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형의 <폭력써클>은 스타일리쉬한 영화임이 분명하지만, 폭력에 대한 탐미주의에 물들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정작 이 영화가 비판하고 있는 지점은 폭력에 대한 무절제한 미화에 물들었던 과거의 영화들이다. 그렇다면, 박기형 감독은 (폭력에 관한) 스타일리쉬한 영화 양식으로 도리어 폭력에 대한 미화를 막은 셈이다. 모순적인 문장 구조로 읽힐 수 있겠지만, 난 이 영화를 보면서 스타일리쉬한 폭력 영화와 폭력에 대한 탐미주의가 결코 등치될 수 없음을 넘어서 부정되어 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믿기 어렵지만 박기형은 이를 해냈다. 그리고 여기에는 특별한 맥락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1 . 왜 하필 학원 폭력인가?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의 시발점은 결국 학교이다. ‘학교’자체가 폭력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수는 없지만, 모든 폭력의 배경으로 작용하는 건 사실이다. (중간 잠깐 인서트 된 ‘걸프전’과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오락을 빼자면 말이다.) 학교란 기존의 세계의 질서와 별도의 질서로 움직이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특히 그것이 폭력에 관해서는 말이다. 특이할만한 점은 감독이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시퀀스에서는 다른 필터를 적용했다는 점이다. 영화상에서 학교가 배경일 경우 노란색 필터를 사용하여 보통의 화면보다 좀 더 노란색이 강조되게 찍었다. 물론 노란색 필터를 사용하면 경계선을 부드럽게 처리해 줌으로서 역동적인 동작을 잘 표현 할 수 있기 때문에 스타일적인 면에서 이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지만, 특정 장소에서만 이를 적용했다는 점은 다른 범주에서 해석해 볼 수 있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쓰임새로 가장 대표적인 영화로 스티븐 소더버그의 <트래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학교란 또 다른 세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학교가 세상과 달라지는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폭력에 대한 너그러움이다. 사회에서 충분히 형사소송감인 격투는 학교 안에서 한 때 치기어린 주먹다짐으로 다르게 인지된다. 엄연히 폭행에 해당하는 체벌을 가하는 선생이라는 존재도 은연중에 인정된다. 학교를 벗어난 학생끼리의 싸움도 경찰서에서는 보호자 동반에 훈방 조치되는 유달리 다른 범죄들보다 너그러운 것이 한국 사회이다. 분명 학교는 폭력에 대해서만은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다. 폭력에 대해서만은 학교는 하나의 또 다른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다. 영화가 폭력을 이야기의 주제로 잡았을 때, 학교는 최적의 영화 배경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오히려 조폭들의 이야기보다 학원 폭력은 폭력에 관한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그려내기에 수월한 배경이다. 학원 폭력은 학교 안에서 모든 일들이 설명되어지고, 해결되어진다. 이런 완벽한 세계가 깨어지는 순간은 그것이 살인 같은 학교라는 자장(磁場)안에서 더 이상 어떻게 완충할 수 없는 결과가 발생 할 때이다. 결국 박기형 감독은 폭력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위하여 배경을 하나의 세계로 축소시킨 것이다. 조폭 세계가 다양한 분류의 폭력을 전시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근원적인 폭력에 대한 탐구에는 이르기에는 힘들다. 조폭 영화에서 폭력은 그들에게 당연히 주어진 영화적 장치이다. 누구도 왜 조폭이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이 폭력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학원 폭력의 경우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당연히 폭력을 써야 하는 이해관계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 결국 이 영화가 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야기가 ‘단순 축구 모임이었던 타이거가 어떻게 폭력써클이 되어 버렸는가?’라는 사실을 나열시킨 기록문인 것처럼, 학원 폭력에는 폭력의 불가항력적인 (혹은 그렇다고 착각하는) 시발점이 존재하며, 폭력의 불필요한 확장이 있으며, 폭력의 비극적인 결과가 동시에 공존한다. 학교는 폭력에 관하여 하나의 자유지대에 속한다. 선생님을 때리고 퇴학당한 홍규가 학생의 신분을 벗어난 상태에서 TNT의 리더인 조성기의 폭력에 필사적으로 비폭력으로 대응하려는 노력도 이런 맥락으로 살필 수 있다.
