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공간의 중심인 오아시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오아시스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물과 숲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곳이다. 그러나 영화 '오아시스'에서 말하는 오아시스는 이 정도의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영하에서 말하는 오아시스는 막힐 데로 막힌 세상을 소통시켜줄 수 있는 핵심이며,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과 활기찬 생명력을 가진 곳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오아시스는 세상의 모든 것이 소통할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 오아시스를 통해서 소통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모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아시스는 세상에서 버려지고 이용당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막혀 있는 세상을 소통시켜줄 수 있는 핵심은 바로 '오아시스'에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막혀 있는 세상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20세기의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인류 모두가 겪었던 전쟁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서로에 대한 불신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제국주의 등으로 인하여 막혀버린 세상을 말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관계의 막힘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를 소통시켜 줄 수 있는 가능성과 힘을 가진 곳이 바로 영화에서 말하는 '오아시스'다.
우선, 이 영화를 볼 때 염두에 두고서 보면 좋을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의 집을 찾아갈 때 항상 무엇인가 짐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둘째, 여주인공이 정상적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갖는 의미이다. 셋째, 경찰서에서 탈출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의 집 앞 나무에 올라가서 나무를 톱으로 자르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넷째, 여주인공이 처음에는 거울을 통해 빛을 비추다가 어느 시점에서 거울이 사라지는 데, 이것이 갖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첫째, 짐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오아시스'를 정점으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간다는 것인데, 이것은 오아시스가 가진 소통공간으로서의 의미와 늘 움직인다는 역동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세상은 오아시스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그곳을 통해 역동성을 얻게 되고 이를 중심으로 움직여 나간다는 것이다. '오아시스'가 소통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소통을 통하여 세상을 움직이며 자신을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풀이된다.
둘째,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정상인으로 행동하면서 남주인공을 사랑하는 장면은 소통을 거부하는 세상과의 연결과 화해를 통하여 소통의 원천이 '오아시스'인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장치는 넣지 않아도 여주인공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감독의 지나친 배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셋째, 나무를 자르는 행위는 벽걸이에 비친 그림자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나무는 세상을 바탕으로 하면서 '오아시스'가 가지고 있는 소통공간의로서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남주인공이 나무를 잘라내는 행위는 세상의 소통공간이라는 성격을 본질로 하는 '오아시스'의 순수한 의미를 회복시켜주려는 행위이다. 이것을 통해 비로소 '오아시스'는 세상과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되며, 참되고 순수한 본래의 성질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넷째, 여주인공이 하는 거울 비추기의 행위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여주인공은 거울과 반사된 빛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남주인공이 세상의 막힌 이치로 자신을 강간하려고 했던 그 시간 이후에 바로 거울이 깨어진다. 그리고 깨어진 거울을 통해서 몇 마리의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여준다. 깨어지기 전의 거울과 빛은 막힌 상태의 세상과 오아시스 사이게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오아시스'가 소통공간으로서의 구실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겨우 가능한 것이 있다면 평화롭다고 까지 할 수 있는 하얀 새를 보여주는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은 거울을 통해서 보듯이 그렇게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그리고 거울이 깨어진다는 것은 남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세상과의 소통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이다. 그 다음에 거울은 사라지고 남주인공을 통해서 여주인공은 세상과의 대화를 거의 직접적으로 시작한다. 이제 간접적으로 세상을 보던 거울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거울과 그를 통해 들어오는 빛, 하얀 새에서 남주인공의 얼굴로 옮겨간 빛, 거울의 깨어짐, 소통의 메신저로 오는 남주인공, 세상과의 대화시도와 세상의 거부, 나무그림자의 제거, 창문을 통해 직접 들어오는 세상의 빛, 완전한 소통 등으로 이어지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이런 점들을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이제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의미들을 생각해보자. 영화에서 오아시스는 여주인공인 공주다. 그리고 남주인공은 오아시스와 세상을 소통시켜줄 사자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장애자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 그런 작품이 아니다. 세상을 구하고 소통시켜줄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을 주여주기 위한 작품이다. 이제 영화를 따라가면서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남주인공은 사막 같은 막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상처 입은 영혼이다. 형 대신 옥살이를 하면서까지 가족을 위해 헌신하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식구들에 의해서 늘 외면 당하는 존재이다. 소통이 안돼는 막힌 세상에서 그가 하는 행동은 모두 이상하기 때문에 늘 부딪혀서 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순수하고 맑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뇌성마비 장애자로 세상에서 격리되어 혼자 지내는 존재이다. 그녀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 장애자인 동생의 이름으로 아파트를 분양 받지만 실제로는 동생은 데리고 살지 않으면서 동사무소에서 검사를 나올 때만 데리고 오빠와 올케에 의해서 철저하게 외면 당한다.
남녀주인공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제공해주고 있지만 버려지는 존재이다. 그들이 버림을 받는 이유는 막힌 세상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은 신체적 장애 때문에, 남주인공은 영혼의 순수함 때문에 그렇게 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바로 세상을 소통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숨어 있다.
남주인공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여주인공과 함께 있을 때 하는 행동과 세상 속에 있을 때 하는 행동이다. 여주인공과 함께 있을 때 하는 행동은 같은 맑음을 가진 상대에 의해서 금방 파악되고 여기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 나와서 하는 그의 행동은 달라진 것은 전혀 없지만 세상은 그의 행동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남주인공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받는다. 그의 행동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왜 그렇게 보이느냐 하면 세상은 막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막혀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내면의 진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주인공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의 행동은 움직임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표정과 어눌한 말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수용되지 않는다. '오아시스'의 순수성과 맑음이 단절된 삶을 살아다는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맑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아시스'인 그녀를 이용만 한다. 장애자 아파트 제도를 악용하는 것에서부터 남주인공의 보호자와 돈으로 흥정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행동은 모두 이해관계로 점철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남녀주인공들에 의해서 세상을 소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은 채 그것을 이용대상으로만 삼는 존재들이다. 막혀 있는 존재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족은 소통의 수단이 없고 이해관계만 있기 때문에 만나면 부딪히고 싸우게 된다. 이것은 남주인공이 세상과 부딪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두 가족의 대표자들에 의해서 남녀 주인공의 수수함은 철저하게 외면 당하고 오아시스와 감옥이라는 두 곳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이 분리를 통해서 두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소통공간의 의미를 확보하게 되고 세상과의 화해를 시작한다. 여기서 영화는 끝이 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아시스'는 막힘이 전혀 없는 소통공간으로 우리가 회귀해야할 공간이다. 그곳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남주인공이 세놓은 방의 이미지와 같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준 어머니의 자궁이기도 하며, 이상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아시스'는 세상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막혀 있는 세상과 그렇기 때문에 顚倒되어 이해되는 '오아시스'의 원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