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형사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신 분들에게는 上 편의 글이 사실상 제 이야기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下 편은 형사라는 영화에서 재미를 발견한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앞서 말했듯, 이명세 감독은 사건의 인과, 대사, 배우들의 연기라는 기본적 네러티브를 무너뜨려, 반복과 대조라는 그가 만든 새로운 네러티브를 관객에게 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그의 시도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우선, 감독이 어떻게 네러티브를 무너뜨렸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첫째, 시간의 흐름입니다. 가짜돈, 사랑, 병판과의 관계라는 세가지 이야기 속에서 겹쳐지는 사건들은 시간의 전후를 무시한채 배열되어 있습니다. 또한, 단순한 엇갈린 배치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고, 관객은 그것의 시간순서가 무질서하다는걸 인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슬픈눈과 남순이 만나는 동시간에 벌어지는 사건으로 빗나가기만 할듯한 스토리에 일정한 흐름을 잡아주는 역활을 하게 합니다.
둘째, 들리지 않는 대사입니다. 영화속에서는 들리는 대사와 들리지 않는 대사가 있습니다. 대사를 통해 사건의 전개를 이해할수 있는 부분은 감독은 들리지 않게 표현하고, 함축적 의미와 중의적 표현을 가진 부분은 들리는 대사를 씀으로써,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죠.
셋째, 숨겨놓은 장면입니다. 감독은 스토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 장면들을 극단적인 짧은 컷 속에 희미하게 혹은 화면의 외곽에 배치하거나, 미묘한 표정의 변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두동강난 금불상이라던가, 두번째 대결에서의 슬픈눈의 웃음 짓는 표정, 주점에서의 남순의 웃음이 상상이었다는것, 등등.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반복과 대조를 통한 새로운 네러티브였지만, 관객은 오히려 숨겨놓은 기존의 네러티브의 틀 속에서만 스토리를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낳게 되었죠.
# 감독이 만들어낸 혼란에 대해 예를 들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죠.
1. "쉿" 누군가의 존재를 알아챈 남순
2. 슬픈눈과 병판의 대화
3. 주점에서 만난 슬픈눈과 남순
영화속에서는 1,2,3 의 순서로 진행이 되지만, 실제 일어난 사건의 순서는 2, 1, 3 이 됩니다. 그래서 슬픈눈의 존재를 알아채는 1 번 장면은 붕떠버리게 되고 관객은 슬픈눈이 어떻게 장부가 필요하다는걸 알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워 하죠.
그저 잘못된 편집으로만 여겨질수도 있는 부분을 감독은 2 번 장면후에 1번과 연속되는 시간적 흐름을 보여주는 집을 나서는 안포교와 남순의 장면을 넣어서, 시간적 흐름을 바로 잡을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 대결을 두고도 남순이 따라 죽은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감독이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간적 순서의 역행의 틀에서 이해하게 되면 매우 간단한 문제죠.
2 번 장면의 들려있는 검이 단서입니다. 1 번은 검을 놓아버리며 맞잡은 손을 놓는 장면이고, 2 번은 검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장면의 연속이기에, 시간적 순서에 따라 2, 1 의 순서로 배열하면 되는 겁니다.
# 행동 속의 대사
저는 슬픈눈이 홍등가를 거닐던 장면을 그가 남순의 채취를 느끼기 위해서 였다고 말했었습니다. 애매모호한 행동 속에서 왜 저는 이런 해석을 내린걸까요?
또, 배우들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면 그 어떤 영화나 장면에서도 의미가 담긴 행동이 될수 있습니다. 어쩌면 의미없는 행동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려고한 것은 아닐까요?
모두 보았지만, 생각없이 스쳐지나갔을 장면입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슬픈눈과 같은 것을 보고 있죠. 또한 그들이 등을 바라보고 있을 때의 상황도 서로 비슷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애써 거부하고 있는 남순에 대한 짝사랑과도 같은 상황에서 등을 바라본 슬픈눈.
슬픈눈의 죽음후 뒤늦게 사랑을 표현하고자 하는 남순.
한 부분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장면들. 하지만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들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맡이하며 내 뱉던 숨결 속에 담긴 것은 아쉬움이었을까요? 허망함이었을까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앞서 제가 써왔던 스토리에 대한 설명 역시 어디까지나 저의 느낌이었을 뿐, 그곳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감독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그들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네러티브의 틀속에서는 느낄수 없는, 형사의 정해진 스토리 속 열린 이야기입니다.
대조라는 틀을 통해 한쪽의 행동의 의미를 알면 다른쪽의 숨겨진 의미까지 알수 있게 됩니다.
병판이 슬픈눈에게 검을 내밀며 믿음을 확인하려 했던 이 장면. 칼에 비친 슬픈눈의 눈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눈이 서로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있듯, 슬픈눈 역시 병판의 눈을 통해 그의 말이 진실인지를 확인하려 하는거죠.
