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소피, 셀린느, 안느... 이렇게 세 자매가 있다. 이들은 과거 아버지의 부정으로 충격을 받은 이들이었고 그녀들의 어머니는 요양원에 있다.
소피는 그저 평범한 세 명의 딸을 가진 주부이고, 남편은 사진작가이지만 남편의 외도가 늘 불만이다. 셀린느는 보험을 파는 평범한 여성이지만 자꾸 그녀 앞에 다가오는 한 젊은 사내가 걸린다. 마지막으로 막내 안느는 친구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 뻘에 가까운 대학교수에게 연정을 느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지만 결코 세 자매의 삶은 절대로 즐길 수 없는 어쩌면 지옥과 같은 삶이다. 그들은 왜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거장 키에슬롭스키의 '삼색 시리즈'를 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웬지 끌렸다. 더구나 이 작품은 키에슬롭스키의 삼색 시리즈와는 다른 또다른 3부작 중 하나이다. 바로 '단테 3부작'이라고 불리우는 작품 중 두번째 테마인 '지옥'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랑페르는 '지옥'이라는 뜻이다. 왜 이들을 지옥과 같은 삶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세 자매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은 '어쩌면 저렇게 하나 같이 운이 안따라 주는 자매들인가?'라는 동정심이었다. 하나같이 제대로 된 삶을 살지 않고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얼마전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의 우울한 버전이라고 해야할까?
첫째딸 소피는 남편의 불륜을 목격하고 남편과 갈라질 것을 주장하지만 오히려 남편은 이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도저 식으로 딸과의 만남을 요청한다. 결국 자신의 힘에 못이겨 아내를 공격하고 발코니에서 떨어져 자살을 시도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멀쩡하게 살아나 또 아내와 아이들을 괴롭힌다. 둘째딸 셀린느는 항상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머니를 만나러 떠나는 기차에서 항상 그녀는 졸고 있고 친하게 지내는 검표원이 그녀를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나타난 건장한 한 남자는 그녀에게 있어서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사내는 이 세 자매와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만드는 결정적 열쇠를 쥔 인물이다. 막내딸 안느는 같이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아버지(교수 프레데릭)를 사랑한다. 그것도 할아버지 쯤 되는 사람과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친구와 그 친구의 어머니(프레데릭의 부인)도 힘내라고 응원한다. 하지만 그게 자신들의 아버지이자 자신들의 남편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했을 일이다.
영화에서는 참 인상적인 단어들이 나온다.
하나는 '우연'과 '운명'의 차이를 강의 시간에 이야기 하는 프레데릭의 모습이다.
'우연'보다는 '운명'이 더 낫자고 주장하는데 창밖에 떨어지는 화단을 우연으로 얻어맞아 죽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운명적으로 사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또 하나는 셀린느에게 다가온 세바스티앙이라는 사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셀린느는 술집에서 세바스티앙이 또 나타나길 (어쩌면 간절하게) 바라면서 생수를 들이키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에비앙' 생수이다. 그런데 세바스티앙이 '에비앙'이 담겨진 유리병의 반대 방향을 셀린느에게 보여주는데 '연약한'이라는 반대 뜻으로 올라와 있는 것이다. 연약하게 생수나 마시기 보다는 술이나 한잔 하자는 나름대로의 조크(?)이지만 절대 이것은 조크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 자매를 지옥으로 보내도록 만든(?) 당사자가 바로 세바스티앙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자신은 그녀들의 아버지(당시 선생님)를 사랑했노라 뒤늦게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그녀들(세 자매)의 어머니는 남편을 고소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들 세 자매는 다시 만나 어머니를 만나러 요양원으로 향한다. 사실을 다 털어놓은 세 자매... 그러나 말을 할 줄 모르는 그녀들의 어머니는 쪽지로 한 문장으로 이야기 할 뿐이다. '난 후회 안해...' 그리고 이 한마디를 남기며 카메라는 네 명의 여인이 앉은 탁자를 위에서 비추고 그 탁자의 모양은 점점 왜곡되어 보여진다. 한 요양원 노인이 가지고 놀던 요요경처럼 말이다.
지옥, 거짓말(혹은 왜곡)... 절대 듣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단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실에서 왜곡된 삶을 살고 있고 그런 우리들의 삶은 천국이라기 보다는 지옥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또다른 작품을 비유하는데 고대 그리스의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Medeia /B.C. 431 년)라는 작품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올라온 이 작품에 대한 내용을 발췌하자면-남편 이아손에게 버림받은 메데아의 비애와, 애정의 회복을 위한 허무한 노력이 남편에 대한 증오로 변하여, 남편(아르고선의 선장)에게 고통을 줄 목적으로 자신의 자식을 죽이고 남편의 새 아내가 될 글라우케와 그의 아버지인 코린트왕을 태워 죽이기에 이른 여자의 심리를 동정의 눈으로 묘사.)
이 이야기는 막내 안느가 교수들에게 면접을 보면서 언급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는 안 그런척 하고 살아가지만 우리 자신도 또다른 메데아의 자식들과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노력할려고 해도 내 짧은 지식으로는 이해가 안간다. 원작을 읽어보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아무튼...)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희생이란 단어는 참으로 고귀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때로는 당사자들에게는 아픔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들 세 자매처럼 말이다. 물론 이들을 지옥으로 쳐넣은 세바스티앙은 용서할 수 없지만 이런 그들을 방관한 그녀들의 어머니에게도 책임이 뒤따른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세 자매는 결국 자신들도 어른으로 성장하여 어머니와 똑같이 삶을 되물림 받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메디아처럼 말이다.
다니스 타노비치가 만든 '랑페르'는 그래서 마니아가 아니고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알고보면은) 철학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글을 쓰는 본인처럼 상영시간에 늦게 들어와서 영화에집중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2002년에 '단테 신곡 3부작' 중 하나인 '헤븐(천국)'이 만들어졌고 곧 마지막 테마인 '연옥'이 만들어질 것이다. 연옥은 바로 천국과 지옥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사실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힘든 일이고 김태희와 정우성이 등장할 영화 '중천'에서도 '연옥'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할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지옥같은 삶을 지옥이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다면 영원히 지옥에 머무를 것이고 이 삶이 지옥같더라도 평안을 얻는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계속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PS. 이 영화 굉장히 어렵다. 리뷰 쓰면서 이렇게 어려운 영화는 처음이다. 박학다식하신 분들 중에 본인에게 이 영화를 잘 설명해주실 수 있는 분이 나타난다면 언제나 대환영이다. (단, 정말 쉽게 설명해주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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