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광기가 몰고 간 전쟁의 잔혹함!
걱정과 불안이 있었다.
이미 역사를 살짝 비꼰 실미도는
관객을 끌어 들일 수 있는 흥행적 요건만 강조했기에 관객을 실망시켰다.
더욱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제2의 감성은 자극하지 못한 채
열렬한 매스컴의 찬탄은 줄을 이어 일어나니 모종의 음모가 있다고 해도 믿을 성 싶었다.
그래서 ‘태극기 휘날리며’도 그런 매스컴의 힘만을 등에 업고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있었다.
왜냐하면 분명 7000원은 가난한 직장인에게 거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 컴컴한 어둠 속에 빛을 발할 때
관객의 눈동자도 비례적으로 점점 빛을 발하니 아마도
그런 걱정은 어리석었던 것 같다.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전쟁의 잔혹한 광기가 담겨져 있다.
전쟁에 참여한 대다수의 군인들에게 있어 우익과 좌익은 편을 가르기 위한 조건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 목적은 나라를 위해 통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험악한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두 형제도 마찬가지다.
동생을 위해 전쟁에 참여한 형에게 있어 유일한 목적은 태극훈장이다.
그것만 있으면 동생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기에
형은 북한군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하지만 그 총부리에 핏방울이 점점 짙게 스며들수록
형은 전쟁의 참혹한 상황을 벗어던지기 위해 잔인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살인이 영웅으로 승격화 되자
형은 모든 북한군을 죽일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생겼고
자신의 가족과 나라를 지킨다는 대의명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허망한 대의명분은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버리자 아무런 정당성을 찾을 수 없었다.
도리어 그가 전쟁에서 배운 광기만이 본능처럼 남아 그의 삶을 지탱했기에
이젠 총부리를 국군에게 돌리는 것도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전쟁에 남아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뿐이지
나라를 위한 애국심은 그 어떤 곳에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나라가 국민의 행복을 져버리고 자신만의 이득을 찾으려 하자
국민인 개개인은 나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길 잃은 자처럼 방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매력은 그 광기에 휩싸인 개인의 상처에 있다.
전쟁이라는 것은 승리와 패배만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승리와 패배 속에 희생된 개인의 슬픔만이 깃들어있다.
즉 적당한 감성과 잔혹한 이기심을 적절히 조합한 것이다.
영화는 관객이 감탄을 지를 수 있는 요소를 여기저기 마련해 놓는다.
우선은 전쟁씬인데 과연 한국에서도 이런 장면이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팀이라서 그런지 생생한 전쟁묘사는
관객을 두렵고도 호기심 있게 만든다.
여기저기 튀기는 파편 속에 사지가 절단된 모습들과 떨어진 팔과 다리,
흥건히 배여 있는 피투성이 흙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군인들,
불꽃 튀며 날아다니는 총알들은 스크린을 뚫고 관객의 가슴을 노리고,
전쟁터에서 상대를 향한 과격한 몸놀림은
전쟁의 폭력적인 실상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한다.
또한 감독은 흥미로운 전쟁씬이 영화의 전반을 차지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즉 육이오가 전하는 역사의 고통을 들려주는 것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처음 장면에 형제가 보인 사랑스러운 우애와
가족의 행복한 정경들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지는 과정을 투박하면서도 고통스럽게 묘사한다.
더욱이 전쟁의 광기가 인간을 미친놈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을 인지시키고
그 잔혹함이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와 관객의 눈시울을 젖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선택된 배우들에게 의심이 들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을 느꼈다.
어깨에 뭔가 힘을 뺀 듯한 자연스러운 장동건의 연기는
아마도 여기서 절정을 맞은 듯하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동생을 살려내기 위한 고통의 흔적은
그의 눈빛과 동작에 서려 관객을 깜짝 놀라게 했고,
약한 듯 하면서도 결국 강한자로 돌변하여 형을 이해하는
원빈의 연기는 충분히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물론 그렇다고 영화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형이 전쟁의 광기 속에 동참하는 내용은 템포가 빨라 조금은 억지스럽고
약한 동생이 전쟁 속에 살아남은 모습도 미심쩍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 이영화의 단점으로 밀어 넣을 수 없는 것은
관객이 지루함과 어리석음을 느끼기 전에 단호하게 끊어버린 감독의 실력 때문이리라..
하여튼 육이오의 전쟁터가 이렇다면
정말 우리 어르신들은 오랜 시간을 번뇌와 고통 속에 살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 같으면서도 서정적이고 그러면서도 스케일이 무척 큰 영화라
몇십 년전의 슬픔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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