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지난 작품들을 통해 관객들의 기대와 살짜쿵 엇나가줄 줄 아는 장기를 탁월하게 발휘해왔다. 사라진 개를 둘러싸고 벌이는 한바탕 소동극인 줄로만 알았던 <플란다스의 개>에는 예상외로 점점 무뎌지고 무기력해지는 현대사회 인간들의 초라한 자화상이 꽤 와닿게 그려져 있었고, 두 형사가 벌이는 살벌한 범죄수사물일 줄로만 알았던 <살인의 추억>은 예상외로 번뜩이는 유머와 함께 사건의 진행에 따라 음습하고 황폐해져만 가는 세상의 모습이 절실하게 그려져 있었다. 두 작품 모두 보기 전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준 것이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영화 <괴물>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봉준호 감독이 괴수영화를 만든다고 하길래, 뭔가 다를거야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한강이 배경이고, 그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가족이 주인공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가족의 사투를 통해 끈끈한 가족애를 그릴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기존의 괴수영화에다 가족드라마의 특성 또한 살린 영화가 될 것이라는 짐작도 은연중 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런 꽤 넓은 반경의 기대치를 또 한번 벗어난다. <킹콩>이라는 예외도 있었지만, 내 차마 괴수영화를 보고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줄은 미처 몰랐다.
평화로운 한강변. 그곳에는 한강을 거의 삶의 터전으로 잡고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 박강두(송강호)는 아버지 박희봉(변희봉)이 운영하는 매점을 맡을 때마다 졸거나 날림운영을 하기 일쑤라 핀잔만 듣지만, 딸 현서(고아성)만 왔다하면 언제 그랬냐는듯 딸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어리숙하지만 부성애 강한 가장이다. 현서 삼촌 박남일(박해일)은 4년제 대학을 나왔음에도 직장없이 술과 욕만 입에 달고 사는 철부지이고, 현서 고모 박남주(배두나)는 수원시청 소속의 양궁선수로 전국체전에까지 나갈 만큼 꽤 좋은 실력을 지닌 선수이다. 모처럼 중요한 행사인 남주의 전국체전 준결승 경기가 한창 진행되던 중, 한강으로부터 거대한 괴생물체가 뛰쳐나온다. 순식간에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 괴생물체는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날려버리고, 쓸어버리고, 던져버리면서 평화롭던 한강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강두 역시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냅다 뛰지만, 그만 현서의 손을 놓치고 만 강두는 눈앞에서 현서가 괴물에게 잡혀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심정으로 합동분향소에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마냥 정신만 놓고 있던 가족들. 그러나 어딘가 현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들은 특수부대원들의 삼엄한 경호를 뚫고 철저히 폐쇄되어 있는 한강 한가운데에 들어가 현서를 찾기 시작한다.
일단 이 영화가 국내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본격 "괴수영화"이니만큼 많은 분들이 제목에까지 떡하니 자리잡은 괴물이란 놈의 생김새에 관해 궁금해 하실 것이다. 일단 주의 드린다면, 고질라처럼 전신을 다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 만큼 크고 그 덩치로 온 도시를 쓸어버리는 괴물은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다. 봉준호 감독의 얘기처럼, 이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은 얼토당토않게 대뜸 사이즈부터 커서 마치 이 세상을 미니어처처럼 보이게 만들어버리는 비현실적인 괴물이 아니라, 진짜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모양새의 괴물이다. 컨테이너 한 칸에 쏙 들어갈 만큼의 크기를 지니고 있다. 대신에 다른 면에서 이 괴물은 기대한 만큼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다층적인 잎 구조를 가진 꽃봉오리처럼 어떻게 쉽게 그릴 수 없는 모양새의 주둥이하며, 어디선가 본 듯하면서도 전혀 본 적 없는 듯 독창적인 몸뚱이, 거기에 아크로바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눈깜짝할 사이에 벌이는 유연하고 날렵한 몸짓은 괴물의 카리스마는 덩치가 결코 다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더구나 촬영 또한 이러한 날렵하고 자유자재인 괴물의 움직임을 능숙하게 살려 여느 헐리웃의 고난도 촬영기술 못지 않은 유연한 카메라워크로 때론 정적인 분위기로, 때론 역동적인 분위기로 보는 이의 가슴을 잔뜩 졸인다. 오퍼너지와 웨타 워크샵이 손을 댄 괴물의 그래픽적인 면 또한 실제 한강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감독의 의도대로 정말 실제 있을 것만 같은 괴물의 모습에 근접하지 않았나 싶다.
