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글 : http://seoulrain.net/569
현재 국가청소년위원회에서는 홈페이지에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의 명단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놀랍게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 어떤 직업을 가진 몇 살의 누가 언제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얼마전 기사에 따르면, 내년 2월부터는 성범죄자가 어디에 살고 어떻게 생겼는지 공개할 뿐 아니라, 공개시한도 무기한으로 하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차례로 공개하고 삭제하는 방식이었죠)
기사스크랩:성범죄자 사진·주소 내년 2월부터 공개
저는 제가 만난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만 해도 성범죄자를 절대 용서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범죄자의 인권 문제에 대한 고민도 있습니다. 숙제를 안해왔기 때문에 밥을 먹지 말라는 작은 착각에서부터 시작하여 성범죄자에게 채우는 전자팔찌의 도덕성 논란까지 - 과연 인권은 어느정도로 관용도 있는 개념인 것일까요?
니 딸이 당해도 그런 소리를 할 거냐? 그런 짓을 안하면 벌도 안받을 거 아니냐? 등등의 비난에 직면하여, 여기 성범죄자의 신상공개에 대한 문제작이 하나 있습니다.
************** 두 번째 여행(정재은 감독): 가까운 미래, 너무나 모범적인 아파트 구경하기. '그 남자의 事情(The Man With An Affair)'. 시공간이 모호한 신도시의 주거형 아파트, 4각의 건축모형인 이 아파트는 가운데의 공간이 뚫려 있어 어디서든지 주민들의 행동거지가 한눈에 보이는 신개념의 공간이다. 이 아파트에는 최근, 가상의 성범죄 사이트 www.sexoffender.not에서 신상 공개된 남자 A모씨가 살고 있다. 이웃으로부터 심하게 왕따를 당하는 A모씨에게 유일한 관심을 갖는 이는 이웃의 오줌싸게 아이. 밤마다 이불에 오줌을 싸는 아이는 옷을 벗긴 채 소금을 받아오라는 엄마의 형벌을 받는다. *****************
저는 이 영화를 우리반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남자의 사정>을 보면서 아이들은 오줌싸개 어린이가 상당히 불쌍했던가 봅니다. "저렇게 예쁜 아이를 괴롭히는 여자(변정수), 계모 아냐?"
하지만 예쁘고 착한 아이를 동정하고 있다면 영화의 메세지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더군다가 당신이 성범죄자 신상공개에 찬성한다면 섣불리 오줌싸개 편이 되어서는 곤란하지요. 왜냐하면 이 영화는 애초에 오줌싸개의 유린당한 인권과 - 어린이에게 인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를 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 성범죄자의 인권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배뇨, 지정된 시간과 장소가 아닌 곳에서의 배설은 왜 도덕적으로 나쁜가? 2) 성행위, 왜 미성년자와의 성행위는 나쁜가?
이 두 질문은 병치되면서 영화 전반에 은근한 압박으로 보는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대학 때 만난 분석철학자 벨리오티는 성도덕지수를 대략 다음과 같이 함수화하였습니다.
성도덕 지수 = 동의 X (고려+착취+삼자+배경/2) 구승회역,레이몽 A. 벨리오티, <Good Sex>,민음사,2000년,346쪽.
일단 이 공식 자체가 우리에게 전통적 성도덕이 이미 무기력하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주시합시다. 동시에 이 공식에서 상호호혜적인 '동의'는 도덕성의 필요조건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다른 층위에서 점수가 높아도 동의가 없으면 그 행위의 도덕성은 제로입니다.
물론, 이 공식은 자유주의자의 견해로서 좌파적 견해에는 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만(섹스는 자본주의의 매춘이다), 정치이데올로기 이전에 순수윤리적 관점에서 성행위의 도덕성을 따질 때 '동의'가 매우 중요한 건 사실이죠.
어쩌면 오줌싸개의 생리적 배뇨행위는 둘이 하는 섹스와는 달리 동의 개념을 들이대기에 부적절할 수 있겠으나, 영화에서 보면 변정수가 기저귀와 물을 두고 아이에게 선택을 종용하는 장면에서 아이의 배뇨행위 또한 하나의 합의과정이라고 봅니다. 아이는 기저귀에 동의하지 않고 물을 마시기로 스스로 동의함으로써 이불에 오줌을 싸는 것입니다.
'그남자'의 경우 그가 강간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의 행위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질타당할만하고 삼자에게 악영향을 끼쳤더라도 도덕 점수는 적어도 0점은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동의'는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라는 점이 약점이지만요.
어쨌든 아이의 배뇨와 그남자의 우발적 성범죄는 비슷한 속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아이 / 그남자 vs. 엄마, 아파트] 의 대결구도는 이 영화에서 명확해 보이거든요.
