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웃 영화들의 사정없는 물량공세에 푹 빠지다가도 그 속에서 활약하는 주인공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볼 때면 혀를 내두를 때가 적지 않다. 엑스트라 악당들은 스치기만 해도 비명횡사하는 총알을 초인처럼 잘도 피하거나 설사 정통으로 맞아도 말로만 끙끙대지 여전히 활력 넘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주인공 한 명을 수십명의 악당들이 공격할 때도 한꺼번에 덤비지 않고 하나씩 덤벼서 화를 자초할 때, 다른 사람들은 암말말고 가차없이 처치하던 악당들이 주인공 앞에만 서면 "나 죽여주십쇼"라는 듯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대놓고 허점을 드러낼 때 등이 그렇다. 점점 영화 속에서 현실을 찾게 되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렇게 여전히 비현실적인 특권을 누리는 헐리웃 액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제 우스꽝스런 패러디의 대상이 되어도 좋을 만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사람들이 스티븐 시걸, 장 클로드 반담, 척 노리스 등의 배우들, 그리고 <다이하드> 시리즈의 주인공 존 맥클레인이었다.
존 맥클레인은 한마디로 헐리웃 액션 영화식 과장법의 결정체였다. 미국 전체의 앞날을 위협하는 거대한 테러 조직들을 혈혈단신 잘도 맞선다. 그의 활약 앞에 그 무시무시하던 테러리스트 무리들이 무릎꿇고, 미국의 위기는 순식간에 진화된다. 이렇게 지극히 미국적인 과장법이 적용되는 캐릭터였기에 이제 21세기에는 쉽게 통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21세기에 보란듯이 나온 12년 만의 속편 <다이하드 4.0>을 보면, 그 배짱 좋던 존 맥클레인은 이러한 우리의 예상에 그의 트레이드마크 대사인 "이피 카이 예이, 마XX커!"(만세다 시베리아야)를 주저없이 날리는 듯하다.
뉴욕을 위협하던 테러리스트 사이먼을 진압한 후 10여년이 흐른 시간,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은 여전히 현역 형사로 활동중이지만 여러모로 주변 상황이 난감하다. 세상의 모든 고난을 혼자 짊어지고 다니는 듯한 그의 활약에 질렸는지 아내와는 갈라섰고, 설상가상으로 딸 루시(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테드)는 아빠라고 부르기도 싫어할 정도로 극심하게 반항한다. 그런 가운데에 그를 위해 준비한 듯한 고난이 또 한번 닥친다. 뭔 또 말썽을 부렸는지 매튜 패럴(저스틴 롱)이란 해커를 FBI 본부까지 무사히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는데, 사실 이게 보통 심각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번엔 사이버 테러였다. 사이버 시스템을 다루는 데 능숙한 테러리스트 토머스 가브리엘(티모시 올리펀트) 일당이 이를 이용해 미국 전역의 교통, 의료, 전력, 금융 시스템까지 마비시키려 하고 여기에 매튜가 연루되어 있어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 고도의 디지털 기술이 이용되는 사이버 테러지만 맥클레인 형사는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상황을 정면돌파한다. 매튜와 함께 산전수전 다 겪는 와중에, 이제 테러는 특정 건물, 특정 도시를 넘어 미국 전역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자그마치 12년 만의 속편, 게다가 주연 배우 브루스 윌리스는 이제 50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뿜어내는 존 맥클레인으로서의 매력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 사실 존 맥클레인이 우리를 만족시켰던 것이 단순히 몸으로 때우는 액션만은 아니지 않았던가. 비록 나이가 나이니만큼 젊은이나 소화할 만한 격한 액션을 완벽히 소화하는 건 힘들더라도 그가 우리에게 보여줄 결정적인 매력은 여전했다. 바로 할 거 다 하면서도 시시콜콜 불만 가득한 어조로 자신 앞에 닥친 상황을 적당히 째려볼 줄 아는 시니컬함. 눈 앞에 닥친 상황에 왜 나한테만 이따위 난관을 살포시 올인해주냐고 투덜투덜거리면서 결국은 다 해치우는 능숙함에 어딘가 삐딱하면서도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맥클레인 형사의 캐릭터를 브루스 윌리스는 3편을 찍은지 12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한 감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더불어 나이가 나이고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예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인생고참"으로서의 지긋한 카리스마도 어느새 배어나오고 있었다. 역시, 액션이 아닌 캐릭터로 매력을 뽐내는 존 맥클레인이란 캐릭터 앞에 세월 따위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그 외 배우들을 살펴보면, 함께 호흡을 맞추며 마치 버디무비와도 같은 모습을 보여줬던 저스틴 롱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존 맥클레인이 호흡을 맞췄던 파트너 중 가장 어린 연령이 아닐까 싶은데, 그만큼 대비되는 사고방식을 지닌 맥클레인과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발하면서도 어느덧 유대감을 느껴가는 과정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악당 토머스 가브리엘 역의 티모시 올리펀트는 <다이하드> 시리즈의 다른 악당들과 유사하게 세상에 악의를 품고 복수를 감행하는 식으로 미국을 초토화시키려는 악역으로서 냉철함과 광기를 적절히 표현해줬지만, 역시나 베테랑 배우들이 보여줬던 전편 악당들의 모습보다는 그 강렬함이 좀 덜한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가브리엘의 여자친구이기도 한 마이 역의 매기 큐의 과묵하면서도 능숙하고 영리한 모습이 좀 더 카리스마 있게 느껴졌다. 아, 카메오 격으로 출연한 마법사 역의 케빈 스미스 감독의 버럭연기도 놓치면 서운하다.