인물간의 대조되는 행동으로 같은 느낌을 표현했다면, 동일 인물의 반복되는 행동 속에서는 감정의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영화 속에서 남순은 붉은색으로, 슬픈눈은 검은색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드러내놓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슬픈눈이 병판의 연회에서 남순을 드리우고 있던 검은색 옷자락은 그들이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 붉게 물들게 됩니다.
# 사물 속의 대사
남순의 곁에 보이는 꽃은 단순히 한 장면만으로는 의미가 될수 없지만, 그녀의 변화와 더불어 반복되며 보여줌으로써, 여성적 존재를 밝혀주는 상징이 됩니다.
슬픈눈의 죽음에서 보여지는 붉은색 이미지처럼 색을 통해 의미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병판이 입고 있던 두루마기는 생일날에 안정의 녹색, 검을 내밀며 믿음을 확인하려 할때 불안감의 빨강, 그리고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처음으로 돌아간 슬픈눈과 병판의 관계처럼 순수함의 흰색이죠.
등장인물이 있는 공간 역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순과 슬픈눈을 나누는 빛과 어둠이라는 두개의 공간, 장터라는 개방된 공간, 속내를 드러내는 술상. 새로이 태어남을 상징하는 병판의 생일.
이곳에선 제대로 다루진 못했지만, 영화 안에서 두 사람의 존재를 보여주는 상징물은 대단히 많습니다. 대조적인 존재를 상징하며 보여주는 빛과 어둠, 노란색과 검정, 달과 별,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남순의 꽃, 등불, 빨강. 슬픈눈의 그림자와 방패연.
특히 슬픈눈의 그림자를 눈여겨 보십시오. 무의미해 보이는 장면속에서 의미의 흐름을 찾아내게 되실겁니다..
# 대사 속의 또 다른 대사
처음에 언급했듯, 직접적으로 사건의 전개를 설명하는 것은 들리지 않는 대사로 처리하고, 상징적이고 함축적 의미의 대사는 들리는 대사로 보여줍니다. 이 속에서 대조와 반복의 형태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행동으로 만들어진 대사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 슬픈눈은 그의 존재처럼 들리지 않는 대사였지만, 사랑을 느끼면서 점차 그의 목소리는 뚜렷해지죠. 그리고 마지막 대사는 누구의 목소리보다 더 명확해 집니다. 그 대사가 무엇인지는 잠시후에 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동일 인물의 대사의 반복을 통한, 의미의 변화는 행동을 통한 대사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 나쁜 놈아" X2
"나 좌포청 남순" X2
"진작에 알아 봤지. 진작에" X2
"날 못 믿겠다면, 지금 날 베어도 좋아" X2
이러한 대사들은 동일한 인물들을 통해 반복되지만, 상황의 변화 속에서 일정한 의미의 변화를 가져 옵니다. 이를테면, "좌포청 남순"이라는 대사는 처음에는 별의미 없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의미지만, 2 번째 대결에서의 "좌포청 남순"은 그녀의 사랑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괴로움의 표현이 되죠.
이처럼, 처음에는 대사 그대로의 원관념적인 의미이지만, 반복되면서 주변의 상황과 관련되어 의미가 변하는 흐름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대장장이가 말하던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엔 진짜로 진짜라니께." X2
여인네와의 정분을 나눈 이야기를 마치고 하던 대사에는 자신의 거짓을 속이기 위함이지만, 마지막 장터에서 하는 이야기에는 진실이 깃들어 있는 거죠.
(다만, 대장장이의 세가지 이야기 속에서 몽환적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보여주듯, 마지막 이야기가 그의 허풍이었는지 진실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가짜돈에 얽힌 이야기 속에서 남순과 슬픈눈의 사랑 이야기만은 진실이었다는 거죠.)
"남순아, 죽어버렸다."
영화속 대사는 감독이 만들어낸 혼란을 질서로 바꿔줄수 있는 해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감독이 만들어 놓은 혼란 속에서만 답을 찾으려 하다보니, 슬픈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혼란스러워 했죠.
또한, 모호하게만 비춰질수 있는 행동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제가 앞서 써놓았던 글 속에서 이러한 부분들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린 영상처럼 행동에 대한 해답은 영화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 음악으로 쓰여진 대사
엔딩롤에 흐르던 남순과 슬픈눈의 노래.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 음악은 그림자와 love song 이라는 각각의 멜로디를 가진 두개의 노래를 하나의 노래로 합쳐 놓은 것이죠. 첫 대결과 홍등가에서 빠른 비트와 느린 멜로디의 두가지 음악을 섞으며 감정을 표현했듯, 감독이 만들어 놓은 반복의 네러티브 속에서 음악은 대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감정처럼 마지막 대결에서야 음악은 하나가 된 것이죠.
이 부분을 얼마나 이해하셨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대사없이 음악과 소리만이 실려있는 형사 dvd를 보시면 될 겁니다. 특히 첫번째 대결후 홍등가에서 기녀의 창이 생경하게만 들렸다면, 아직 머리로는 이해하셨을지 모르지만, 가슴으로는 보지 못한 것입니다.