괴물이 덩치의 거품을 줄이고 거기에 맞게 내실을 다진 만큼, 그 남은 자리에는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가 가득 메우고 있다. 일단 단연 압권인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단연 가장 박강두 역의 송강호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에서도 "리얼리즘 연기란 이런 것이다"라고 확실히 증명해준 송강호는 이번 영화 <괴물>에서도 사실적인 면모로 가득찬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가 탁월하게 연기할 줄 아는 캐릭터들의 특성에 걸맞게 이 영화 속 박강두 또한 표면적으로 보면 희극적인 캐릭터다. 똑부러지지 못하고 어리버리하며 철도 덜 든 듯한 어른의 모습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허허실실 그저 우습게만 보이는 사람이기에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로서 전전긍긍하고 절실하게 매달리는 모습은 오히려 더 가슴에 확 와닿고 쓰리게 다가온다. 이런 박강두의 모습은 송강호의 딱 현실 그대로인 듯한 연기에 힘입어 더 깊숙이 감성에 호소하지 않았나 싶다. 빤히 영화적으로 오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절제하지도 않고, 당장에 다가오는 감정 앞에서 그저 힘없이 주저앉아버리는 보통 인간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 것이다. 정말 그의 연기는 눈앞에서 딸이 사라지는 광경 앞에서 너무나 급작스럽게 밀려온 슬픔 앞에 눈물은 커녕 엉엉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이다. "괴수영화", "블럭버스터"라는 호칭이 붙는 영화에서 이만한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헐리웃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축복이 아닌가 싶다.
당연히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젊은 시절 자식들 놔두고 나다닌 것에 대한 반성으로 끊임없이 자식들을 챙기고 다독여주는 박희봉 역의 변희봉 씨의 연기는 이전에 보여줬던 때론 살벌하고(<플란다스의 개>), 때론 주책스러운(<살인의 추억>) 모습과 차별화되면서도 확 괴리감이 생기지 않게 자연스레 연결되는 그만의 뚜렷한 개성이 살아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술과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삼촌 박남일 역을 연기한 박해일은 허구헌날 반항만 하고 불만만 많아서 가족 구성원의 부재라는 현실 앞에서도 차마 물러서지 못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못된 것같으면서도 못되지 않은 철부지 삼촌의 모습을 멋지게 보여주면서 또 한번의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을 했다. 양궁선수이자 현서 고모인 박남주 역의 배두나는 이번 영화에서는 양궁선수라는 예리함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 걸맞게 매사에 냉철한 판단을 하고 나름의 전략도 구사할 줄 아는 절제된 성격의 소유자를 훌륭하게 연기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머리는 차가운만큼 가슴은 뜨거운 인간애 강한, 그래서 현서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도 충실히 해내는 여인으로서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결정적으로 가족들로 하여금 현서를 찾게 부추기는 대사도 남주의 "현서 굶은지 몇일 됐지?" 아니었던가)
아, 잊어버릴 뻔한 배우가 있다. 바로 사건의 중심에 선 현서 역의 고아성이다. 봉준호 감독의 말대로, 이 영화에서 이 배우가 보여준 연기는 단순히 "아역배우"라는 틀에 고정시키기에는 너무나 그 흔적이 또렷하다. 보통 재난영화에 나오는, 위기에 처하면 무작정 소리지르고 울기부터 시작하는 아이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현서의 모습은 사리판단에 일단은 우선순위를 두고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었고, 고아성은 이런 현서의 모습을 특유의 또렷한 인상과 강인한 표정을 통해 멋지게 소화해냈다. 거기다 괴물을 바로 눈앞에 두고 여러번의 거친 액션신까지 소화한 걸 생각하면, 확실히 이 배우는 크레딧에서 앞서 언급한 배우들과 나란히, "아역"이라는 별도의 분류 없이 나란히 설 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살인의 추억>이 살벌한 제목과는 달리 꽤 웃긴 구석이 많았던 만큼, 이 영화 역시나 봉준호 감독 특유의 "웃기려고 작정하지 않았는데 웃기는" 유머감각이 가득 살아있다. 아니나다를까, 객관적으로 보면 통곡할 만한 상황에서도 유머감각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온다. 실종된 현서가 죽은 것으로 처리된 합동분향소에서 일가족들이 통곡을 하며 주저앉고 바닥에 드러눕는 장면이, 웃긴다.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화면으로 봐야만 알 수 있는 감독 특유의 불균형적인 듯한 뉘앙스가 희한하게 느껴져 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힘들고 지쳐 처량하게 졸고 있는 강두더러 "얘가 처음부터 이렇게 한심빠따는 아니었다"면서 애처롭게 그의 과거를 설명하는 희봉의 모습도 안쓰러워야 되는데 계속 웃긴다. 