대강의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영화가 표방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에 맞서는 아날로그"다. 디지털 테러에 맞서는 아날로그 형사의 활약상이라는 이야기의 기본 줄기도 그렇거니와, 이 영화가 우리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방식에서부터 이러한 영화의 목표가 확연히 느껴진다. 이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거대 변신로봇까지 나와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경이로운 액션을 보여주며 CG의 위용을 과시하는 시기에, 이 영화는 그래픽 사용을 가능한 한 하지 않은 채 실제 스턴트로 볼거리를 선사한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컴퓨터의 도움없이 현실에서 직접 펼쳐지는 무지막지한 충돌과 파괴 장면은 화려한 기교 부리지 않고 무작정 펑펑 터뜨리고 쾅쾅 부딪치게 하는 데에서 오는 단순하지만 직접적인 옛 헐리웃 영화의 쾌감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듯해 반가웠다. 차 두 대 위에 다른 차가 날아와 떨어지고, 차를 던져 헬기를 폭발시키고, 지상을 달리는 트럭을 제트기가 비슷한 높이에서 추격하고, 고가다리가 뒤이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는 등 여전히 헐리웃이기에 가능할 사정없는 파괴와 충돌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다이하드> 시리즈가 처음 나온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런 박력 있는 액션에만 기대지 않은, 그 안에서 동분서주하는 캐릭터의 생동감 때문이다. R등급이 아닌 PG-13 등급이다보니 전편만큼 격한 언어 사용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정곡을 찌르는 말발과 유머감각이 펼쳐진다. 존 맥클레인의 캐릭터는 그만큼 나온지 20년이나 됐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식지 않은 매력을 과시한다. 그는 매 편마다 중요한 건물, 거대한 도시, 나아가 미국 전역까지 위협하는 거대 테러 조직과 정면으로 맞장뜨지만 무게 잡는 순간이 별로 없다. 그 거대한 조직들과 홀로 맞선다고 해서 자기가 뭐 대단한 사명감이라도 지닌 듯 있는 폼 없는 폼 다 재는 모습은 그에겐 용납할 수 없는 모습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기 앞에 다가온 상황에 불만을 표시한다. 해커 한 명 모셔오는 거에 고참이 필요하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는 둥 시시콜콜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은 난관을 용케도 다 헤쳐나가는, 본인은 영웅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면서도 그의 말마따나 남들이 하지 않은 고생을 죄다 떠맡다보니 어느덧 영웅이 되어버리는 어깨에 힘을 뺀 모습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적당히 거부감 없는 단순무식함도 새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머리 대신 몸으로 밀어붙이는 그의 스타일은 90년대 이전 대부분의 액션영화 속 주인공들의 전형적인 성격이지만, 그런 성격을 가졌다간 이제 욕이나 들어먹을 지금에 이르러 다시 이런 캐릭터가 부활하니 새삼스럽게 신선하게 다가온다고나 할까.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기에 이상하게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성격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절대 머리를 쓰려 하지 않는다. 안그래도 앞에 다가온 상황이 예상과는 많이 빗나가 난감한 와중에 그는 적극적으로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파트너인 매튜가 "작전이 뭐냐"고 물으면 "딸을 구하고 놈들을 족쳐야지"라는 밑도끝도 없는 멘트만 날릴 만큼 치밀한 계획이나 두뇌 플레이따윈 그의 사전에 없다. 총알이 떨어졌기 때문에 멀쩡한 차를 날려 헬리콥터를 부수고, 잠입액션 펼치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시끄러운 육탄전을 벌이며 "나 여기 있소" 광고를 하고 다닌다. 이렇게 자신의 단순함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성격을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무기로 활용하며 까칠한 상황을 더욱 까칠하게 처리해 간다. 점점 잠입액션, 기교액션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액션 영화계에서 새삼 단순한 정면충돌 액션이 이렇게 통쾌한 오락이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면서 존 맥클레인은 질긴 목숨, 죽을 듯 말 듯 결코 죽지 않는 특유의 "다이하드" 캐릭터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증명한다.
