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일 감독의 세 번째 장편 <반두비>(신동일 감독의 관계 3부작의 마지막 작품)는 MB시대의 현실, 그것도 매우 쓸쓸한 현실의 공기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점에 동의한다면, 이상한 건 왜 한국 영화엔 현실의 공기를 담아내는 영화가 드문가 하는 것이다. 비단 <살인의 추억>같은 영화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한국 영화는 과거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과거를 바라보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유럽을 대표하는 좌파 감독 켄 로치가 말했듯이 “민중이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과거는 현재를 만든 원인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시각이 변화되면 현재를 보는 관점이 변화되고, 이는 미래를 바꾸는 힘이 된다” 그럼에도 켄 로치가 과거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며, <자유로운 세계>와 같이 현실의 문제에 대한 진단도 꾸준히 병행하고 있다. 어쨌거나 한국 영화가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왠지 모르게 기피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아무튼 여러모로 화제가 되고 있는 <반두비>의 여고생 민서(백진희) - 서민을 거꾸로 한 이름 - 는 한국 영화에 출연한 여고생 중 가장 혁신적 모델일 것이다. 이를 진화라 말하긴 어려울 것 같고, 일종의 단절로 보인다. 왜냐면 현실에서도 일 년 전 ‘촛불소녀’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 사회의 여고생들이(남고생들에겐 좀 미안하다만) 이렇게까지 똘똘하고 가치관이 뚜렷한 존재였는지 대부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서의 외형을 한 번 살펴보자. 가방에 ‘촛불소녀’ 배지가 붙어 있고, 손에는 ‘MB OUT’과 ‘조중동 반대 문구’가 쓰여 있는 부채가 쥐어져 있으며, 라면을 먹으면서 ‘돌발영상’을 본다. 이쯤 되면 무슨 청소년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는 거 아닌가 보안당국에서 의심해볼만하건만(하긴 청소년 단체에서 활동한다는 것 자체를 백안시하는 게 더 우습다만) 알고 보면 민서의 정체성은 오락가락이다. 아니 오락가락이 아니라 바로 그게 고2 청소년의 현실적 모습일 것이다.
공부도 어중간하게 하는 민서는 친구들이 원어민 영어 학원에 다니는 모습을 부러워한 나머지 스포츠 마사지(일명 대딸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은다. 특별히 죄의식 같은 건 없다. 가슴엔 ‘고래를 살리자’는 환경운동 티를 입고 다니면서도 피부가 검은 카림(마붑 알엄)이 가까이 걷는 것도 왠지 싫어 기피한다. 분명히 모순되는 행동이건만, 민서는 그게 특별히 상충되는 행동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 큰 것처럼 행동하면서 여전히(당연하게도) 아직은 어린 민서의 모습, 상충되는 행동을 그 자체로 솔직하게 드러내 놓는 모습은 민서라는 캐릭터를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사실 이에 반해 카림의 캐릭터는 단선적이고 전형적이다. 착한 영화 내지는 진정성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신동일 감독의 의도 때문인지 카림은 현실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선인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어쩌면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강박관렴의 소산으로도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비전문배우의 연기력 부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왜냐면 지난 세 편의 영화로 보건대 신동일 감독은 특별히 연기를 잘 하도록 하는 감독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신동일 감독은 영화가 진정성만 담지하고 있다면 연기라든가 화면, 편집이 좀 성기고 부족하더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다.(<반두비>에서도 극장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반과 중후반, 두 차례에 걸쳐 화면이 튀었다)
민서가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방학을 보내야 하는 처지라면 카림은 일 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월급 한 푼 못 받았으며, 그 사장이 고의 부도를 내는 바람에 법적으로도 호소할 길이 막힌 상황이다. 다른 직장에서 일하고는 있지만 이제 한 달 후면 돌아가야 하고, 고향에 돈을 보내지 못해 아내와 이혼할 위기에 처해있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둘이 만나 소통한다는 영화의 주제는 사실 새롭거나 독창적인 건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러한 설정에 여고생과 이주 노동자를 대입시키는 순간, 이건 대단히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영화로 탈바꿈해 버린다.
게다가 신동일 감독은 은유와 비유로 점철됐던 전작들과 달리 <반두비>에선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현실을 직설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영어 학원 버스의 앞에 ‘MB’가 써 있거나 민서가 “이 놈의 쥐새끼”, 영어 학원 강사가 “왜 한국의 대통령을 쥐에 비유하죠”라고 묻는 정도는 애교로 넘어갈 수도 있다. 편의점에서 취객은 “명박이 믿고 뉴타운 믿었다가 좆돼버렸다”며 알바에게 시비를 걸고, 알바는 “그걸 왜 시급 3,500원 짜리에게 말하냐”며 맞대응한다. 카림의 월급을 착복한 사장 집에 찾아간 민서는 아마도 ‘조선일보’로 보이는 신문을 집어던지며 “이 딴 걸 보니깐 니가 개같이 살잖아”라며 중년 남성을 타이른다. MB시대에 이렇게까지 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막나간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특히 편의점에서 취객과 알바의 말싸움은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알바는 “그걸 왜 시급 3,500원짜리에게 말하냐”고 한다. 그렇다. 취객이 분노한 건 이해되지만(MB 믿었다가 좆된 경우가 그거 하나뿐일까) 전혀 엉뚱한 곳에서 분풀이 중이다. 그런데 이 취객만 그럴까? 남영동 또는 전국의 철거현장에서 철거민을 두들겨 패기 위해 앞장서는 깡패들도 결국 철거민과 비슷한 부모, 형제, 친구가 있는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라고 누군가 얘기했다) 결국 양극화된 사회에서 잘 사는 소수는 직접적인 싸움에서 빠져있고, 알고 보면 서로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죽자 살자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카림이 바닷가에서 “한국인들, 너희도 결국 우리와 같은 노예일 뿐이야”라고 말한 건 바로 이런 차원의 이야기라고 보인다.
