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태극기 휘날리며> 강제규 감독, 장동건, 원빈주연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려나. 빨간색, 파란색 이야기는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은 데 말이다. 일단 확실한 건 이 영화, 관객 천만 이상은 확실히 들어간다는것이다.
역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기에는 미학적인 면이나, 연출 부분, 특히 편집 부분에서 큰 단점 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지만, 이 영화는 일반 관객 입장에서 너무나 확연하게 매력적인 영화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 관객층이 영화 한편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녹아들어가 있다. 그것이, 감독의 뛰어난 연출 기량 탓 인지, 감정의 과잉으로 인한 판단 불능 탓인지, 혹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절대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과거의 그늘, 공통된 원죄의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감독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 거리들을 한정된 시공간에 풀어놓았고, 그 때문에 산만한 감은 없지 않으나 관객의 입장에서 절대 소화불량의 수위까지 위협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것이 강제규가 획득한 승리이다. 그리고 강제규는 그에 걸맞는 상업적 성과를 얻어 갈 것이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단점 몇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이 영화의 볼거리는 역시 전쟁의 스펙타클이다. 엄청난 자본의 유입을 증명하듯, 장면 장면 마다 규모의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에서 영향받은 듯한 중공군의 투입 장면 역시 감탄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것이 좀 불편하다. 불편한 스펙타클을 경험해 본 적 이 있는가? 관객들은 우리 가족들의 죽음과 주검들 앞에서 자유로운 사고 기능을 상실한다. 이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문제이다. 팔과 다리가 날라가고, 한국 관객 들이 일찍이 쉽게 경험해보지 못한 갖가지 첨단 고어효과들이 스크린을 점령하는 가운데, 생명을 구걸하는 적군의 피는, 다름아닌 우리와 같은 붉은 색이다.
하지만 이 것이 불편함의 전부는 아니다. 발생하는 문제는 '그림' 만 남아있고 '플롯' 은 완성되지 않은채 정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전쟁터의 화약 냄새라도 풍길 태세의 실감나는 장면들이지만,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지 아니하고 따로 떨어져 존재한다. 일련의 병렬적 죽음의 씬들만을 모아놓은 듯한 느낌마저 던져주기도 한다. 다행히 후반부로 갈수록 원빈의 시선에서 바라본 전쟁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면서, 그나마 일관성 있는 흐름의 사건 전개가 스크린을 점령하기는 하지만, 앞서 멀치감치 끊겨버린 호흡이 회복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부각될 수 있는 편집의 문제가 있다. 이 역시 호흡의 문제와 직결된다. 근 10여년 동안 이렇게 편집 못한 영화는 처음 본 것 같다. 극명한 예로써, 극 초반에 원빈이 장동건에게 되뇌이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같은 대사는, 카메라의 패닝 이나 조금 더 긴 테이크로 관객에서 긴 호흡을 선사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이 것은 흐름의 문제를 떠나서, 자칫 규모의 영화로만 비추어질수 있는 본 작품에서, 드라마를 간과하고 있지 않다는 혈서와도 같은 장면이다. 하지만 우매한 편집으로 인해, 관객은 원빈의 대사가 끊나기가 무섭게 또다른 포탄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이러한 작품이 단순히 2시간 짜리 값비싼 장면의 모임이라는 식의 잔인한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드라마의 완성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생명선이다. 그 생명선이 계산 착오적 편집으로 인해 위협받는 것을 런닝 타임내내 지켜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극 내내 발견되며, 시퀀스와 시퀀스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여 단 한번도 고른 호흡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되느니 차라리 그 간극을 다큐멘터리 화면의 삽입이나, 연대기적 흐름의 방식으로 처리하였다면 더 나은 결과를 보여주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데. 그토록 생뚱맞은 편집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감정의 흐름은 꾸준히 이어진다. 이것은 왠일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배우들의 연기에서 비롯된다. 본 작품은 상황의 비극성을 영화적 형식미 보다는 배우들의 연기에 최대한 의존하고 거기에 힘을 실어준다. 초반에 관객을 울음바다로 몰아넣는 파병장면이 보여주는 감정의 골은, 주인공 형제를 보내야만하는 반 벙어리 노모의 표정과 몸짓에서 기인한다. 또한 극의 몇 안되는 희극적 캐릭터인 공형진이나, 형제가 이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이은주의 죽음 같은 부분은 거의 일백퍼센트 배우의 연기가 슬픔의 기폭제 역활을 한다. 이러한 '눈물' 은 얼마전 개봉했던 <실미도> 가 보여주는 눈물과는 어느정도 차별화 된다. <실미도> 의 허준호가 떨어뜨린 사탕에서 비롯되는 눈물과 <태극기...> 에서 보여지는 눈물은 그 매커니즘 자체가 구별되고 어느정도 평가받아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태극기...> 는 배우들의 연기에 수혜받은 바가 크다는 것이다. 극중 잠시 등장하는 최민식이나 김수로의 연기 또한 튀지 않고 충분히 맛깔스럽다.