감독은 실제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무시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의 인권까지 인권이라는 개념 하에 보호되는 사회야말로 진정 발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발언은 피해자 인권 관점에서 보면 노발대발할 말이지요. 여성과 청소년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섭섭하지요. 실제로 국가청소년위원회에서 감독에게 딴지를 걸었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그러나 어떤 행위가 자발적, 상호적 '동의'에서 출발한 인간의 행위라면 우리는 처벌과 제재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하겠지요. 0점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여기서 이 논란에 대한 대답은 살짝 유보하고, 잠시 영화가 말하는 소년의 오줌싸기와 우발적 성범죄의 유사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아이와 그남자는 둘 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요. 아파트는 냉철한 민주주의의 상징입니다. 아파트의 가운데는 뻥 뚫려있지만 여느 복도식 아파트가 그러하듯 아파트 중앙의 공간은 '광장'이 아니라 감시를 위한 개방과 무장해제 기능으로 작동합니다.
이 차가운 민주사회의 특징은 몇 가지로 나타나는데, 감독은 아파트에 새겨진 문구와 방송을 통해 그 성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당신의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가
첫째, 이웃에 관심이 많아야 합니다.
이 표현은 과거 마을공동체에서는 너무나 쉬운 질문이면서, 현재의 도시사회에서는 어려운 질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파트에서는 다시 쉬운 질문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이웃에 누가 사는가? 간단합니다. 나쁜놈들 모아놓은 사이트에 가서 이웃이 나쁜놈인지 알아보면 끝입니다. 즉, 아파트에서 '누구'란 나에게 위험한가 아닌가의 정보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2. 확인하라. 접속하라
타인의 안정성을 항상 확인해야 하는 것은 현대의 비극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질문으로 타인에게 묻거나 그와 함께 경험하지 않고 국가에게 물어보는 것은 더욱 비참한 일이지요. 신병보다 더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영화 <접속>의 전도연과 한석규처럼 서로 당기면서 접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sexoffender.net에 접속합니다. 거기에 우리 앞집 사람, 옆집 사람이 있나 확인하지요.
4. 쾌적환경명확분리
그남자는 말이 없이 분리수거통을 향해 깡통을 던집니다. 사실 이 남자 또한 분리수거 되었습니다. 직업적, 성적, 경제적, 문화적, 정신적, 종교적 자아가 한꺼번에 성범죄자라는 '쓰레기'로 깔끔하게 분리수거되었지요.
6. 지식이 힘이라면 정보는 무기이다 이 아파트에서는 지식이 사물과 인간에 대해 탐구하기 위한 참고자료가 아니라, 나의 권력과 재산을 보호하는 방패이자 창이 되었습니다.
7. 아는 것이 당신을 지키는 힘이다. / 신상공개위원회에 접속하라. / sexoffender.net
이 아파트는 현대 지식사회의 연장인 동시에 극도로 결벽적이고 은밀한 정보구역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간에 정보를 공개하거나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습니다. 지식이 범람하면 누구 말이 맞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무엇이 맞는지 알기 위해서는 국가적 공신력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위원회에 접속해서 그 정보로 자신을 지키게 되는 것이지요. 사적인 사색은 사치입니다.
사실 모두가 솔직하게 자기 정보를 공개하면 좋지만, 단 한 사람의 사기꾼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모두가 자신의 사적 정보를 지키고, 타인의 사적 정보를 먼저 알아내기 위해 배틀을 계속하게 되지요. 이것이 아파트의 딜레마입니다.
8. 사적 보복은 야만이며 취지에 역행한다
근대 이래로 법치국가는 정보를 권력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국가/공적 기관의 도덕성을 선전해 왔습니다. 선전 과정에서 사적이고 미시적인 차이나 돌출행동은 과감하게 희석되거나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생수통의 물을 직접 마시거나, 콘돔 없이 미성년자와 섹스를 하거나, 빤스를 입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과 함부로 얘기하는 것은 야만이고, 그남자 집 앞의 문패는 문명입니다.
8. 모든 이가 공개되지 않음에 감사하라
아이가 소금을 얻지 못하는 장면, 그 꼬마 뒤로 보이는 글귀입니다. 빤스도 못입고 공개되어버린 아이의 치부 앞에 다른 사람들은 자기 빤스를 잘 챙겨입고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갖가지 지적을 아이에게 발설하지요.
=== 자 이제 이런 아파트 공간에서 발가벗겨진 채 쫓겨난 아이가 소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오줌싸는 짓을 저질러버린 아이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청소년성범죄를 저지른 그 남자를 비교해보겠습니다.
