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언제던가 제작중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을 들었을 때, 난 무슨 코미디 영화를 만드려나 보다. 생각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 있긴 했다.) 좀 더 있으니 제작비가 사상최대란다. 800만 이상의 관객동원을 해야만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어선다는 얘기도 들었다. 게다가 주연은 장동건과 원빈. 솔직히 순간 픽 하고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강제규 감독이 전작 "쉬리"로 한국형 블럭버스터를 선보였으나, 그 이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110억), "내츄럴시티"(70억), "예스터데이"(80억)... 등등 거의 대부분의 한국형 블럭버스터들은 곧 흥행실패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170억의 제작비라니...
장동건은 TV에서라면 모를까 영화판에서 그다지 흥행배우라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는다. "친구"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내가 보기에)유오성과 당시의 국민 정서가 잘 맞아떨어져서이지 결코 장동건의 힘은 아니었다. "해안선"에서 장동건은 나름의 연기 변신을 꾀했었다. 평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변신이 너무 낯설었는지도 모르겠다. - 태극기.. 에서의 장동건은 해안선의 연장선상에 놓인 연기를 보여준 듯 하다. 물론, 한결 업그레이드 된 연기이다. - 원빈은 늘 그랬듯 무난하다.
처음엔 한국영화를 보고 있는 것인가 눈을 의심할 정도의 전투씬이 나를 사로잡았고(그건 2시간 넘게 눈 한번 깜박이는 것이 아까울 정도의 충격과 재미였다), 그로인해 간과했을 스토리나 연기, 그 외 여러 부분을 느껴보기 위해서 두번을 보았다. 이전의 내 예상은 까마득히 잊혀지고(거의 반대가 되어버린) 이 영화의 감동에 푹 젖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교하고 있다. 과연 정말 비슷하게 만들었구나 싶다. 그래서인가.. 영화계 사람들은 헐리웃의 10분의 1 밖에 안되는 제작비로 이 정도의 영화를 만든 것은 기적이라며 호평도 있긴 하지만 그다지 안좋은 비평이 많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들도 좋다는 반응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악평 또한 제법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슷하면 어떤가? 시간의 흐름에 맞춰 채색을 바꿔주는 화면, 사실적이며 스펙터클한 전쟁씬.. 그것들이 모방이라 하여도 모든 것이 그렇지 않나? 모방에서의 창조를 이끌어내어, 청출어람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대부분의 영화 기법들은 서구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던가.
이 영화의 장점부터 얘기해 본다.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지금껏 어떤 한국영화에서도 보여주지 못했던 사실적인 전쟁씬에 있다. 자꾸 비교되는 "라이언..." 에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상당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어떤면에선(특히 음향) 그것을 능가한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이전 국내 전쟁영화들을 떠올려보자. 총맞고 쓰러질 때의 오버액션이나 어설픈 피튀는 장면, 단순한 총포탄 소리. 눈물겹다.
음향효과도 꽤나 좋았는데, 잘 들어보면 전후좌우 나오는 사운드가 각기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 강감독과 스탭들이 이 음향을 내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CG 역시 흠잡을 곳은 없었다고 본다. 비행기 장면을 걸고 넘어가는 사람이 많은데, 생각해보면 외국영화에서도 초대작이 아니라면 그정도 아니었나? 중공군의 참전이나 피난민들의 수많은 인파들 또한 아무리 2만5천의 엑스트라를 동원했다 하더라도 CG 없인 불가능했을 장면이었다. 전혀 CG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장동건은 영화를 거듭할수록 점차 연기에 눈을 떠가는 것 같다. 늘 발목을 붙잡던 잘생긴 외모로 인한 캐릭터의 한계도 이젠 많이 벗어난 듯하다. 영화에서 드라마는 스펙터클과 함께 중요한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데 영화를 직접 본다면 영화내내 눈물 짓고 있는 관객들을 여럿 보게 될 것이다. (남자라고 울지 못할 것은 없지만 난 두번을 보면서도 내내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이러한 드라마에서 절대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장동건을 보며 연기에 많은 발전이 있음을 느낄 것이다.
아쉬웠던 점을 적어본다.
기차에서 아들을 배웅하는 어머니와 영신. 어머니의 연세나 기타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셋트의 효과가 너무 티가 났다. 영신을 연기한 이은주를 보고 따라했으면 좋았을 것을..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순간적으로 감정을 놓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다보니 그 감정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관객 스스로 억지스레 감정을 끼워맞추려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감독판 4시간 분량을 2시간 반으로 줄이다보니 조금은 무리한 편집을 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단점들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난 이 영화를 만족하고 보았고, 단점들은 장점으로 충분히 커버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라 할 두가지만 더 적는다.
처음 보여지는 낙동강 전투에서 그 리얼한 액션에 충격 먹는다. 포탄이 떨어진 직후 흙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리는 서비스다. 마지막이 되는 전투에서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 했다. 물론, 다른 관객들은 거의 울고 있었다. 어찌보면 약간의 신파라 할 수 있을 그 설정이 영화상에선 전혀 신파가 아니었다.
강제규 감독이 "쉬리" 이후 4년반 만에 야심차게 준비한 "태극기..." 어쩌면 너무 헐리웃 영화를 의식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그래서 혹자는 감독에게 헐리웃 컴플렉스가 있다고 한다.) 내가 보아왔던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장동건도 이 영화와 함께 연기의 업그레이드가 되었으니 앞으로 그의 연기자로서의 활동이 주목되기도... 반면에 원빈은 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껏 전쟁영화라 하면 2차대전의 미군과 독일군 또는 일본군. 베트남전에서의 미군과 베트콩들의 전투만을 보아오던 터에 괜찮은 한국전쟁 영화가 반갑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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