애절하게 경찰 앞에서 강두를 비롯한 일가족이 현서가 살아있음을 호소하는 부분도 분명 진지하게 봐야 될 것 같은데도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오고, 강두가 정신감정을 받는 부분 또한 분노해 마땅할 부분임에도 어리버리하면서도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나가는 강두의 모습때문에 마냥 웃음이 터져나온다. 진지하게 고문하는 모습마저 웃기고, 강압적인 수사를 펼치는 형사와 여기에 그저 당하고만 앉아 있는 용의자의 모습이 포복절도를 유발했던 <살인의 추억>처럼, 이번 영화 <괴물>에서도 봉준호 감독 특유의 언밸런스 유머감각은 여전히 번뜩이고 있었다. 다만, 웃찾사나 개그콘서트처럼 즉각적으로 눈치가 채이는 유머를 선호하는 분이라면 마뜩찮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런 언밸런스 유머 또한 결국 이런 유머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비극성을 더 뚜렷하게 펼쳐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운수 좋은 날>의 비극적 결말이 더 안타깝게 와닿았던 건 제목이 오히려 운수좋다고 대뜸 딴소리를 하기에 더 그렇지 않았던가.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사람을 웃기면서도 결국은 가슴이 무너지게 만든다. 그건 당황스럽다 못해 그 당황스러움으로 인해 헛웃음까지 나오게 만드는 희한한 현실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영화는 괴물이 대략 이런 원인때문에 생겼을 것이라면서 미군이 불법으로 한강에 치명적인 독극물인 포름알데히드를 버리는 광경을 내보낸다. 결국 괴물 또한 자기 혼자 저절로 생긴 돌연변이가 아니라, 비열하고 치사한 인간군상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이런 괴물이 한강변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현실 앞에서, 정부와 언론은 참 사람을 약올린다. 그들은 이 한강변을 위험지대로 못박아놓음으로써 시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주려는 거라고 잔뜩 내색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민들을 놀리고 있다. 이렇게 조롱과 불합리로 가득한 현실 한가운데에 어쩌다보니 그저 죄인이 되어버린 강두네 가족이 서 있다.
사고 직후 강두네 가족이 가진 건 사회에 대한 혐오감도 아니었고, 정부에 대한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잃어버린 딸을 찾고픈, 가족으로서 당연히 느낄 만한 절실한 열망이었다. 그런데 정부 및 주변 사람들은 이들이 이렇게 절실한 열망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오히려 죄로 뒤집어씌우려는 건지, 이들을 마치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미친 개마냥 날뛰는 위험인물들로 단정지어버렸다. 그들이 하는 말은 말도 아니고, 내놓는 증거는 증거도 아닌 것처럼 군다. 괴물의 출현으로 인해 등장한 "바이러스"라는 존재는 이런 기도 안차는 현실을 뚜렷이 대변하고 있다. 그저 한가롭게 일상을 꾸려가다가 뜻밖의 재앙을 만난 피해자들을 위로도 하기 전에 정부는 이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대뜸 치료와 소독이 필요한 이들로 만들어버린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로서 인간적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이들은 이미 병균처럼 취급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강두네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부당한 검사와 말도 안되는 분석 앞에서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우리 현서는 살아 있다고 발버둥을 쳐봐도 사건을 책임지는 이들에게 이런 모습은 그저 미친 개가 복날에 날뛰는 것과 다름없게 보일 뿐이다. 바이러스라는 존재를 통해 시민들에게 극도의 경계심을 심어주고, 국내의 대책으로는 모자란다면서 미국의 인력까지 동원하는 정부와 언론의 모습 앞에서, 그저 가족을 되찾고 싶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열망만을 지닌 가족들은 유난히 반항적이고 말안듣고 비정상적인 환자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말을 해도 말로 듣지 않는 현실 앞에서 결국 개개인은 이런 꼴을 보이는 사회를 외면하며 살아가게 된다. 남의 말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자기들끼리 정보 준답시고 떠들어대는 뉴스가 "재미없다"고 꺼버리듯, 말을 해도 아무 소용없는 현실을 마주해봤자 뭐하냐는 듯 그만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개개인을 향한 사회의 폭력은 사회에 대한 개개인의 무관심을 유발하고, 이런 무관심이 또 결국은 사회가 안좋게 보는 요소가 되어버리는 치명적인 악순환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 영화가 정말 멋진 이유는 괴수영화의 모양새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현대사회의 절대 무시해선 안되는 집단적 폭력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국민들을 겁주고, 질서를 바로잡기에 바쁜 사회는 거기에 쉽게 따르지 않고 조금이라도 엇나간다 싶으면 헛짓거리한다고 간주하고 환자 취급, 범죄자 취급부터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정부의 결정에 그대로 따른 국민들을 어리석고 바보같은 이들로 분류해놓고는 이들을 너무도 우습게 본다. 