2 . 왜 스타일리쉬한 폭력 영화인가?
나는 박기형 감독을 국내에서 정말 몇 안 되는 실력 있는 스타일리스트라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 준 <여고괴담>의 ‘점프컷’은 누구나 상상해봤을 법 한 장면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리 쉬이 시도해볼만한 방식은 아니었다. 그 만큼 박기형 감독은 상당히 과감한 연출 기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스타일리스트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감독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스타일리쉬하다는 것이 꼭 감독의 이런 역량 때문이라고만은 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폭력(액션) 시퀀스는 시간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로 자극적으로 변해간다. 단순히 폭력의 강도가 쌔졌다기보다는 그것을 연출하고 있는 방식에서 보이는 폭력을 좀 더 강렬하게 그리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맨 마지막 당구장 격투씬에 이르러서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영화는 폭력에 대하여 더 없이 잔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데, 특히 이 장면에서는 기존의 폭력 영화가 행했던 관습적인 장면 처리(단색조 화면, 강렬한 흑백 콘트라스트, 스로우 모션 처리 등등)를 통하여 우리가 기존에 접해왔던 폭력에 관한 영화들의 기억을 회상하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결코 폭력에 대한 그 어떤 정당성을 주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기존에 접해왔던 폭력에 관한 영화들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여 당연히 폭력을 사용해야 했던 영화적 합의(액션영화라는 장르성 혹은 복수극이라는 테마)를 가졌던 반면, 이 영화는 폭력이 없던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폭력의 비극적인 결말까지 일직선으로 달리면서 ‘그들이 과연 이런 폭력의 세계에 빠져야 할 필요가 있었는가?’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결국 이전의 폭력 영화들이 폭력에 대한 적당한 명분을 던져주고 관객들은 그것에 대한 잔인성에 무의식적 합의를 도출하고 아주 쉽게 폭력 시퀀스의 어떤 스타일적인 면모에만 빠져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명분 따위는 주지 않음으로서 숨겨져 있던 폭력에 대한 잔인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든다. 아무리 스타일리쉬한 장면으로 치장되더라도 이미 벌어진 폭력의 잔혹성에서 이 영화는 동의 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부분에서 박기형 감독은 스타일리쉬한 폭력 장면이 가지는 일종의 윤리적 부재 문제에 대하여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박기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스타일리쉬한 화면으로 맨 마지막 시퀀스를 장식한다. (교도소에서 편지를 읽는 장면은 일종의 에필로그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미학적인 완성도만으로 평가 할 순 없다 작가의 의지가 들어나도록 만들어진 구조가 확실하다면 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 단순한 축구 모임이었던 ‘타이거’는 왜 극악의 폭력써클이 되었는가?
이런 모든 맥락은 결국 이 질문의 요지로 축약된다. 이 질문을 앞서 말한 특별한 두 가지 맥락 안에서 펼쳐 보였을 때, 우리는 폭력의 역사 앞에 당도하게 된다. 이것은 곧 한 인간이 폭력에 어떻게 함몰되어 가는가에 대한 도식이다. 폭력은 인간이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장악한다. 폭력은 강한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굴복한 사람이 쓰게 되는 것이다. 특히 폭력을 가장 반대했던 주인공 이상호(정경호역)가 한 번 폭력에 빠져들게 되자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결국 큰 힘을 가진 사람이 폭력이란 방식에 점거 당했을 때, 사건이 파국에 치닫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영화에서 잠깐 인서트 된 걸프전과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라크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을 떠오르게 만들며 진짜 폭력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 의식은 그대로 대입된다. 자 정리해보자. 이 영화는 폭력의 시발점에 영화를 대입시킨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무절제한 폭력에 대한 미학이 학교라는 세계에 폭력의 접근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어지는 힘의 논리. 곧 보복에 의한 폭력은 인간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폭력이 용인되어진 세계와 폭력에 함몰되어가는 인간 그리고 그것을 응시하는 시각을 응축시켜 묘사하고 있다. 영화가 가지는 최소한의 윤리적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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