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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남방같은 그리움 열혈남아
jimmani 2006-11-02 오전 1:59:57 20634   [9]

나같은 젊은 사람들은 대개 강렬한 원색의 무늬가 있는 옷을 촌스럽다고 여긴다. 올가을 유행 트렌드가 검정 줄무늬라고 할 만큼, 갈수록 더 어둡거나 더 단조로운 색깔의 옷을 추구하는 면이 없지 않다. 나부터가 그렇다. 꽃무늬 남방, 땡땡이 셔츠 같은 확 눈에 띄는 색깔과 무늬가 있는 옷은 유행을 거스른다는 생각이 확 들어서 가급적이면 피하는 편이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드는 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갈수록 단조롭고 흐린 색깔의 옷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어쩌면 세태도 그 옷 색깔따라 흐리게 변해가는 건 아닌가 싶다는 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는 우리의 근원적 감정이라는 것이 그 무엇보다 한번 드러나면 눈에 확 띄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증오, 원망과 그리움같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 말이다. 특히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 이상, 누군가가 곁에 없다면 누구라도 곁에 있어주기를 무던히도 바라는 그리움의 감정은 누구나 품게 되는 법. 그건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처럼 좀처럼 가릴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이 영화 <열혈남아>가, 이렇게 어떻게든 선명하게 가슴에 흔적을 남기고 마는 '정에 대한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재문(설경구)은 소년원에서부터 같은 조직에서까지 늘 동고동락하던 친구 민재(류승용)를 잃고 만다. 민재를 죽인 이는 대식(윤제문)이라는 인물. 몸담고 있는 조직의 은근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늘 제멋대로인 재문은 독자적으로 복수를 계획하고, 조직에 갓 들어온 치국(조한선)과 함께 복수가 마무리될 대식의 고향 벌교로 향한다. 일주일 뒤 대식이 벌교 읍내 체육대회의 후원을 위해 내려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치국은 태권도에 소질이 있어 친구와 함께 도장까지 차릴 생각도 했으나 어머니의 병세때문에 조직 세계에 몸을 담게 되고, 이런 재문의 계획에 합류한다. 재문과 치국은 복수를 위해 내려간 벌교에서 대식의 어머니 점심(나문희)이 운영하는 국밥집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점심을 만난다. 처음엔 대식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점심의 행동을 감시하지만, 점심을 따라다니면서 대리 아들인 양 역할을 도맡아 해주면서 그는 어느덧 알듯 모를듯 점심에 대한 인간적인 정을 느낀다. 점심 역시 아들과 덩치도 비슷하고 똑같이 인상 험악한 조직 사람인 것이 마치 아들처럼 느껴져 재문에게 퉁명스러운 듯 살갑게 대한다. 그런 가운데 재문이 그토록 기다리던 대식이 벌교로 내려오고, 재문에겐 드디어 복수의 순간이 다가온다. 어머니가 있는 고향에서, 재문은 그 어머니의 아들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유독 눈부시게 다가오는 걸 꼽자면 단연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다. 한동안 다소 카리스마 있는 역할들로 진지하면서도 부담스럽게 다가왔던 설경구는 이번 영화에서 오랜만에 인간미가 배어나오는 역할로 돌아왔다. 그가 여기서 맡은 재문이라는 역할이 건달이면서도 만날 무게잡고 그림자 잔뜩 진 표정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참 '애같은' 건달인데 그런 점에서 설경구의 연기는 실로 완벽했다. 욕도 무슨 농담처럼 발랄하게 내뱉고 체면같은 거 생각도 안하고 아이들과 티격태격거리는 모습은 여전히 애같은 재문의 모습에서 코믹함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복수가 다가오면서부터 점차 마음을 다잡고 냉정해지려 하는 모습, 그리고 후반부 냉정한 복수심과 인간적 감정 사이에서 겪는 아픈 갈등을 제각기 다른 색깔로 표현하면서 재문을 정형화된 건달 캐릭터가 아닌 좀 더 인간적으로 다가가고 싶은 입체적 캐릭터로 승화시킨다. 이는 어깨에 힘을 뺀 능청스런 코믹연기와 살벌한 냉혈 캐릭터 연기, 가슴 속에서 응어리져 터져나오는 진한 눈물을 뽑아내는 지독한 감정 연기를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보여줄 줄 아는 설경구의 재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의 연기는 실로 맥가이버 칼같다. 다재다능하면서도 하나씩 파고들어도 부족할 것이란 없다.

