 보면 대단하긴 하다. 하긴, 영화 <고질라>에서 ‘문제는 크기’라고 주장했던 롤랜드 에머리히아니던가. 별 다른 서사 없이, 그리고 관객이 이해할 만큼 충분히 드라마를 쌓기도 전에 롤랜드 에머리히는 지구를 부셔대기 시작한다.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빌딩이 무너지며, 거대한 화산이 불을 뿜고, 쓰나미로 대도시가 물에 잠긴다. 그 사이를 주인공(대체 이 영화에 인간이란 존재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지만) 잭슨 커티스(존 쿠삭)와 가족들은 한 번도 맞이하기 힘든 기막힌 우연과 행운을 수십 차례 거듭하며 헤쳐 나간다. (지구 멸망의 날에 남들보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선 카레이서 버금가는 운전 실력과 비행기 운전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이를 보고 있는 심정은 마치 테마파크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기분이다. 주인공 가족이 탄 승용차가 갈라지는 도로를 질주하고 갈라진 땅을 뛰어 넘으며 무너진 건물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튀어나오는 장면은 짜릿하다. 그리고 용케 구한 경비행기를 몰고 건물 사이를 통과하고 거대한 화산재를 빠져나오는 장면도 몸을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기막히다. 문제는 이제 너무 길다는 사실이다. 무려 157분이라는 상영시간의 대부분은 지구가 박살나는 모습으로 채워져 있고, 서사는 거의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극장의 큰 화면으로 재현되는 재난 장면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분명 볼만하긴 하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있는 놀이기구도 적당한 시간을 넘기면 짜증나는 법이다. 그 자체로만 보면 괜찮은 재난 장면도 되풀이되면서 점점 무덤덤해지고, 나중엔 지루해지기까지 한다. 이야기는 어떻든 상관없이 거대한 화면에서 거대한 볼거리를 찾는 분이라면 강추!
※ 영화의 후반부에 과학자 헴슬리(치웨텔 에지오포)는 아버지가 일본 해 근처에 있다며 그곳 상황을 궁금해 한다. 지도에 나오는 위치는 바로 동해. 이 영화는 철저하게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영화다. 만약 영화대로라면 G8 소속 국가의 권력자 및 거대 부호 외에 노아의 방주를 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나머지 국가의 국민들 대부분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죽어갔을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 인물이 Japan Sea(또는 Sea Of Japan)라고 표현한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최소한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의 자막에 ‘일본해’라고 표기한 건 너무 무성의한 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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