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간에 대한 문제제기가 참 많다. 그래서인지 현재 방영되는 영화나 드라마에선 과거의 동화 같은 사랑도 또 맹목적인 사랑을 갖고 있는 연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엔 그런 동화로라도 사람들의 심금을 살려 줬는데 이젠 그나마도 없어졌다. 인간에 대해 부정적이고 냉소적이 되다 보니 이젠 인간의 최소한의 착함도 예술에선 어린이 동화일 뿐이고 그런 것이 이젠 배척되고 있다. 더욱 현실적이고, 아니 차라리 동화 같은 악당들이 인물 캐릭터로 판을 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일까? 이런 영화에 [차우]는 좀 더 세다. [차우]란 단어의 뜻은 모르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매우 센 냉소적 시선이다. 영화에 나오는 것들 중 도대체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자연재해이든 인공적인 문제든 그걸 덮으려는 인간도 그렇고 괴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부에서 파견한 경찰도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동네 파출소(경찰소?)의 순경들도 엉망이긴 마찬가지다. 생물학 연구를 한다는 여류 연구자도 자신의 이익이 먼저고, 사냥꾼들 역시 우리들이 동화처럼 꿈꾸는 영웅은 아니다. 다들 그렇고 그런 인물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멧돼지 사냥에 나선다. 고담 시티에 정의로운 마음으로 가득 찬 배트맨이 없는 상황이다. 재미있는 캐릭터들은 또 있다. 영화에서 멧돼지에게 희생되는 인간들 중 건전해 보이기보단 시체의 반지에 눈이 휘둥그런 희생자가 눈에 띄고 농촌이 주최하는 주말농장에서의 출연진 역시도 그다지 착해 보이지 않는다. 위험에 빠질 것이 뻔한데도 주말농장을 개최, 투자비 회수는 물론 탐욕에 절은 동네 이장과 관련 산업의 투자자는 물론 지역 경찰서장이나 경찰관들 역시 책임감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냥 월급만 받았지 믿음직한 모습도 볼 수도 없다. 주인공인 김순경이라고 이런 범주에서 이방인이지도 않는다. 치매인 엄마가 사라져 그만 멧돼지 생포 작전에 합류했을 뿐이다. 그리고 더 재미난, 아니 영화 제작자들이 보는 시선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 부분은 도시에서 주말농장 하러 온 어느 부부의 모습이다. 과일을 담는 아름다운 모습관 달리 그 둘의 대화는 불신과 불만의 전형이다. 과일을 많이 담그는 모습을 본 아내의 표독스런 맞대응은 동화 같은 대화를 상상한 관객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과다하게 모은 과일을 소위 ‘그년’에게 줄 것이냐고 쏘아붙이는 아내의 모습에서 더 이상 끈끈한 관계의 상징인 부부 관계 역시 감독의 냉소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엉망인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땐 차라리 비정상적인 것이 훨씬 좋아 보인다. 치매인 어머니의 모습이 차라리 행복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주인공 김순경의 고민은 딴 사람 이야기 같지 않다. 현실의 번민이 그의 꿈의 세계에서도 공포스럽고 무서운 모습으로 투영되는 장면에서 환경의 고통이 내면의 세계까지 지배하는 현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혹한 세상으로 인해 무너지는 내면의 심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우린 그렇게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믿음을 주고 받을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린 그렇게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감독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파헤치고 형상화시키고 있었다. 멧돼지는 당연히 잡혔다. 마치 이전 영화였던 [죠스]처럼. 그러고 보면 죠스의 극적 구성과 비슷한 것도 같다. 근 30년이나 지난 영화가 다른 버전으로 나와도 감동을 주긴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우린 나쁜 것에 대한 변화가 왜 이리 더딘 건지 참 답답할 뿐이다. 아니 우린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젠 부부도 못 믿는, 아니 가족도 믿지 못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차우]눈 동화적이다. 못 믿을 인간들이 힘을 합쳐서 좋은 결과가 낳을 수 있는지 솔직히 믿지 못하겠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리들의 추악한 모습을 다시 한 번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리고 말 안 듣는 인간들에 대해 경고한다. 우리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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