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뉴스를 보면 울화통이 터지는 때가 있다. 수백억이 정말 껌값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쉽게 쉽게 들먹여지는 뉴스를 볼 때면 정말이지 내가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도 능력없는 인간인지 고민스러울 때가 있다. 매주마다 로또 결과를 기다리며 매번 기대에 실망이라는 단어를 채워넣는 서민에게는 인생이라는 것 자체에 회의감이 느껴지는 소식들이 9시마다 고정프로그램처럼 소게되곤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 1 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 2 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는 명백하게 우리 대한민국 헌법의 시작을 알리는 법조문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명백하게 대한민국 헌법에 따른 구속력을 지니며 그에 따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사회 질서의 기틀이 마련된다.
그러나 말이다. 현실은 과연 그럴까?
계급사회는 조선시대 이후로 더이상 이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양반도 천민도 없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니까. 그러나 이 사회는 겉으로 보이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을뿐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하는 부의 유뮤여부에 따라 나눠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막연한 계급질서가 존재한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기회의 차이이고 이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의 차이로 돌변한다. 자유가 부여되었다고 하지만 그만한 자유를 누릴 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 자에겐 비소를 날리는 것이 이 사회의 비열한 법칙이다.
88 서울 올림픽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이전까지는 이 땅에 존재했던 가장 큰 국제적 행사였다. 세계가 주목하던 대회였고 우리나라의 국가 브랜드를 널리 알렸던 국가적 이벤트였다. 그래서 정부의 높으신 분들께서는 국가적 이미지 훼손을 우려하셔서 국제적으로 추한 꼴을 보이는 것에 우려가 크셨단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추접한 꼴의 은폐를 위해서 판자촌과 거리의 걸인 정리를 당사자의 사정따위는 상관없이 강행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현장의 영상화로 출발한다.
일단 이 영화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보여지는 자막처럼 현실의 재구성을 통한 각색이 된 픽션을 기반으로 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상의 모든 상황을 현실로 착각한다거나 이 영화가 지나친 인물 미화를 했다는 식의 이야기의 편중을 막기 위한 의도로 보여지며 필자 본인 역시도 그런 식으로의 영화의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성재가 연기하는 지강헌의 분신 격인 지강혁 역시도 본명 그대로가 아닌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그런 의미라고 여겨진다.
영화의 출발은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서글프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서정주 시인의 '무등을 보며'라는 유명한 시에서의 시구도 있지만 그것은 현실을 초월한 이들에게나 가당한 법. 말은 쉽지만 가난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목을 죄어오는 하나의 고문과도 같다.
어쨌든 올림픽 개최라는 국가적 사명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는 판자촌 서민들의 모습은 관객의 마음에 분노를 선명히 새기며 슬픔을 조금씩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지강혁이라는 인물이 지녀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 대한 동감적 근거를 시작부터 관객에게 어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이 횡령한 수십억의 돈에 대한 죄값이 징역 7년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훔친 푼돈에 대한 죄값에 비해 터무니없는 벌이라는 사실이 영화속의 인물만큼이나 관객에게 분노로 전이된다. 솔직히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너무나도 익숙한 분노이기에 더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노골적으로 이 사회에 대한 부조리를 속삭인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허울 아래서 존재하는 헌법이 보호하는 것은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특히나 지강혁과 대립하는 김안석(최민수 역)이라는 인물은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박힌 와전된 사회질서를 완벽하게 대변한다. 사회적으로 힘없는 자들을 쓰레기 취급하며 비열한 웃음으로 일관하는 그의 모습안에서 우리가 믿는 사회 정의에 대한 신랄한 실망감과 공권력에 대한 비신뢰감을 재차 확인한다. 그럼으로써 그에 대항하는 지강혁의 모습을 통해 비록 계란으로 바위치기 일지라도 그 계란이 남기는 바위위의 흔적에서나마 숙연한 복수심을 느끼며 깨진 계란의 파편이 보여주는 뒤집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으로부터 다가오는 아련한 서글픔을 맛본다.
