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 님 보고 홀로 깨니, 희미한 달빛에 대나무 성긴 그늘만 임이 주신 정표 가득 얼룩집니다.
비갠 산 빛 연못에 짙게 어리던 날, 거문고 켜시던 님의 환한 모습 연화의 봄날은 다시올 수 없겠지만 거문고 소리는 아직 귓가에 맴돕니다.
하늘은 응당 알고 있을 진데, 어찌하여 막다른 길을 가시려 하십니까. 아버지의 한 풀어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임마저 잃을까봐 가슴이 저립니다.
이름도 없이 보낸 타지의 고된 삶에도 모진 목숨 버리지 못하는 것은 제가 님의 무덤이 되었듯 님 또한 저의 무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대한 님의 흉통이 우릴 갈라놓았지만 풍악소리 그치고 붉은 비 내리는 날 바다 건너 님께로 가겠나이다.
- 혈의누 中, 직금도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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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DVD에 관심을 가졌던 주 목적은 일단은 영화속에서 너무도 고급스럽게 나왔던 때깔 넘치는 미술과 제지소, 포구마을등의 배경과 제작과정들을 좀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는 욕구였지만 두번째 이유는 (어쩌면 주된 이유), 감독님이 속도감 넘치는 스토리를 위해 무참하게 잘라버렸다는 인권과 소연의 삭제된 러브씬들과 기타 다른 삭제 장면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삭제장면은 이 장면이었습니다. 경염정에서 인권은 거문고를 타고 있고 소연은 그의 등뒤를 안고 도란도란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웃옷을 입지 않고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랑을 나눈 직후인듯. 소연은 최근에 발견했다는 바다 거북의 알들을 본 일, 답답한 이곳 섬에서 벗어나 도련님과 함께 한양도, 연경도 구경해 보고 싶다는 소망...그러나 인권의 병을 알기에 그 소망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시무룩, 하지만 바다를 보지 못하는 도련님을 위해서 두호에게 바다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며 그림을 보여줍니다. (두호가 그려주었다는 바다그림이 실제의 바다 장면으로 연결되며, 바다에 빠진 소연을 구해주는 두호 씬으로 연결된다고 하네요) 참새처럼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귀엽게 재잘거리는 소연의 모습을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 결국 그녀에게 깊고 부드럽게 키스하는 인권...
이 장면이 빠진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이 장면만 있었더라도 영화속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인권과 소연의 사랑이 충분히 이해되었을텐데요. 이미 저 둘은 정신적인 사랑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까지도 나누었던 관계였습니다. 소연의 시체에 보라색 옷을 입히는 도중 옷소매에 걸려 부러진 소연의 손톱을 보며 그제서야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실감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인권의 모습, 감독님은 이 장면을 슬프라고 넣었는데 대다수 관객들은 손톱 부러지는 모습에서 끔찍하다며 고개를 돌렸다고 하지요. 만약 위의 장면이 있었다면 더욱더 가슴 아팠을텐데요.
원규가 소연의 초상화에 그려진 노리개 모양의 암호를 깨닫고 직금도의 비밀을 알아내고 해석하는 장면도 아마 그런 맥락에서 빠진것이 아닐까 합니다.노리개속의 나비 모양과 Y자로 그려진 문양이 해석 키 모인트였습니다. 나비가 날아가는 방향을 따라서 Y 자 모양으로 수놓아진 글들을 읽으면 저런 뜻이 나온다고 합니다. 직금도의 대나무 성긴 그늘과 거문고는 모두 인권의 거처인 경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연이란 이름이 흰 연꽃을 뜻한다면 경염정의 뜻과 연화의 봄날 역시 소연을 의미하겠지요. 경염정 에서 사랑을 나누는 두 연인의 모습이 있었기에 관객들은 그들의 이루워지지 못한 사랑에 더욱더 마음아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역시 삭제.
많은 분들의 다양한 해석이 나왔던 마지막 원규의 제지소 환상 장면도 원래는 인권과 소연, 그리고 강객주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아무일 없었든 듯이 활발히 돌아가는 제지소를 바라보는 강객주의 영혼 옆에는 어느새 생전의 모습으로 인권과 소연이 다가와 있습니다. 인권은 강객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강객주는 모든 것을 다 알겠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인권은 소연과 함께 쪽배를 타고 살아생전에는 결코 떠나지 못했던 한 많은 섬을 떠납니다. 쓸쓸히 동화도를 바라보며 멀어지는 두 연인의 쪽배를 바라보는 배 위의 원규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어떻게 보면 제지소의 환상장면은 원규의 자기합리화의 일종이겠지요. 원규는 이로서 억울히 죽은 이들의 영혼은 위로받고 좋은곳으로 잘 갔을거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제지소는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 돌아갈 것이라 스스로를 자위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굳이 이들의 사건을 또다시 밝히는 것보다 덮어두는 것이 자기에게나, 죽은 영혼들에게나 여러모로 더욱더 이롭다고 생각했겠지요.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도 원규 스스로가 그렇게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직금도를 슬쩍 바다에 버린 것도 비열한 자기 합리화가 아닌, 두 연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이 장면이 있었더라면 좀더 해석의 여지가 많습니다. 어찌보면 이 장면을 뺌으로서 감독님은 관객들이 원규의 "덮어버리자"라는 결정을 더욱더 비난하게 만들고 싶었던게 아닐까요. 원규의 변명의 여지를 없애버린 셈이니까요.
