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라는 흑백논리적인 물음에 중도적 회피를 꾀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 본인도 마찬가지인데 신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지만 그다지 강한 믿음을 부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흔히 믿음이 결여된 유신론을 선택한다.
신은 있는가? 악마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에 매달려야 하는가? 이러한 정신적 세계에 대한 깊은 고찰은 이성적인 사고아래에서는 불가치하게 느껴지며 지극히 비현실적이지만 한번쯤 생각해보면 신비로우면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경외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일. 인간의 이성은 항상 증거를 요구한다. 과학적이고 실제적인 데이터앞에서 수긍하는 법에 길들여진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을 돕는 증거앞에서 주로 고개를 끄덕인다. 물질중심주의가 대세인 시대적 세태는 우리의 두뇌로 침범해들어갔고 우리의 판단력마저 장악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우리는 신비주의와 판타지의 세계로 눈길을 돌리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에 심취하고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을 쏟는 것이다. 현실에 충실하다고 믿으면서도 운명을 엿보는 그것은 우리의 고상한 이성으로 살짝 가리려했던 천박한 호기심을 지닌 본성이 고개를 들이미는 것이리라.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부정하진 않았으나 실제로 겪어보지 못했음에 주목하지 않았던 사실이 실재했음이라는 확실한 승인도장을 찍어버리니 그저 막연했던 호기심은 믿음에 대한 압박으로 밀려오는 충격으로 돌변한다. 또한 강하게 부정하며 무시했던 이들에게는 더없는 불쾌함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일단 이 영화는 호러의 탈을 쓰고 있지만 법정 스릴러의 진득함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진지하다. 단순히 시각에서 출발해서 심리까지 도달하는 공포감을 고취시키는 것이상의 긴장감이 이 영화에서 감돈다.
그것은 위기감이다. 그다지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확인이랄까. 그냥 막연하게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대수롭지 않았던 것이 현실의 선안으로 밀려들어옴으로써 믿음에 대한 압박으로 변모하는 위기감이 이 영화의 공포와 맞닿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법정 공방은 상당히 디테일하면서도 영화가 지니는 이야기를 흐리지 않고 오히려 응집시킨다. 관객들은 에밀리 로즈의 빙의와 엑소시즘의 광경을 통해 시각적인 충격을 느끼지만 비현실적인 신념의 물음에 대한 법정공방속의 신념과 이성간의 갈등으로 도출되는 자신의 비웃음을 되짚어보게 된다. 관객은 영화의 허구성과 현실적인 사실성 사이를 가로지르며 영화로부터 느껴지는 공포가 단지 판타지로써 멈춤이 아닌 현실에서 적용되는 리얼한 사실적 공포로 접근하는 떨림을 느낀다.
신의 존재가 막연한만큼 악마의 존재 또한 막연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확실히 그 희뿌연 존재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들이밀고 있고 그러한 믿음에 대한 의심은 그만큼의 두려움으로 밀려오는 것만 같다.
어쨌든 이 영화는 우리가 믿고자 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실화라는 뚜렷한 근거를 들이밀면서 관객들을 위협하고 있다. 감각을 자극하는 날것의 공포와 더불어 지적인 반박과 논조로 의심과 외면에 대한 경계적 태도를 자극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관객의 사고안에 관객스스로 위기심을 격양시키게 유도한다.
이 영화를 보면 당장 교회라도 가서 기도해야 될 것 같다. 그러나 신은 견딜 수 있는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했다. 믿음이 없는 이에게 그만큼의 시련도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믿음이 없는 이는 악마에게 쉽게 점령당하기 때문에 시련을 줄 자격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 에밀리 로즈의 고통이 성령의 발현에 대한 의지로 표명했고 이는 영화가 보여주는 신비주의와 더불어 본질적인 공포심과도 결탁한다. 에밀리 로즈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악마에게 굴복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녀는 성스러운 죽음에 안착했다고 이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로 공표된 믿을 수 없는 신성한 판타지는 반신반의했던 가설이 현실화되었음 자체만으로 무시할 수 없는 섬뜩한 공포로 돌변한다.
믿느냐 안 믿느냐의 종용이 아니다. 이것은 믿어야만 한다라는 극심한 압력이 아닌 얼마나 믿고 있는가, 즉 신념의 본질적 순도에 대한 물음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크리스챤에게 반가운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허나 이 영화는 종교에 귀의를 강요하는 영화가 아니므로 종교적인 해석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에밀리 로즈의 숭고한 인생도 사탄의 존재에 대한 증인적 시선도 아니다. 이건 말 그대로 믿음과 신뢰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다. 이 영화를 보고 악마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에 떨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믿지 않았던 또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상의 진지함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믿음 그 자체의 숭고함에 대한 접근이 이 영화가 지니는 두려움의 목적이다.
영적 세계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진행되어왔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속시원하게 알 수 없고 어쩌면 알아서도 안 될 미궁의 과제는 막연하면서도 요원하다. 악마의 존재를 믿을 것인가가 아닌 인간의 신념을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이 영화의 밑바닥에 깔려있다.
사실 엑소시즘이라는 소재는 '엑소시스트'를 통해서 너무나도 익숙하지만-특히 양팔과 두 다리로 배를 상위로 들어올린채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에서 이런 소재의 영화로부터 볼 수 있는 공포는 다봤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과잉보다는 자제를 선택했다. 지나치게 과도한 상황연출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멈춤으로써 현실적인 설득력에 일조하는 것을 택했고 이는 영화의 진지한 화법에 맞물리며 기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영화의 장르적 공포는 새로울 것이 없으나 장르의 변형적인 형태에서 기인하는 진지함은 육감적인 공포위에 날을 세웠다. 지속되는 긴장감 속에서 은밀하게 다가오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에 대한 불안한 심리적 압박. 이것이 이 영화의 공포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인이자 이 영화를 다른 공포물과 차별하게 하는 가치이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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