그 시절만의 이야기일까. 우리 사회는 이젠 모두를 위한 세상일까. 오늘은 이제 힘없는 자들에게도 공평하게 그 기회를 돌릴 수 있는 아량이 있는 세상일까. 솔직히 그건 힘든 현실이다. 사회주의의 이론안에서나 가능한 모두에게 공평한 세상은 현실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몽상같은 꿈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못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세상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한 세상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과 부를 지닌 자를 위한 세상이라면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무엇을 위한 세상일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한번쯤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사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냥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해서 부조리함조차도 능력처럼 치부해버리는 세태는 분명 문제있지 않은가. 그리고 범법행위로 처벌받고 콩밥을 먹는 이들의 입장이 된다면 분명 억울한 세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도 종종 그런 입장이 되지 않는가. 자신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른 타인이 자신보다 덜한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 표현은 못해도 억울함을 느끼는 것처럼 가난으로 인해 짊어진 형벌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9시 뉴스가 보여주는 현실은 너무나도 억울한 현실이지 않을까. 가난이 죄를 짓게 만든 이들에게는 분명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어야 할 것인데 말이다. 극 중 지강혁의 말처럼 자신도 조금 살만했다면 이렇게 살진 않았을 것이라는 억울한 외침은 그래서 관객에게 절절하게 와닿는다. 우리 현실이 탄생시키는 장발장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얼마 전 개봉한 '야수'와 더불어 우리사회가 숨긴 비열한 표정을 드러내는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그럼에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힘없는 현실이다. 극 중 대사처럼 우리가 백날 떠들어봤자 씨도 안 먹히는 세상아닌가. 힘없는 자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강혁의 말처럼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되지 않겠나. 할 수 없다는 단정으로 모두가 침묵한다면 결국 잘못은 사회가 묵인한 인정으로 와전되는 법이다. 하지만 잘못이라는 지적이 나와야만 또다른 동의가 탄생하고 하나의 질서가 바로설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영화는 우리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가치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영화는 상당히 극적이다. 그들의 탈옥이 보여지는 순간의 통쾌함 이후의 씁쓸한 비극적 퍼레이드는 관객에게 허탈한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또한 그들의 의리가 보여주는 끈끈한 우정은 그만큼이나 서러운 안타까움으로 관객의 뇌리에 박힌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말은 1988년 지강헌이라는 탈옥수가 남긴 시쳇말같은 명언이다. 개인적인 바람은 이 영화를 목격한 관객이 지강헌이라는 인물에 대한 동정을 느끼기 보다는 이 사회가 외면하는 우리네 어두운 그늘에 대한 통감을 얻길 바란다.
연기자들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치를 완벽하게 살렸다. 특히나 지강혁 역을 맡은 이성재의 연기는 지금까지 그의 연기중 단연 최고다. 가슴속에 냉정한 분노를 머금은 채 세상을 향해 타올라가는 지강혁을 완벽히 구현한 그의 연기는 정말이지 눈부시다. 또한 그를 괴롭히는 이안석 역의 최민수의 연기 또한 죽이고 싶은 정도로 비열한 캐릭터를 잘 살려냈다. 이는 최근 불거져 나온 그에 대한 방송시비와는 다른 측면의 평가가 필요하다 여겨진다. 그리고 다른 조연배우들의 연기 또한 영화를 수놓는 멋진 배경이 된다.
무엇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인가. 필자는 자유의 허물을 쓴 자본주의 논리의 비열한 가치관이 지닌 차별에 대한 이야기에 주목해 보았으면 한다. 분명 이 사회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써의 권리는 공평한 것인지 말이다. 누구를 위한 세상인지 한번쯤은 이 사회에 되묻고 싶어질만한 영화다. 지강헌이 죽기 전 듣고 싶다고 했다던 비지스의 'holiday' 대신 스콜피언스의 'holiday'를 틀어주었다던 88년 그시절의 실화는 쓴웃음을 짓게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사회로부터 무시당한 것일까. 영화에서나마 비지스의 'holiday'가 흐른다는 것은 그나마 이 영화가 보여주는 따스한 국면이다. 극중 지강혁은 그 노래를 통해서 자신의 비정했던 인생안에서 자유를 꿈꾸고 싶었던 것일까. 물론 모두에게 공평한 자유를. 있는 자에게나 없는 자에게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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