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늘어지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드라마에서도 초반엔 탄탄한 전개로 시선을 사로잡다가 연장방영 등의 이유로 갈수록 질질 끈다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고, 영화도 마찬가지다. 초반엔 탄탄하다가 갈수록 풀어진다는 평을 받는 영화는 많아도 시종일관 탄탄하다거나 초반엔 느슨하다가 갈수록 탄탄해진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지금부터 이야기할 영화, <나이트 플라이트>는 꽤 반가운 영화였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긴장을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는다. 러닝타임부터가 그렇다. 85분. 엔딩 크레딧 등 잘 보지 않는 부분을 빼고 나면 실질적인 관람시간은 80분도 채 안된다.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실사 영화가 이 정도 러닝타임이라면 늘어지고 싶어도 늘어질 겨를이 없다는 뜻이 된다. 그만큼 이 영화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최대한의 스릴을 고농도로 농축시켜서는 관객들 앞에 휘몰아치는 재주를 발휘하는 영화였다.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우리의 주인공 리사 라이저(레이첼 맥애덤스)는 잘 나가는 호텔리어. 할머니의 임종을 맞고 다시 본업인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마이애미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험상궂은 날씨 탓에 자꾸만 지연되고 있다. 그러던 중 계속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며 잭슨 리프너(킬리언 머피)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기호도 서로 잘 맞고, 대화도 잘 통하는 것이 꽤 좋은 느낌이 든다. 결국 두 사람의 인연은 비행기 안에서도 이어지는데, 아니나다를까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가 땅에서 바퀴를 뗀 그 순간부터, 잭슨은 리사에게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의 목적은 딴 데 있었으니, 바로 국토방위부 차관을 살해하는 것. 잭슨은 이를 위해 리사에게 그녀의 호텔에 묵을 예정인 차관의 숙박실 호수를 바꾸라고 지시한다. 물론 여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담보가 뒤따른다. 만약 따르지 않을 시에는,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리사의 아버지를 무참하게 살해할 것이라는 것. 난기류가 휘감은 바깥 날씨, 생판 모르는 주변 승객들 속에서 리사 혼자 절체절명의 위기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일단 이 영화를 처음 보는 분이라면, 두 주인공들의 모습이 꽤 생소하게 느껴지실 거라 예상한다. 사실 이 두 배우-레이첼 맥애덤스와 킬리언 머피는 미국에서도 막 떠오르고 있는 유망주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겨우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들이긴 하다. 그러나 이들의 연기 내공은 그러한 그들의 명성 이상의 값어치를 한다. 내용 전개 특성상, 대부분의 스토리가 이 두 사람의 갈등으로만 전개되는데, 그런 점에서 이 두 사람의 연기는 허술하거나 허전하게 느껴진다기 보다 오히려 스크린을 꽉 차게 할 만한 저력을 가진 연기였다. 두 사람 각자 나름대로의 색깔을 지닌 연기가 함께 충돌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나 할까...
레이첼 맥애덤스같은 경우는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의 그 왕재수 퀸카로서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터라 그 이후 <노트북>과 이 영화까지 계속 의외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배우의 겉모습부터 우선 보면, 물론 서양 배우들이 흔히 갖고 있는 아리따운 여인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냥 순정만화에서처럼 가련하다거나 연약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당당하고 도도한 이미지에 줏대도 상당히 굳게 있어보이고, 강한 의지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다소 이중적인 이미지가 이 영화에서 제대로 빛을 발하지 않았나 싶다. 낯선 남자의 협박 앞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도 나중엔 강인한 의지를 갖고 재빠르게 위기를 돌파해나갈 줄 아는 능력 말이다. 여느 청순한 여주인공처럼 보이다가도 하키 선수 출신으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도 하는 영화 속 리사의 캐릭터가 참 잘 들어맞지 않나 싶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선 그렇게 재수없는 여인의 이미지로 나가다가 이 영화에선 어찌도 이렇게 대견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지... 참 기대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킬리언 머피는 <배트맨 비긴즈>에서와 마찬가지로 악역을 맡았는데, 확실히 그에게선 게리 올드먼의 뒤를 이을 연기파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팍팍 묻어난다. 그가 연기하는 악역 잭슨의 모습은 여느 극단적인 악당들과는 많이 다르다. 목소리는 1옥타브를 넘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절제되어 있으며, 표정 또한 좀처럼 굳어서 변하질 않는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혼자 흥분하거나 뒤엎는 구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가 후반부에 가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친 살인마 마냥 덤벼드니 이 어찌 아니 섬뜩할 수 있으랴. 이렇게 지극히 차갑고 이성적인, 그래서 언제 그 안의 폭력성이 뿜어져 나올지 모르는 모습을 연기하는 내공이 상당히 강해 보였다. 다소 퀭하게 느껴지는 눈빛에서 나오는 싸늘하고 예리한 이미지하며, 아직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배우이지만 표정이나 분위기 등에서 느껴지듯 벌써부터 자기만의 확실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역시나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가 아닌가 싶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의 감독은 <스크림>의 웨스 크레이븐이다. 