대식의 어머니인 점심 역의 나문희 씨의 연기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그녀가 보여준 어머니의 모습은 작정하고 울리려고 마냥 모성애만 보여주는 어머니도 아닌, 그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괴팍하고 퉁명스러운 동네 아주머니의 모습이다. 처음 오는 손님에게도 툭툭 반말 꺼내고 면박주기 일쑤다. 그러나 그런 퉁명스런 표정과 무심한 듯한 말투에서 드문드문 배어져 나오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더 가슴을 아리게 한다. 어쩌면 긴 세월 멀리 떠난 자식들을 홀로 떠나 보낸 어머니로서는 그런 그리움마저도 아무렇지도 않을 일상이 되어서 그런 걸까. 나문희 씨는 그렇게 그리움을 일상으로 안고 사는 어머니의 모습을 너무나 인간적으로 와닿게 소화해냈다. 특히나 이렇게 시종일관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던 어머니의 모습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결정적으로 거대한 울림을 던지며 먹먹한 아픔과 감동을 이끌어낸다. 나문희 씨의 진심이 가득 실린 연기 덕에, 관객의 입장에서 더 부끄럽지 않은 감동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치국 역의 조한선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다. <늑대의 유혹>, <연리지>와 같은 시덥지 않은 영화들에 연이어 출연하며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번 영화를 기점으로 배우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줄 모양이다. 재문보다 과묵하고 우직하지만 신참인 덕에 아직 그 세계의 냉정함에 익숙해 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꽤나 잘 소화해냈다. 능숙한 사투리나 한결 자연스러워진 대사처리, 특히 여전히 자신의 미래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듯 뚱한 그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혹자는 꽃미남 배우가 언제 이렇게 망가졌냐면서 아쉬움의 시선을 보내지만, 그만큼 연기의 맛을 얻어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배우에게 중요한 건 첫째도 둘째도 연기력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언뜻 보면 조폭 느와르의 성격을 그대로 따라간다. 복수에 불타는 남자와 그 동료의 여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아이러니한 비극과 배신 등의 요소가 그렇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머니'라는 존재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그 뉘앙스가 확연히 달라진다. 냉혹한 복수와 배신이 난무하는 조직의 세계 안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세계 밖에 있는 보다 인간적인 애정, 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점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수 밖에 있는 '정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대되는 것이다.

재문은 이미 조직 세계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사람이다. 그는 역시나 흔히 조폭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처럼 이른바 '가오'를 중요시한다. 위에서 시키면 군말없이 하고, 꼬치꼬치 말대꾸하지 않으며, 자신의 심정을 최대한 무거운 분위기 속에 위장시키는 것, 동료와 조직을 위한 충성심과 복수심 앞에서 그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의지. 그러한 그쪽 세계의 '가오'의 중요성을 이제 갓 들어온 신입 치국에게도 지도편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제 막 이 세계에 입문한 치국은 이런 재문의 경직된 태도가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대식을 그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찔러야 한다는 것도 몹쓸 짓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재문이 존경스러운 구석이라곤 없이 자기 허세만 믿고는 설치는 모습을 보고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게만 다가올 뿐이다. 이렇게 아직 정에 익숙한 보통사람의 모습에 가까운 치국의 모습은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변해가면서, 그 세계에 맞는 냉정한 심리를 가진 인물로 변해가고 그렇게 변하는 모습에 가슴 아파 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예전부터 능글맞은 한편 냉정한 성격을 갖고 끄떡도 하지 않았던 재문은 점차 자신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적인 정에 대한 갈망이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성가시고 귀찮게만 느껴졌던 태권도 도장 아이들과 친구가 된 것처럼 흙장난을 하며 놀기도 하고, 아이처럼 다방 아가씨 오토바이 한번 타보자고 떼를 쓰기도 한다. 점심이 그를 대리 아들인 양 데리고 다니면서 옷도 입혀보고 직접 사주기도 하는데, 재문은 겉으로는 이를 귀찮게 여기기도 하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촌스럽다고 요즘 이걸 누가 입냐고 투정 부렸던, 점심이 사준 꽃남방도 나중엔 집안에 걸어놓고 입어보면서는 어딘가 모를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을 연신 흘리니 말이다. 복수가 예정되어 있는 시간이 점점 더 가까워질 수록, 재문이 그동안은 미처 몰랐던 따스한 정, 어머니의 정이 재문의 감성을 깨워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재문의 직업의 특성상, 어머니한테 가서 매달리고 애정을 과시하거나 하는 살가운 모습은 겉으로 보여주기에는 다소 민망할지도 모를, 군더더기같은 모습이라고 단정지어지기 쉽다. 그때문에 그는 최대한 인간적인 감정을 가리려고 애쓴다. '당신도 건달이기 전에 인간이지 않느냐'고 하소연하는 치국 앞에서 끄떡도 안하는 차가운 모습을 보인다. 영화 속에서 유독 선글라스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그거다. 그들은 직접적인 감정을 드러내며 인간으로서의 온기를 내보이기 전에, 최대한 냉혈동물처럼 차갑고 빈틈없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선글라스 너머로 진심이 담겼을 눈빛도 감춘 채 말이다. 마치 자신도 인간이라는 것을 숨겨야 한다는 듯이.

