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등학교 시절 학급에서 돌아다니는 야설 한번쯤은 대부분 섭렵해보았을 것이다. 물론 한두번에서 끝난 이들도 있고 매니아적인 발전을 보인 이들도 있겠지만 성적 본능만을 자극하는 이 내용없는 글이 묘하게 매력을 과시하는 것은 이성이 발달한 인간이라도 본성이 남아있는 동물적인 성격의 불변적 진리의 근거가 아닐까?
물론 성(性), 즉 섹스(sex)를 즐기는 종족은 인간밖에 없다. 다른 짐승들은 단지 번식을 위한 불가피한 행동양식에 불가하지만 인간은 쾌락이라는 변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섹스라는 행위 자체를 즐긴다.
어쨌든 섹스라는 코드는 수면위에서는 저질적이고 음란한 행태로 인식되면서도 수면아래에서는 필수적이고 불가결한 행위로 존재하는 독특한 모양새를 지닌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에서는 이 독특한 소재를 그냥 놓치고 지나갈까? 그럴리가 있겠는가. 많은 영화에서 섹스라는 소재는 심벌자체로도 혹은 은근한 뉘앙스로도 차용되고 사용된다. 특히나 03년도에 개봉했던 '스캔들'이라는 작품은 고전적인 체통위에 불경한 이 소재를 골고루 뿌려댄 영화로써 필자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시대적인 배경 위에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얹었던 퓨전 요리같던 영화로 기억되는 이 작품은 그 당시 영화계에서는 상당한 화제였다. 물론 욘사마의 첫 영화행보라는 점에서도 그랬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독특함 자체의 어필이 더욱 큰 면모를 보였다는 것이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최근 '음란서생'에 대한 귓소문은 '스캔들'의 이미지와의 연관성을 지우기가 힘들다. 우선 김대우 감독이 '스캔들'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점 자체만을 보더라도 영화에서 느껴지는 기운의 방향성 정도는 예측이 된다. 물론 영화에 대한 뻔한 예측력 따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보여주는 실루엣의 연상정도는 가능하다는 말이다.
어쨌든 '스캔들'에 대한 데자뷰같은 기억은 '음란서생'이란 작품에 대한 허물이 되진 않는다. 그 작품이 지닌 퀄리티에 대한 호감도가 이 작품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에 덧씌워지는 형상이기에 역시나 그 호감도가 전승되는 기분이랄까.
사실 이 영화는 생각보다 눈으로 보여지는 아찔한 유혹은 그다지 많지 않다. '스캔들'에서는 남녀간에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시선을 무안하게 만드는 영상적 자극의 농도가 짙었으나 이 작품은 생각보다 그런 오해를 풀게 만든다. 그러나 발칙한 상상력은 오히려 대폭 증가되었다.
일단 초반부터 언급했던 '스캔들'과의 비교선상에서의 해석은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과정이라 여겨진다. 영화의 이야기의 구조에서의 비슷한 기운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발랄하면서도 묘한 색을 띄는 영화의 뉘앙스로 출발하는 시작부터 그러한 기운이 강해지면서 영화는 아찔한 해학적 발전을 보이다가 어느새 불길한 기운이 감돌면서 비장감이 격해지고 영화의 끝맺음은 명료하면서도 잔존하는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그 뒷편에 살며시 남는 보너스적인 웃음까지도..기-승-전-결의 구조적 대비에서 두 영화의 플롯의 흐름은 유사한 면이 있다.
허나 영화의 기본적인 이미지는 비슷하나 그 내면적인 분위기 자체는 판이하다. 사실 '스캔들'은 고전적인 느낌이 강했으나 '음란서생'은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다. 특히나 두 영화의 기본적인 이야기의 분위기 자체도 매우 다르다. '스캔들'도 웃음의 요소가 많았으나 그것은 영화 자체가 의도한 웃음이라기 보다는 영화의 분위기를 매끄럽게 이어가려는 소재에 불과했다. 허나 '음란서생'의 웃음은 영화의 메인디쉬와 같다. 이 영화의 웃음 그 자체가 영화의 목적과 동일선상에 서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웃음 자체는 과장되거나 억지스러운 비약성이 결여된 깔끔한 짜임새이기에 자연스럽다.
영화의 색감 자체에서 주는 느낌도 비슷하다. '스캔들'에서 보여지던 고운 색감의 화려한 풍모가 이 영화에서도 답습된다. 다만 조금은 명도를 살리고 채도를 걸러낸 듯한 느낌의 색감의 차이는 있다. 허나 작품자체의 시대배경에서 보여지는 유사함은 당연히 두 영화의 소품과 의상, 세트의 고전미의 유사함으로 연결된다.
