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가 친구의 흥행기록을 깨고, 천만명 관객동원을 향해가고 있는 요즈음 190억의 자본이 투자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가 드디어 개봉을 했습니다. 많은 관심과 기대속에 뚜껑이 열린 태극기 휘날리며는 지금까지 제작된 그 어떤 한국영화보다도, 전쟁영화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정말 위대한 영화였습니다. 비록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한국사람이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두 형제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다루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의 참혹함을 반감시켰다든지, 강제규 감독이 작정하고 관객들에게 슬픔을 전달하려고 했다든지,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인 장면이 많다든지,두 형제와 한 가족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려다 보니 한국전쟁에 대한 객관적 시각보다는 반북적인 요소가 있다든지, 보도연맹사건을 잘 모르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놓칠 수 있는 등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문제점이나 다른 분들이 느끼신 문제점이 더 있다 하더라도 태극기 휘날리며는 훨씬 이전에 제작되었어야 할 위대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슬펐습니다. 누구에게 총을 쏘던, 누구에게 폭격을 하던 죽고 다치는 것은 전부 우리 민족성원이었습니다. 5천년 역사를 같이해온 하나의 민족이 서로에게 총을 쏘고, 칼로 찌르고, 폭격을 하고, 치고 받고 싸우는데 어찌 슬프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전국민 모든 분들에게 이 영화를 꼭 보시라고 추천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이 땅에서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전쟁 반대를 할 것이며,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듯이 아무리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해도 이라크 민중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파병을 전국민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보는 내내 가슴이 에이는 슬픔과 아픔을 느끼게 해준 정말 위대한 영화입니다.
*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영화를 감상하시면 훨씬 더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영화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도연맹사건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함께 싣습니다. 꼭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요약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1949년 조직된 단체.
설립연도 : 1949년 6월 구분 : 반공교화단체 설립목적 :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 주요활동 : 반공운동 및 국가보안법 운용 대책 마련 규모 : 30만 명(1949) [반이상의 사람들이 학살]
1949년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단체로,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다.
1948년 12월 시행된〈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결성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체제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대한민국정부 절대 지지, 북한정권 절대 반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사상 배격 ·분쇄, 남 ·북로당의 파괴정책 폭로 ·분쇄, 민족진영 각 정당·사회단체와 협력해 총력을 결집한다는 내용을 주요 강령으로 삼았다.
1949년 말에는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고, 서울에만도 거의 2만 명에 이르렀다. 주로 사상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거의 강제적이었으며, 지역별 할당제가 있어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6·25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고, 이는 곧 북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 와중에 조직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정확한 해명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승만의 좌익 컴플렉스는 지독했다. 46년 10월봉기와 47년 2·7투쟁, 48년 제주 4·3봉기를 유혈진압하고 단독정부 수립에 성공한 이승만은 그해 10월 여순사건을 다시 무력진압한 후 더욱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좌익소탕작전에 나서게 된다. 특히 그는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상쇄하기 위해 정치적 반대세력을 무조건 좌익으로 몰아 처단하기에 이른다. 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49년 한해동안 무려 11만8,621명을 이 법에 의해 체포하거나 처형했고(‘6·25살상’다시본다, 권영진, <역사비평>90년 봄호), 49년 10월에는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어 전국에서 30만명을 여기에 가입시킨다.(파스칼대백과사전) 보도연맹 결성목적은 전향한 좌익세력을 통제·회유하는 것이었으며, 활동목표는 대한민국정부의 절대지지, 북한괴뢰정권 절대반대와 타도, 공산주의사상 배격·분쇄 등의 강령으로 요약된다. 강령에 따라 보도연맹 참가자들은 전향의 진실성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여 밀고하고 자수를 권유하는 등 반공활동을 하기도 했다. 또 49년 11월부터는 미국의 협조를 얻어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이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도 무수한 사람들이 빨갱이 협조자·동조자라는 이름으로 희생됐다. 이승만 정권의 이같은 노력으로 한국전쟁 이전까지 한국의 좌익조직은 거의 와해됐다.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와 국군은 사흘만에 서울을 버리고 후퇴하면서 한강철교를 폭파함으로써 순진하게 정부 발표를 믿은 서울시민들을 고립시킨다.
[왜 얼마나 죽였나] 7월 14일 맥아더에게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한 후 이승만 정부가 취한 행동은 경찰과 CIC(특무대)를 중심으로 후방에서 정치적 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치적 공세는 전쟁 전부터 계속해온 좌익과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의 연장이었고, 이 과정에서 또다른 희생이 초래됐다.(권영진의 글) 이에 따라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이 서울을 제외한 남한전역에서 벌어진 보도연맹원 집단학살이다. 서울은 사흘만에 점령당했기 때문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선, 보도연맹은 좌익이 아닙니다. 정확한 이름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과거 좌익을 우익으로 계도(?)하던 조직입니다. 해방 후, 좌우 대립이 심했고, 북에서는 토지를 무상분배하면서 인기가 많았던 데 비해 인기가 없던 이승만 정권은 반대세력을 줄여보고자 만든 것이지요.
하지만 보도연맹원 수가 많지 않자 중앙에서는 지역에 할당을 주어 연맹원 수를 늘리게 했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각급 기관은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죠. 이렇게 하여, 좌익과 무관한 사람들이 대거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됩니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중에는 관에서 하는 것이라니 무슨 감투인 줄 알고 가입한 이도 있고 밀가루 배급해준다고 하여 가입서에 도장 찍은 사람도 있고 또는 동네 이장이 마을 사람들 이름을 죽 적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학살당한 이유는 한국전쟁 발발 후, 혼자 살겠다고 한강다리 끊고 도망가던 이승만이 보도연맹원들이 북쪽에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원 학살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미연에 불씨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설사 학살당한 이들 중에 좌익이 있었다고 해도 적법한 절차없이 학살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