강두네 가족처럼. 아직 살아있는, 살아있다고 믿고 싶은 딸을 찾으러 간다는 게 그렇게 사람 벌레 쳐다보듯 볼 만큼 몹쓸 죄이고 그렇게도 멍청한 짓인가. 필사적으로 총대를 매고 딸과 딸을 잡아간 괴물을 찾으러 가는 게 그리도 희한하고 못봐줄 광경인가. 이건 무슨 대의적인 평화나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 지켜왔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싸우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행복을 끝까지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뭐 거창하게 아는 것이 없기에,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단지 잃어버린 가족을 위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처절하게 현실과 싸우는 것이다. 그런 인간으로서 당연한 원초적 열망을 안고 필사적으로 현서를 찾아나서기에,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강두네 가족을 응원할 수 밖에 없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영화 속 몹쓸 괴생물체는 정말,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괴물이 나타난 이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간적인 관계, 정은 제껴두고 소박한 삶을 꾸려가던 서민들은 거대한 사회의 횡포에 그저 쓸려다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몹쓸놈 취급받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인간으로서의 뜨거운 열망은 포기하게 만들고, 그저 정부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저분한 폐기물이 되는 서슬퍼런 장난감 병정으로서의 모습만 남겨버렸다. 이건 헐리웃 괴수영화들이 보여줬던 면모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헐리웃 영화들은 사람들이 뭉개지고 날아가고 죽는 광경을 강조하면서 그만큼 볼거리의 스펙터클, 괴수의 위력을 더 강화하는 데 치중했겠지만, 토종 괴수영화인 <괴물>은 그렇지 않다.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깔아뭉개지고,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은 정말 보기에 처참하고 비극적이다. 단순히 괴수에 의해 희생되는 인간들만 나오는 게 아니라, 소시민이라고 그들이 하는 말은 귓전에 담지도 않은채 그저 씹어버리는 거대사회에 비참하게 짓밟히는 개개인들의 모습이 만만치 않게 비중을 차지하며 울림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런 몹쓸 현실을 마냥 우울하게만 끌고가지 않고 웃음과 함께 나란히 끌고 가고 있고, 덕분에 현실의 비극성은 상대적으로 더 강조된다. 당장 머리에 바늘을 박아넣으려는 연구원들 앞에서 히히 웃으며 반항을 하다가 딸을 향해 "미안해..."하면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두를 보면서도 우리는 그의 착잡한 심정에 어느덧 동화되어 웃으면서도 동시에 가슴은 한층 더 미어지는 것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이래서 훌륭하다. 괴수영화의 모양새를 하고, 거기에 걸맞는 오락영화로서의 박진감과 스릴을 효과적으로 살리면서도, 그 가운데에 살아숨쉬는 "인간"의 모습을 결코 무시하지, 아니 무시하기는커녕 괴물과 대등하게 그 비중을 살려놓았다. 멀쩡히 살아숨쉬고 있는데도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횡포로 개개인의 감성과 판단력을 깔아뭉개는 사회의 모습과, 그 가운데에서 처절하게 발버둥치는 소시민들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멋지게 구현해 냈다. 이건 괴물의 날렵하고 민첩한 움직임 못지 않게 펄떡펄떡 신선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괴물과 가족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보면서 심장 벌렁벌렁 뛰며 긴장하다가도, 그들이 맞닥뜨리는 너무도 폭력적인 현실 앞에서는 절로 가슴이 찢어진다. 이 괴물은 63빌딩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점점 절절하게 차오르는 관객의 억장을 거침없이 무너뜨린다.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진국으로 우려내는 괴수영화라니. 이 영화, 업고 전국일주라도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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