배우들의 감정적 구조도 '스캔들'과의 비슷한 모양새가 보인다. '스캔들'의 바람둥이 조원(배용준 역)과 명문장가 윤서(한석규 역)가, 정절녀 숙부인 정씨(전도연 역)와 사랑을 갈구하는 정빈(김민정 역)이, 연정을 안에 담고 숨겼던 조씨부인(이미숙 역)과 사랑을 얻지 못한 왕(안내상 역)이 각각의 삼각구조를 이루며 외곽적인 이미지의 동질감적 기운이 느끼진다. 허나 각각의 캐릭터가 지니는 구체적인 이미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단지 그 대략적인 윤곽의 비슷함의 언급정도로만 이해한다면 되겠다. 바람둥이와 쑥맥의 차이가 느껴지는 조원과 윤서의 차이는 진실한 사랑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의 유사점이 있고 정조에 목숨을 거는 숙부인 윤씨와 자신의 사랑에 적극적인 정빈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냉소적인 조씨부인과 위엄을 지키는 왕은 연민을 품었으나 사랑을 얻지 못한다는 캐릭터적 유사성이 있다.
다만 의금부 도사 광헌(이범수 역)은 '음란서생'에서만 보여지는 개별적 노선을 걷는 캐릭터로써 윤서와 함께 해학적인 웃음을 보여주며 후반부의 극중 비장감에 촉매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또한 극중 비중도는 떨어지지만 무시할 수 없는 조내시(황뢰하 역)는 관객의 상상력에 따라서 캐릭터적 어필이 차이를 보일만한 인물이다. 그리고 육의전 주인 황가(오달수 역)는 영화의 웃음을 형성하는 주요인물로써 상당히 재미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각각의 캐릭터의 완성은 배우들의 열연이 없었다면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어쨌든 이 영화는 생각보다 코믹적인 요소가 강하다. 다만 노골적인 웃음 유발이 아닌 이야기의 흐름이나 대사에 담긴 은유적 표현이 발생시키는 웃음이 유쾌하게 와닿는 형세이다. 또한 요즈음의 인터넷 문화가 발생시킨 용어를 딱 맞아떨어지게 사용함으로써 관객에게 경탄할만한 재미를 준다. 특히나 영화의 마지막에 주어지는 장면은 정말이지 대단할 따름.
또한 이 영화는 은연중에 작가주의 정신에 대한 고루한 진리를 설파한다. 물론 음란한 소설 작가가 지니는 작가정신의 남루한 퇴폐적 기질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으나 본연주의적인 성질 자체의 그것이라고 여겼을 때 작가가 작품을 대하는 진지함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완성도에서 우러나는 집착적 열정에서 기인함을 보여준다. 단순히 야설이라고 해도 성적인 본능 자체를 얼마나 자극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만족도가 달라진다. 말그대로 장르 자체의 완성도의 차이가 보여진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독자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에 대한 열망 그 자체는 비루해지는 작가주의 정신에 경종을 울릴 만한 면모라고 보여진다.
다만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은 영화의 후반부의 비장감의 강도가 조금은 아쉽다는 것이다. 전반부의 해학적인 웃음이 후반부의 숙연한 비장감과의 연결에 매끄러운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잉된 로맨스의 과욕적 결부에 있다. 또한 왕이 보여주는 애절함이 와닿기에 살짝 머뭇거려지는 것은 거세된 캐릭터의 내면적 심도가 영화에서 어필되기에는 살짝 부족함이 있지 않았나하는 적당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영화가 전체적으로 큰 흠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모양새와 전개력을 지니고 있어서 이 정도의 흠은 필자본인의 개인적 불평으로 무시한다해도 불만스럽진 않겠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느껴지는 만족감에 비하면 이 정도는 눈감아 주고 싶다.
사실 조선시대이전 고려시대에서도 만전춘이나 쌍화점같은 음란한 고려가요가 돌았다. 조선시대에서도 그런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리 없다. 사실 우리사회가 성(性)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무지한 오해를 일삼았던 것은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다. 물론 그 자체가 비속한 상품화로 연결되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퇴폐적이고 불결한 가치로 전도되는 것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 솔직히 섹스라는 것 자체가 지니는 환상과 현실은 큰 차이가 있으면서도 그 차이는 다소 가볍다.
영화에서도 언급되듯 마치 꿈꾸는 것만 같은 기분은 쾌락이라는 요소와도 연결된다. 프로이트가 성적 본능이 현실에서 압사당하는 것을 꿈의 해석과 결부시킨 것과 동일시할 것 까지도 없고 키레네 학파의 행복을 향한 변색적인 쾌락주의적 발전도 불필요하겠지만 인간의 본능적 행위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다가가 이해한다면 강요가 없어도 자연스러운 사회적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상당히 솔직하고 반가운 적나라함이다. 인간이 꾹꾹 눌어앉힌 성적인 솔직함이 음란한 형태로 변질됨을 통쾌하게 묘사하고 은밀하게 속삭이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러한 저속적인 이야기 앞에서 반갑게 웃을 수 있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모두 안으로 음란한 생각을 항상 남몰래 품고 다닌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지나친 발상은 위험하지만 적당한 상상은 솔직함이 아닐까. 누구나 다 즐거움은 누릴 권한이 있고 그 즐거움의 한 형태는 쾌락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적당한 쾌락을 즐기는 것이 죄악시될 필요는 없으니까 이 영화가 폄하될 이유도 없다. 이 영화의 외관은 음란하지만 그 내면은 솔직하고 유쾌하다. 마치 친한 친구들끼리 가끔 즐기는 음담패설처럼. 그 솔직한 유쾌함에 한번쯤 귀기울인다고 창피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솔직한 모습의 한 단면이니까 말이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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