혈의 누 영화는 누가 뭐래도 이루어지지 못한 두 연인의 안타까운 사랑 영화라는 관점에서 본 한 인권도령 빠순이의 글이었습니다. ^^;;
아무튼, 오랫만에 큰맘 먹고 산 DVD 에 정말 만족했습니다. 소장가치 별 5개를 아낌없이 주고 싶습니다.
p.s. 원규가 어떻게 인권이 물을 무서워하는지에 대해서 알았는지는 "바다가 있는 곳에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이라는 대사 한마디로만 일축해버렸지요. 삭제영상중에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불탄 배를 함께 가서 조사하지 않겠느냐는 원규의 권유에 인권은 갑자기 그때까지의 최근의 사건들에 대해 아무런 동요 없이 당당하며 여유있게 증언하던 태도를 바꾸어, 원규로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정중히 거절을 하며 떠납니다. 자신이 그곳에 가보았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면서 말이지요. 인권을 용의자의 한명으로 바라보고 있던 원규로서는 이 태도에 충분히 의심을 품을 만 하겠지요.
p.s.2 원래 제작진들이 생각했던 강객주의 사지 거열 장면은, 화면에 나왔던 것보다 몇 배나 더 잔혹했습니다. 영화처럼 깔끔히 사지가 찟기는 것이 아니라 우선 "몸통이" 두부분으로 갈라지는 것과 동시에 내장과 피와 살덩어리들이 영화 마지막의 피비처럼 흩뿌려지고 사지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럼에도 얼마의 시간동안 살아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진 예상 콘티를 봤는데 이건 정말...맨정신으로 못보겠군요. 윽. 이게 진짜 촬영되었더라면 정말이지...;;;
p.s.3 인권이 소연의 시체를 제지소로 옮기는 장면 역시도 삭제된 영상 중 하나입니다. 강객주(제지소)에게 딸을 돌려드리러는 인권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만든 장면이라고 합니다.
p.s.4 닭목 치는 장면에 대해서, 김대승 감독도 코멘터리에서 많이 설명을 하시더라구요. 자신이 굳이 닭의 목을 자르는 장면을 넣은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장면은 마을 사람들과 자신의 아버지인 토포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저지른 비열하고 잔인한 행동들을 원규가 처음으로 인식하는 장면(강객주의 처형) 바로 다음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다른 이들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하는 그들의 추악한 모습을 가장 잘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면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닭피를 바르는 것은 나쁜 귀신을 막는 주술적인 행동입니다. (강시영화 같은데서도 보셨을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또다른 생명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인간군상의 추악한 단면의 극대화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빛 탕감이라는 조그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강객주 일가의 무참한 살육에 동의했습니다 그랬으면서도 이번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또다시 다른 생명 - 닭 -의 피를 뿌리는 것을 서슴치 않습니다.
이러한 광기는 영화 마지막에 지호가 죽어야 강객주의 영혼이 위로가 된다며 식칼, 낫, 곡괭이 같은 무식한 방법으로 처참한 살육을 저지르고 나서도, 자신들의 죄를 대신하여 씻을 또다른 희생양을 찾아서 기새등등하여 김치성 영감의 집으로 쳐들어가고자 합니다. 이러한 지옥도를 극대화하여 표현한 것이 영화 마지막의 혈우가 내리는 장면이었겠지요.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죄가 있던 이들의 눈에는 그 비가 강객주의 마지막 저주의 실현인 처절한 피비로 보였던 것입니다. 김치성 영감이 죽을때 자세히 보면 그 비는 평범한 비 입니다. 죄 많은 김치성 영감에게도 그 비는 피비로 보여서 결국 죄책감에 자살을 택했던 것이지요. 다시한번 말하자면 그 닭의 목을 자르는 장면은, 이러한 마을사람들의 심리 - 다른 생명의 피를 통해서 나의 죄를 덮으려는...이 극대화로 나타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수사를 해오던 원규가 처음으로 섬전체를 감싸고 있는(게다가 자신의 아버지도 포함한) 비이성과 광기를 확인하고 실제로 맞닥뜨리는 장면입니다. 만약 그냥 닭피를 마을에 바르는 장면이었다면 그 정도로 섬뜩한 메시지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p.s.5 손수건을 버리는 원규에 대해서는 본문에도 쓴 것처럼 많은 분들의 의견이 있는데, 감독님은 열린 결말로 가고 싶었다고 합니다. 관객들이 어떻게 해석해도 자유로운...하지만 감독님의 의도는 차승원씨가 연기한 대로 "처음에 섬에 들어올 때에는 배 제일 앞에서 당당히 들어왔지만, 섬을 나갈 때에는 자신의 양심을 버린 부끄러운 손을 가까스로 배 뒤의 작은 기둥을 붙잡고 의지하지 않고선 삶을 지탱하지 못하던 원규"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원규를 비겁하다 비난할 수는 없겠지요. 사람의 본래 모습이 그러하니까요.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진짜 반전은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토록 이성과 합리로 무장하고 정의와 무인정신을 부르짖던 원규역시도 마을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 이 영화가 말하려는 이러한 담론만으로도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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