이 감독이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은근히 관객의 기대를 살짝 비껴나가는 전략을 구사했던 적이 꽤 있다. <나이트 메어> 시리즈 이후 뜸하나 싶더니만 기존의 슬래셔 호러에 범인은 누구인가하고 추리해나가는 스릴러 형식까지 도입한 <스크림>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2편까지 만들더니 이번엔 메릴 스트립이라는 명배우를 데려와서는 그와는 상당히 안어울릴 것 같은 감동의 휴먼 드라마 <뮤직 오브 하트>를, 그것도 꽤 괜찮은 영화로 내놓았다. 그러다가 다시 <스크림> 시리즈로 돌아와 트릴로지로 마무리 짓더니 이번엔 역시 좀 의외다 싶은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인 이 영화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긴장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웨스 크레이븐이 여태까지 만들어오던 공포영화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이 감독은 피칠갑만이 결코 공포와 스릴을 가져다 주는 요소가 아님을 알고 있다. 이 영화에는 <스크림>과는 정반대로 피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후반부에 가서 피가 좀 등장할 뿐, 나머지는 시종일관 깔끔한 스릴러로 전개될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선사하는 긴장감 내지 공포감은 여느 공포영화를 능가하는 상당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상황 설정에서부터 스릴러로서의 힘이 발휘된다. 최악의 기후 상황에서 비행하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여주인공 홀로 살인의 위협을 받고 있다. 차라리 단체로 비행기가 하이재킹을 당하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다른 승객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마냥 즐거운 상황에서 여주인공 혼자 떨어져서 극한의 위기에 몰려 있다는 것은 단순히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 아무도 이걸 도와줄, 하다못해 함께 고통을 겪어줄 사람조차 없다는 점에서 심한 고립감으로 인한 두려움까지 형성한다. 거기에 얼마 전까지 내게 잘해주던 사람이 갑자기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돌아서면서 죽일 거라고 협박하는 데에서 오는 공포도 더해지고.(물론 우리는 이미 그 남자가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의 공포감은 덜한 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나려는 여주인공과 이에 꿈쩍도 하지 않는 남자주인공의 치열한 대립은 영화를 줄곧 불꽃튀게 하는 중요한 도화선이 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내내 이들의 갈등으로만 이끌어나가게 되면 자칫 지루해질 것을 우려해서인지, 감독은 스릴을 더욱 증폭시켜줄 기타 부가장치들을 영리하게 설치해놓았다. 첫번째가 바로 비행기를 둘러싼 기상 상태이다. 폭풍과 고요를 오가는 기상 상태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이러한 날씨는 주인공들의 행동과 계획에 어떤 차질을 가져다 줄 지 알 수 없게 만든다. 한참 전화 중에 갑자기 난기류로 인해 전화가 끊어진다든지, 안전벨트를 매라, 풀으라는 지시가 반복되면서 주인공들의 행동에 대한 제약도 가해졌다 풀어졌다 하는 식이다. 거기에 두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승객들도 꽤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는 두 주인공 외에 같은 비행기에 탄 다른 승객들 몇명도 틈틈히 카메라에 비추는데, 이들은 단순히 웃음을 주는 양념에 머물지 않고 나중에 가서는 두 주인공들이 맞닥뜨린 사건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게 되는 연결고리로도 작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걸 맞춰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쯤에서 또 한번의 배신(?)을 때린다. 초중반까지 비행기 안에서 손에 땀을 쥐는 서스펜스 스릴러로 나아가던 영화는, 비행기가 착륙하고 두 주인공이 내리는 순간부터 호러 컨셉으로 또 한번 탈바꿈한다.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도망가는 여주인공 리사와, 잡히면 금방 죽일 듯이 필사적으로 쫓아가는 남주인공 잭슨의 추격전은 여느 호러 영화에서의 여주인공과 살인마의 추격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 어느 순간에 잡힐 지 모르는 추격전과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숨바꼭질의 연속으로 영화는 관객들의 숨통을 여전히 틀어쥐고는 끝날 때까지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잭슨이 알고보니 리사의 배다른 오빠였다느니, 리사의 아버지가 알고보니 사건의 배후에 있는 테러조직의 우두머리였다느니 하는 식의 뒤통수 치는 반전은 존재하지 않지만, 여태까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긴장감을 잔뜩 조성함으로써 스릴러로서 갖고 있는 미덕을 끝까지 잃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앞의 3분의 2 지점까지는 밀폐된 비행기 안에서의 긴박한 스릴러로 나아가다가, 뒤의 3분의 1 지점에서는 두 주인공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탈바꿈하면서 자세만 바뀌지 쉴틈없이 관객의 숨통을 조인다. 마지막 끝나기 단 몇분 전까지도 그 긴장감은 계속되다가 결말이 비로소 매듭을 짓게 되면서 웨스 크레이븐 특유의 센스 넘치는 유머를 보너스로 하나 툭 던지며 영화는 비로소 할일을 다 한듯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잭슨이 왜 그런 짓을 했으며, 배후에 누가 있는가 하는 시시콜콜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사건의 전개가 점진적으로 상승했다 하강하는 식의 뚜렷한 기승전결 구조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보다 상세한 설명을 곁들인 일반 스릴러를 기대하시는 분들께는 좀 실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오히려 앞뒤의 시시콜콜한 내용은 다 걷어내고 가장 스릴감이 넘칠 부분만 딱 진국으로 뽑아내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만들어놨다는 점에서 그 스릴의 파괴력은 대단하다. 어떤 부차적인 메시지같은 것도 역시나 없지만, 그 짧은 80분동안 미련없이 잔뜩 사람 긴장시켜놓고는 놓아주질 않다가 끝나면서 미련없이 조였던 숨통을 놓아주는 군더더기 없는 센스. '짧고 굵게'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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