9. 이걸 차고 자면 물을 마시게 해준다
이 말은 엄마(변정수)가 아이에게 해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기저귀를 찰 나이는 지났습니다. 아이는 다만 물을 먹고 싶지만 기저귀를 차기에는 자유스럽지 않기 때문인지 타협점을 찾지 못합니다.
이 기저귀는 그 남자 입장에서는 콘돔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남자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변정수 엄마처럼 그를 욕할 수 있습니다. "콘돔 끼고 하지 그랬어."
그러나 엄마가 오줌을 쌀 줄 알면서도 기저귀를 차지 않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듯, 우리는 그 남자가 왜 그 범죄를 저질렀는지 잘은 알지 못하지요. 하지만 살인자나 성범죄자에 관한 기사가 올라오면 사람들은 기저귀성 발언을 서슴치 않습니다.
"안하면 될 거 아냐? 그리고 콘돔은 폼으로 있나?"
영화는 이런 즉흥적인 발언이 가지는 폭력성에 주목합니다.
10. 물을 못마신 아이, 아무도 모르게 마셔버리는 물
아이는 결국 갈증을 참지 못하고 복도에서 물을 마셔버리고 맙니다.
이 대목은 상당히 아이가 불쌍해지는 대목이지만, 무척 위험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 장면을 그 남자의 사정으로 이입할 경우, 그 남자는 결국 성욕을 참다가 이 아이처럼 어느 복도와 같은 어색한 곳에서 일을 저지른 것이 되니까요.
영화는 아이가 생수병의 물을 마시듯, 그남자가 참지 못한 것도 어떤 욕구억압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 아이가 저렇게해서라도 물을 마시고 싶었다는 점에는 공감이 가지요.
11. 기저귀를 차지 않고 부지불식간 잠들어 버리는 아이 - 아이가 기저귀를 차지 않았듯, 남자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콘돔을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알면서도 왜 기저귀를 차지 않는 것일까요?
12. 풍선 분다 (방광, 성욕) - 아이는 꿈 속에서 풍선을 붑니다. 아마 소년의 방광이 차오르듯 ... 그남자도 참지 못했을까?
13. 풍선이 터지고
14. 배뇨. 사정 아이는 결국 본의 아니게 또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 장면은 그남자의 사정과 대입되겠습니다.
15. 집에서 쫓겨난 아이,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분 애들이 사실 오줌을 싼다고 봐도 돼." - 근데 왜 딴 애들은 소금을 받으러 다니지 않는 거야? "그게 뭐냐면은.." - 하지만 지금 내가 필요한 건 소금이야. 소금이 없으면 나는 집에 못들어간다구
일종의 형벌로서 수치스럽게 바지가 벗겨진 채 쫓겨난 아이에게 친구가 말해주는 사실은 충격적이죠.
사실은 모든 아이가 오줌을 싼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남자의 경우에 대입시키면 청소년성범죄자와 일반인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모든 아이가 소금을 받으러 다니는 것은 아닌 것처럼 사실은 모든 범죄자의 신원이 공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공평하고 법치적인 사회에서 생기는 불합리성은 친구가 귀속말로 전하듯 무언가 꺼림칙하거나 부끄러운 비밀에 부쳐있습니다.
예컨대, 자기 자식이 창피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엄마의 배려?로 수치스러운 벌을 피하는 아이들도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적으로 벌써 복도에 빤스 없이 서버린 이 꼬마에게는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수치와 비인권적 처벌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영화가 중요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상이 한 번 공개되면 나머지 모든 생활의 인간다움이 끝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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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아파트 주민의 의견은 다음과 같죠.
16. "근데 너 왜 빤스도 안입고 돌아다니냐, 너 오줌 쌌구나. 소금 얻으러 왔어 빨리와봐 요즘도 소금 얻으러 다니는 아이가 있어? 어머 얘 소금 얻으러 다니는 주제에 뻔뻔스럽게 말하는 것 좀 봐 소금 얻으러 다니는 주제에 아주 당당하구나 야 이녀석아 뒤돌아서 엉덩이 보여주면 소금줄게 . 엉덩이 좀 보자."
첫번째 집이 아이에게 하는 비난은 "왜 이렇게 뻔뻔스럽냐?"입니다.
창녀가 몸을 쉽게 주리라는 편견처럼 사람들은 아이에게 엉덩이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남자의 경우에는 어떤가요? 그는 호색한일까요? 그남자는 아무데서나 바지를 벗는 변태일까요? 그 남자는 뭐 잘한 게 있다고 깡통을 분리수거통에 던지는 걸까요?
감독은 우리가 그것을 함부로 알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17. "야 근데 너 오줌쌀 때 기분 어땠어? 너도 어느 정도 쾌감 같은 거 있었던 거 아냐? 그러니까 이런 벌쯤 달게 받을 수 있어야지 안그래?