또 하나, 시비 끝에 경찰서에 간 취객은 카림을 보며, “니네 나라로 돌아가. 니네가 내 일자릴 뺏고 있어”라고 말한다. 과연 그게 진실일까? 대게 유럽의 극우파들도 이런 식의 주장으로 외국인에 대한 혐오 감정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주로 실직자들 사이에서 쉽게 스며든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장면은 가구 공장이 밀집해 있는 공단에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의 불법체류자 단속반이 떴을 때의 모습이다. 불체자들은 산 뒤로 도망가고 단속반을 가로 막은 건 의외로 가구 공장 사장과 가족들,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었다. 이들이 단속반을 막은 이유는 그들이 아니면 공장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그 동네는 망하기 때문이다. 단지 가구공장만이 아니라 실제 한국의 여러 생산 현장들이 이주 노동자 및 불체자가 없으면 유지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보수 정권이 들어와도 불체자에 대해서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펴기 힘든 건 기본적으로 이런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실직자들에게 “눈을 낮춰서 3D 업종이라도 취직하라”고 말하는 게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될까? 이런 얘기를 쉽게 늘어놓는 사람은 정작 자신은 안정된 직장이 있어서 눈을 낮출 필요가 없는 사람이거나 집안이 부유해 아예 취직할 걱정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 식으로 쉽게 해결될 실업문제라면 누군들 해결 못하겠는가.
영화가 담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워낙 넓다보니 글이 자꾸 샛길로 빠진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타인이 나와 다름을 인정’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외국인이 100만이 훌쩍 넘어선 상황에서 한국은 싫어도 어쩔 수 없는 다문화 사회로 이미 진입해 들어와 있다. 이것을 부정하려하는 것은 더욱 극심한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만들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현실화된 다문화, 다인종 사회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착근시킬 것이냐의 문제일 것이다.
물론 <반두비>를 거창한 사회 드라마가 아닌,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두 남녀의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로 볼 여지도 충분히 있다. 영화는 여러 장면에서 웃음을 유발하며 둘이 티격태격하며 조금씩 다가서는 모습도 상당히 흥미롭다. 특히 쫓겨나기 직전에 카림이 민서에게 한 말은 남녀라는 사이를 넘어서서 그 울림이 크고 길다.
“친구를 웃게 만드는 사람은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
※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웃었던 장면은 민서가 마사지를 하기 위해 들어간 방에서 담임 선생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선생으로 출연한 김재록은 신동일 감독의 첫 장편인 <방문자>에서 주인공이었다.
※ 신동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반두비>가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는 바람에 속이 많이 상했다며 그 과정을 빌어, 차기작 제목을 <타협은 없다>로 정했다며 웃었다. 농담이긴 했지만 청소년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영화, 청소년이 주인공이며, 청소년 영화제 초청작으로 선정된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다니, 뭐 이런 경우가.
※ 당연하게도 이 영화의 최대 수확은 백진희라는 신인 여배우이다. 어찌 보면 축소시켜놓은 듯한 윤은혜인 것 같기도 한 백진희는 엉뚱하면서도 발랄하고, 속으로 고민하고 끙끙대기보다는 바로 행동에 나서 응징하는 여고생 민서 역을 맡아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쳐 보인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제외하고 조금은 거칠고 성긴 <반두비>에서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면 그 공은 단연코 백진희에게 돌아가야 한다.
※ 이런 얘기는 너무 당연한 얘기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에게 한국의 여고생과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 노동자(불법체류자)의 사랑 이야기는 불편하거나 또는 혐오감을 주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감정이 좀 느껴지는 것하고(이건 생소함의 문제이니깐) 욕을 하며 겉으로 발산하는 것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 영화에 대해 욕을 하는 사람이 방글라데시 출신의 불체자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이유로 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연쇄살인범 중 가장 많은 비중이 30대 백인이라 한다. 그렇다면 모든 백인이 사랑을 나누는 영화는 기피되어야 하고, 또는 한국에서 벌어진 주한미군 범죄를 돌이켜보면 미군이 주인공인 영화는 기피되고 욕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만약 <반두비>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방글라데시 출신이 아니라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 출신이거나 백인이라고 하면 어떠했을까? 또는 성을 바꿔 한국 남자와 방글라데시 여자 내지는 베트남 여자와의 사랑이야기라면 어떠했을까? 하긴 노예가 해방된지 수백년이 흐른 미국에도 여전히 흑백갈등이 존재한다는 걸 고려해보면 이제 갓 시작인 한국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치유될 거라고는 생각진 않는다. 다만 그것이 단순한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의 외국인, 우리보다 피부색이 검은 외국인을 향해 집중적으로 제기된다는 건 우리의 철학, 가치관, 세계관이 너무 편협한 건 아닐까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