그리고 장동건이 있다. 장동건은 아마도 이 작품의 최대 수혜자가 될 듯 싶다. 특히 장동건 이 극 후반에 북한군 깃발부대의 지휘관으로써, 전쟁광으로 변해버린 광기의 이미지는 우리가 알고있는 장동건이라는 배우의 평가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는다. 장동건의 호연을 단순한 감정과잉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할 비관자들도 있겠으나, 장동건은 그때 그때 상황에 걸맞는 충분한 수위의 연기를 잘해내고 있다. 또한 감정의 분출 역시 여러운 연기의 일부인 것이다. 장동건은 앞서, 광기에 사로잡힌 군인의 모습을 연기했던 <해안선> 에 먼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배우는 자기 갈 길을 잘 찾아가고 있다. 좋은 모습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다른 데 있다.
본 작품의 제목은 <태극기 휘날리며> 이다. 60년대 반공영화에서나 찾아볼듯 한 이러한 극우적 성향의 제목은, 그러나 영화의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지는 아니하다. 이것이야 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작품에서 실제로 태극기를 휘날리는 장면은 감독의 독설적 이고 반어적인 메세지가 담겨져 있다. 극우주의자들은 같은 민족이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반목하여 자행한 반 인륜적 행위들, 그리고 그 행위들로 인한 수 겹, 수 십겹, 수백겹의 시체 들 위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다. 언뜻보면 사상 따위는 염두해 두지 않고 형제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춘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사실 어느 한쪽의 색깔에도 적을 두지 않는 지독한 사상영화이다. 도대체 사상 때문에 인간이 핍박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반목 하는 영화이다. 이쪽에서 날아가는 총알에도, 저쪽에서 날아오는 총알에도, 빨간색 파란색이 칠해져 있지는 않다. 우리들과 그네들의 피 색깔은 똑같은 색이다. 우리의 꿈은 푸른 색이고 그네들 의 꿈은 붉은 색이던가. 그것도 아니다. 장동건이 북한군의 장교가 되는 극 종반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더 크게 두드러진다. 무슨 옷을 입고 있던, 무슨 색의 국기 아래 있건, 그들은 사상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단순하고도 극명한 사실이다. 사상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지구상 수억 인구를 죽이고 핍박하고 감금한단 말인가. 전쟁의 스펙타클 속에 가리워진 집단 광기의 공포 속에서 이 영화는 휴머니즘으로의 결말 을 향해 착실히 나아간다.
50년 후 형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동생의 모습을 플래쉬백 하면서, 영화는 종결의 직전에서 다시 한번 더 그 때로 돌아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원빈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그 곳에서 여전히 삶은 지속되고 있다. 원빈은 학교를 다시 다닐 것이고, 어머니는 다시 시장에서 국수 를 팔며 아들의 뒷바라지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 다지 희망적이지 못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찹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가족의 삶이 순탄했으리라 믿는 관객은 아마도 한명도 없으리라. 무공훈장까지 받았으나 순식간에 북괴의 깃발부대 지휘관이 되어 북한의 좋은 광고거리가 되어주었던 형을 가진 동생이, 그러한 아들을 가진 어머니가, 6,70년대 한국 사회를 어떻게 관통하였으리라 생각하는가. 다시 한번 <실미도> 를 떠올려보자. 설경구의 구구절절한 가족사가 생각날 것이다. 빨간색 옷만 입어도 쥐잡듯이 잡았던 그 시절. 그 아픈 시절을 그들은 어떻게 통과해나갔을까. 이 것은 우리 모두의 아픈 기억이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변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아직도 수많은 사상범이 차가운 철창아래서 국가보안법이라는 미명아래 신음하고 있다. 수구언론의 괴수는 "지성 보수인들이여, 대학생들에게 용돈을 끊어라" 라고 강연하고 군사학교의 수뇌는 "60대를 수구 골통이라 몰아부치는 젊은이들아..." 라며 군사정권을 정면으로 미화하고 나선다.
그러한 모든 부조리는 극우주의자들의 집단 광기가 빚어낸 환상과 권력욕에서 야기되었다. 그러한 악마적 권력이 6.25를 낳았고, 군사 독재를 낳았고, 5월 광주의 피를 야기했고, 더러운 권력 자본을 생산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아............................. 영화 한편을 맘놓고 즐기지 못할 만큼, 이 사회는 여전히 부조리 하고, 무겁고 단단하다. (더불어, 모든 것을 사회탓으로 돌리는 나의 유아기적 음모론도 문제다.)
아무튼 확실히 이 영화는 몇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웰메이드의 반열에 오를만한 작품이다. 강제규의 대표작은 <쉬리> 에서 <태극기....> 로 이동할 것이며, 그만큼의 위상도 오를 것이다. 더군다나 기술적 측면이나 스펙타클 부분에서도 결코 헐리우드 대자본 영화에 꿀리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드라마가 죽지 않았고, 드라마의 중심축 또한 범 지구적인 정서에 부응 하는 형제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해외의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어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좋은 결과물에 대한 제작진에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얼마전에 강제규 필름과 명 필름이 합병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명 필름의 정서가 강제규 필름과 어떻게 화합하고 부응할련지는 모르겠다. 단 한가지 바램 은 강제규가 다음번에는 '작고 미니멀한 영화' 를 통해서 연출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는 것이다.
부디 다음 번에는 확실히 '작가' 로써의 위상을 확립하시길.
ps: 북한군 포로끼리 싸움 붙이는 장면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에 대한 명백한 오마쥬던데... 초심으로 돌아가서 호러물 하나 찍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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