여고생은 경제학자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첫번째 집처럼 수치와 뻔뻔함을 비난하거나 걸고 넘어지지는 대신에, 쾌락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이런 수치쯤은 아무 것도 아니니 수치를 대가로 지불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남자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니가 좋으니까 하는 건 뭐라 안하는데, 니가 하다가 걸렸으니까 신상공개도 다 니가 감당해야 하는 거잖아. 내가 언제 너보고 하라고 시키든?"
21. (남자) (말없고 힐긋)
세번째 집의 반응은 사실 가장 흔한 반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남자는 말 없이 아이의 아래를 훑는군요.
우리도 그남자를 보면서 말 없이 그 날의 일을 떠올리고는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을지도?
22. (사진사) "아니아니 그거 말구 좀 더 슬프고 가여운 표정을 지어봐 어 그래 바로 그거야."
자, 그 다음 집은 사진사가 살고 있습니다. 요즘의 세련된 저널리즘은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고발성으로 취재하기보다는 억압당하는 입장을 포장하고 싶어합니다. 저널리즘적 관심이 있어서 소수자의 문제가 매일 방영된다고해서 인권이 신장되는 건 아닐테지요.
23. "참 이쁘게 생긴 꼬마네 아니 너처럼 우아하고 이쁜 애가 어떻게 바지에 오줌을 쌌냐? 너 자기 전에 화장실 가는 거 깜박한 거지 그렇지? 내 의견으로 보기엔 말야 니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다. 총체적인 구조 자체의 문제야 니 방에서 화장실이 너무 먼 거 아니니."
담배에 쩔어사는 운동권 사상가? 아저씨의 말입니다.
이 아저씨의 지적은 첫번째 집의 '수치스러운 줄 알아라'는 지적과 대립되면서 아이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 하지만, 사실 아저씨는 눈 앞에 있는 아이에게 별 관심이 없고 혼자 지껄이고 있을 뿐입니다. 소금은 안주고 웬 구조 타령?
24. 민주주의 "생각해봐라. 니가 아무에게두 소금을 받지 못했다면 나두 너에게 소금을 줄 수가 없다 내가 너에게 소금을 주지 않으면 넌 아무에게도 소금을 받을 수 없을 거야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대의에 따라 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알겠니?"
민주주의는 우리사회 최고의 덕목이지만, 소수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기제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면 나도 아니고, 내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도 아니다. 나는 다수편이다. 너는 왜 대의에 따라 살지 않고 거기 빤스를 벗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오줌싸개 아이가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까요? 오줌은 다수의 찬반논쟁으로 결론나는 게 아닌걸요.
그남자의 신상공개는 분명 민주적으로 이루어진 조치이겠지만, 민주주의가 그 남자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 듯 보입니다.
25. "오줌이나 싸는 애가 커서 뭐가 되겠니? 아이고 이고 요 건방진 얼굴 하는 거봐 너 챙피한지 알아야 오줌을 안 싸는 법이야 긴장을 안해서 그래 긴장을. 너처럼 오줌이나 싸는 짐승만도 못한 놈에게 줄 소금 나한테 눈꼽만큼도 없다 썩 꺼져. 너같은 놈들은 그냥 확 거세를 시켜버려야 해 그냥!"
사실 대부분의 인터넷 댓글들이 보이는 반응이지요. 아이의 얼굴 생긴 것과, 미래까지 한꺼번에 매도 당하고 있네요.
그남자에 대해서도 매도는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매도라 함은 예컨대, 그남자의 생김새, 직장, 취미, 다른 부분의 인간성까지 모두 짐승 취급 당해왔을지도 모르지요.
아이가 빤스를 벗자 그 수치가 그 아이 전영역으로 확장되었듯이, 그남자 또한 지나치게 큰 범위에서 판단받고 손가락질 받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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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담배피는 변정수 / 감시망 / 가운데의 공터 / 풍선
그러나 사실 이러한 비유나 여러가지 비난, 비판을 찬찬히 들여다보아도 해결이 쉽지는 않지요.
억압하는 쪽이나, 오줌 잘 가리는 사람이나, 성범죄 안저지르고 사는 착한 사람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인 인생입니다.
변정수는 아이가 오줌을 참지 못하듯 담배를 못 끊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11. 감시와 풍선(풍선은 감시보다 밝다)
영화는 아이가 영화 초반에 그남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느라 놓쳐버린 풍선을 다시 돌려놓으면서 끝납니다. 풍선은 감시의 불빛보다 찬란하게 빛나면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저 풍선처럼 존중받는 사회는 어떤 사회여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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