둘째, 지극히 마초적이다. 다정다감하다거나 섬세하다거나 하는, 요즘에 급속도로 많아지고 있는 이러한 유형의 남성들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여인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자 "반반한 여자라고 봐줄 것 같애"라면서 여성단체에서 들으면 들고 일어날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물론 격투신이니 당연하긴 하지만 잠시나마의 배려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놀랍다) 더불어 이제 스물을 훌쩍 넘긴 어엿한 성인인 딸의 연애 생활에도 일일이 간섭하며 가부장적인 모습까지 잃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절대 이러한 모습이 권장할 만한 모범이 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성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는 요즘 상황에 여전히 사내 대장부로서의 당당함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한 중년 남성의 초상을 보는 듯 하기도 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렇게 요즘 상황과는 맞지 않을 것 같은 존 맥클레인이라는 캐릭터를 단지 과거 회상의 대상으로만 놔두지는 않는다. 앞서 얘기한 요즘 헐리웃 영화들에 걸맞는 입이 떡 벌어지는 물량공세도 그렇지만, 아들뻘의 젊은이와 파트너가 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상황을 주도적으로 헤쳐나가던 이전과는 다르게, 자기와는 생판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젊은이와 함께 다니면서 맥클레인 형사는 본의 아니게 때론 시한부 선고를 받고 오늘내일 하는 아버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벽창호 아저씨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맥클레인 형사는 아들뻘의 매튜와 함께 다니며 어울리기 힘든 세대차이를 결국 드러내고 마는 것인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다가도, 결국 성격도 사고관도 서로 다르지만 어느덧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하는 것 뿐이다. 그러기에 영웅이다"라는 말에 서로 공감하며 동료애를 과시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더불어 맥클레인 형사는 그러한 자신만의 까칠함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딸 루시에게까지 물려주는 양상을 보임으로써(간간이 루시가 내뱉는 대사들은 영락없는 자기 아빠다) 존 맥클레인의 캐릭터가 세대는 물론 성별도 초월할 수 있음을 더욱 강조한다. 디지털 시대에 홀로 아날로그를 지향하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복고적 회상의 대상으로서만 남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고리타분함을 매력으로 드러내고, 다른 세대와 교감하고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도 남겨둠으로써 예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을 보이는, 캐릭터의 독특한 발전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렇게 어떻게 보면 존 맥클레인이라는 사람은 변했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십을 넘긴 나이는 그가 그렇게 하드한 상황을 넘기기에 더욱 힘들게 만들어버렸지만 오랜 시간 지녀온 툴툴 모드와 무모한 자신감만은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지금 나와서 요즘 관객들에게 통하겠냐 싶었는데도 불구하고 시대에 영합할 줄 아는 훈훈한 비주얼의 액션 장면, 젊은 세대와의 무리없는 공감으로 이 20년 된 오래된 액션스타 캐릭터가 지금도 여전히 먹힌다는 것을 당당하게 증명했다. <다이하드 4.0>은 단지 존 맥클레인의 목숨만 질긴 게 아니라, 그가 캐릭터로서 가지는 매력의 유효기간도 질기다는 알려준 영화다. 안그래도 고뇌를 키워드로 하고 있는 요즘 블럭버스터들 사이에서, 이 영화에서까지 진지한 고민을 찾으려고 하진 마시라. 무모한 도전정신으로 지나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광활한 배짱을 여전히 간직한 채 돌아온 그의 상쾌한 까칠함을 맘껏 만끽하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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