노래가 대사이듯, 이 노래의 가사는 두 사람의 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랑을 이루지 못한 현생에서의 슬픈눈의 대사는 그의 존재처럼 들리지 않는 대사이지만, 이제는 반대로 남순의 대사는 희미해지고 슬픈눈의 대사는 뚜렷해집니다. 하지만 노래가 끝나가면서 남순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면서, 어긋나있던 두 사람의 목소리는 사랑해 라는 말로 하나가 됩니다.
슬픈눈의 왼쪽 눈물과 상대의 숨결을 느끼고자 내민 왼쪽 손, 남순의 오른쪽 눈물과 내민 오른쪽 손.................. 서로를 떠나 보내며 놓아 버린 손은 뒤바뀌어 있던 것처럼, 둘은 하나가 되어 사랑을 완성시킨 것이죠.
i love so much, 사랑해 남순의 이 두 대사만은 뚜렷히 들려주며 그녀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해줍니다. 그리고 대사 속에 그들이 느꼈던 사랑의 모습을 모두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자 and love song
(blue moon 눈물의 달 숨지 말아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그대의 속삭임
(어둠 속의 빛 느낄 수 있게 다가와 줘) 무슨 말을 해야 할런지 알수 없는 나인데
(no tears 슬픈 바람 나를 안아줘) 화를 내는 모습까지도 담아 둘 수만 있다면
(아픔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 이제는) 사랑하고 싶어 이젠 널 가질 수만 있다면
i love so much 말하지 못해 i love so much 가슴이 터져 i love so much 내 맘 가득한 사랑
i love so much 그리움에서 i love so much 현실이 된 널 i love so much 떠나 보내기 싫어
내 눈 속에 기쁨이 내려 항상 니 곁에 있고 싶어
사랑해
(no tears 슬픈 바람 나를 안아줘) 뒤를 돌아 한번 나를 봐 항상 너의 곁에 있어
(아픔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 이제는) 사랑하는 거야 이젠 모든 아픔 다 버리고
i love so much 이제 나를 봐 i love so much 살아있는 i love so much 가슴 가득한 사랑
i love so much 그리움에서 i love so much 현실이 된 널 i love so much 떠나 보내기 싫어
내 눈 속에 기쁨이 내려 사랑해 항상 니 곁에 있고 싶어
사랑해
# 또 하나의 혼란
앞서 말했듯, 남순과 슬픈눈이 만나는 장면은 무질서한 이야기의 흐름을 중간에 잡아주는 역활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대결에서는 같은 공간 속에서 시간을 뒤섞어 버리며 이러한 흐름을 깨버립니다.
또, 여지껏 반복적인 대사들을 들리는 대사로 표현한데 반해, 대장장이의 두번째 이야기가 끝날때 말하던 "진짜로 진짜라니께"라는 반복되는 대사는 들리지 않는 대사입니다.
남순과 슬픈눈이 꼭 하고 싶던말..... 그것은 두 사람의 노래로 답해줍니다. 하지만 세번째 대결에서는 멜로디만 흐르고 정작 그에 대한 답은 엔딩롤에서 보여주죠.
감독은 단순하게 흐를 수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한번 뒤틀면서 결말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무질서한 혼란이 아니라 결말을 해석할 수 있는 부분에 이러한 세가지 규칙적인 변주를 주면서 또 하나의 일정한 흐름을 만들게 됩니다.
# 마지막으로 인상 깊은 장면 하나를 사족으로 남깁니다.
카메라가 위에서 아래로 일직선으로 비추면서, 슬픈눈의 "미안하오" 라는 말은 죽임당한 이에게, 남순에게(검으로 나누는 대화 편에서 말했듯 검집은 남순의 또 다른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상징인 굴비를 한 컷에 모두 담아냅니다.
==============================================================
제 말이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에 올릴수 있는 이미지 20 장의 한계와 주제의 틀 속에서 다루고자 하는것들을 모두 다루진 못했습니다. 또한 형사라는 영화는 같은 장면일지라도 <음모, 사랑, 존재, 병판과의 관계> 라는 틀 속에서,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에 제가 하나의 의미만으로 해석해 놓았던 것은 내용들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7 편에서 다루었던 2,3,4 와 같은 화두도 단지 이야기의 흐름을 느끼게 하기 위한 제가 만든 장치였을 뿐, 굳이 의미를 부여하진 않아도 될 것입니다. 어렵게 설명은 하였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느낀다면 굳이 의미를 해석하려 하지 않고도, 편안히 그 감정을 느끼실수 있을 겁니다.
슬픈눈, 이라는 말처럼 눈(snow)과 눈(eye)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병판, 슬픈눈, 남순의 눈 속에서 감정의 연기를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입니다. 다만 병판의 눈 속에서는 그 느낌이 전해지지만, 대비되는 관계인 슬픈눈에게는 감정의 변화가 크게 느껴지지 않아서 이 부분이 조금 아쉽운 듯 합니다.
# 저의 이야기는 모두 끝났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p.s 원래 이 글을 마지막으로 끝내려 했으나, 제 글에 잘못된게 있어서 외전 편을 하나 더 남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