그러나 결국, 인간이 한자의 뜻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人間)'에 있어야 하는 이상, 자신의 마음을 더욱 뜨겁고 부드럽게 만들어가는 정에 대한 그리움은 선글라스로 숨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어머니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 자신을 사랑해주는 누군가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은 까만 옷으로 가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 대한 독한 그리움은 영화 속에서 점심이 재문에게 사주는 꽃남방의 모습이나 다를 게 없다. 결국은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결국은 가슴 한가운데에서 몸 속 곳곳으로 번져나가는 꽃무늬와 같이 말이다.

이렇게 영화는 조폭 느와르라는 한정된 세계를 다루는 장르에서, 단순히 이 세계 속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근원적 감정을 그리면서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사람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충분한 공감이 가게 형성한다. 이것은 조폭이라고 미화시키고 멋있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사랑과 정이 필요한 인간이라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기에 가능하다. 누구보다도 살벌하고 거칠게 느껴질 수 있는 그들이지만, 그래서 그 반대편에 숨기고 있을 어머니와 그외 나를 사랑해줄 존재에 대한 그리움은 더 강렬한 핏빛으로 끓어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열혈남아'인 것은, 남자들 사이의 의리나 우정같은 것에 피가 끓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세계에 맞춰 자기 마음도 차갑게 얼려야 하는 사람들을 녹여줄 어머니의 애정, 사람의 애정에 대한 그리움때문에 피가 쩔쩔 끓는 것을 의미하는 듯 싶다. 사람이 어머니의 따뜻한 품, 사랑하는 이의 포근한 손길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지사다.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차갑고 탁한 세계에 몸을 담고 있을 수록, 그런 원초적인 정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핏빛처럼 강렬해진다. 이처럼 이 영화 <열혈남아>는 가장 냉혹하고 무자비해져야 할 순간에, 자신이 그동안 가리고 있어서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의 정'을 가장 뜨겁게 깨닫는 한 남자의 가슴아픈 사연을 이야기한다. 꼭 내게 있어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그것이 결핍되어 있을 때 깨닫는 법이다. 너무나 서럽게도, 재문에겐 그런 만큼 사람의 정에 대한 그리움이 꽃남방처럼 더욱 강렬하게 가슴을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차갑게 다가올 수 있는 장르와 인물들에서, 가장 뜨겁고 원초적인 감정의 폭발을 이끌어내는 이 영화는 분명 묘한 감동의 체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 세상이 차가워질 수록 우리 가슴만은 더욱 뜨거워져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끼리 살 수 있는 것이다.


(총 0명 참여)
yulen23
보고싶다   
2006-11-15 12:45
lhm9723
꽃난방같은 그리움...재밌네요   
2006-11-13 18:22
callanna
재밌어요~연기를 너무 잘했어요   
2006-11-10 10:12
1


열혈남아(2006, Cruel Winter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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