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나는 퓨전 역사 코미디’
영화 [황산벌]이 내세우는 홍보 카피다.
단도직입으로 얘기하면, 영화 [황산벌]에는 신명도 없고, 퓨전도 없으며 역사도 없고 코미디마저 없다. 물론, 영화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지나친 기대에서 오는 허무감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영시간 30분을 넘도록 허무감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그 허무감을 달래려는 의도였는지 걸죽한 욕들이 영화의 전반부에 자주 노출 된다.
심리전이라는 타이틀로 시작되는 병사들 간의 욕지거리 전투에서 욕의 수위는 극을 달린다.
하지만, 토속적인 사투리의 정감이 살아있는 욕설이 아닌, 누가 더 잔인하고 지저분하게 욕을 하는 지가 승부의 관건이 되는 전투는 쓴 웃음만을 유발시키고, 치부를 드러낸 지저분함에 구토를 해대는 백제군 병사를 볼 때엔 웃음을 강요한다는 인상마저 받게 된다.
그 위기를 승기로 전환하기 위해 등장하는 구원병사 3인방이 있으니 이들이 벌교출신 3인방이다. 질펀한 전라도 욕을 들을 때 웃음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정지역을 거론하며 웃음을 유발시키는 것은 우리의 오랜 과제인 지역감정을 들추어내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아무튼, 벌교 3인방의 뇌설적인 욕설에 신라군이 귀를 틀어막고 쓰러지다 도망치는 장면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 영화가 삼류 슬랩스틱 코미디로 전환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으로 보인다.
영화가 가지는 힘은 다양하게 표출될 수가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투철한 반공사상에 찌든 우리들에게 이데올로기를 넘어 선, 조심스런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다큐멘터리 [영매]는 무당을 신비한 영적인 능력이나 구태의연한 미신이라는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희노애락을 나누며 존재하는 인간으로 다가서게 했다.
애초 [황산벌]이라는 영화가 사투리의 양극단을 이루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코믹한 소스를 통해 거창하지는 않아도 소박함이 묻어있는 이해와 화합을 이끌어내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사투리라는 코믹성을 위해 지역정서 따위야 어떻게 묘사되든 상관없다는 듯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 한 때 야구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응원대결은 시대성과 무관하게 동일한 형태로 백제와 신라의 응원전에서 그대로 반영되어지며, 카메오로 출연한 배우들이 자신들의 사투리로 신분이 노출되자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날라드는 발길질에 죽어나가는 장면에서는 오래지 않은 선거유세가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어차피 전라도와 경상도로 대표되는 두 나라의 사투리가 코믹적인 핵을 이루고 있다는 자위적인 전제의 뒤 편에는 영화의 종결에 이르러 역사적인 해석을 달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깊이 패인 골에 몇 줄기의 단비와 같은 화합을 보여주리라는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계백의 처연한 죽음에서 그 어떤 예우는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무소불위의 당나라 사령관인 소정방의 탁자에 칼을 꽂는 김유신의 호연지기는 범 민족적인 호방함과는 거리가 먼 치기어린 개인적, 혹은 지역적 자존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뿌리가 같은 민족끼리의 비참한 전투가 전부 당나라의 농간때문이라는 떠 넘기기 태도로 무책임함을 드러내 마지막 감동의 힘마저 비관과 체념의 나락과 맞바꾸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얘기처럼, 감독은 [황산벌]을 통해서 지금의 시대상을 반영한 듯 보인다.
당의 힘을 빌어 백제를 견제하는 신라가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식들의 안위를 위해 정사요직에 자리를 마련하는 의자왕의 모습 또한 현 정, 재계의 모습일 수 있다. 처, 자식을 죽이는 각오로 전투에 임하는 계백의 모습이 실업과 고물가에 분개하여 투쟁하는 노동자와 실업자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어찌 부인할 수가 있겠나 싶다.
하지만 신명나는 코미디를 표방한다면 풍자 섞인 기지로 해학의 묘미를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둬야 하지 않았을까?
[봉산탈춤]에서 부패한 양반을 혼쭐내는 말뚝이의 후련한 춤사위가 없다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죠수아를 위해 비참한 수용소의 삶을 재미있는 게임으로 만드는 귀도의 유쾌함이 없다면 관객은 무엇으로 냉소적인 현실에서 찰나의 기쁨을 맛볼 것인가.
문제의식을 끄집어 내는 것은 [PD수첩]이나 [그것이 알고싶다]같은 시사전문 프로그램으로도 충분한 세상이다.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논점에서 문제를 나열하는 방식만으로는 본연의 임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도 없는 ‘신명나는 코미디’ 영화라면 말이다.
이제 [황산벌]의 역사적인 면을 놓고 말을 해보자.
솔직히 이 부분을 언급한다는 것은 스스로 꽉 막힌 사람이라고 떠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못 말리는 람보]를 보며 실제 베트남 전쟁과 비교하여 평을 하지 않는 것처럼, 퓨전 역사 코미디인 [황산벌]을 놓고 역사적인 해석을 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폭력과 다를 바 없다.
그럼, 어떻게 역사적인 부분을 논할 수 있을까?
[황산벌]은 코미디 영화라고 하기에는 무시하기 힘든 진지함이 배어있는 영화다.
주연 배우들의 무거운 진지함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박중훈 특유의 ‘진지함 뒤에 바로 이어지는 익살스러움’에 익숙한 관객들은 그의 서슬퍼런 눈빛연기에서 당혹감을 감지하며, 저음의 음성으로 시종일관하는 김유신 장군의 의젓함 앞에서는 약간의 부담마저 떠안게 된다. 하나 둘 죽어나가는 화랑들의 처연한 희생에서 숭고한 종교의식과도 같은 경외감이 들 때에야, 사뭇 진지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지만, 이미 관점을 바꾸기에는 영화의 주변적인 요소들이 심한 불쾌감을 안겨준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흘러나오는 ‘밥묵자’라는 BGM은 혹시 내가 [브레이브 하트]를 보고 있나 싶을 정도로 스코틀랜드의 전통음악과 닮아있고, 비장한 라스트 씬에 이어 소위, 문학의 수사법상 돈강법처럼 묘사되는 백제병사와 어머니의 극적인 상봉은 그 표현의 진부함을 씻어낼 수가 없다.
이와 더불어 엔딩 BGM으로 나오는 ‘야야야’는 보사노바의 형식으로 도입부를 시작하다가 레게라는 음악양식으로 ‘퓨전 역사 코미디’의 완성을 이룩해낸다.
이것이 영상과 음향의 충돌로 인해 새로운 자각을 일깨우려는 감독의 몽타쥬 이론이었다면 더 할 말이 없겠지만, 퓨전이라는 솔깃한 카피를 만들기 위해 의도했다면 용서가 안 된다.
이렇게 정서적 무국적성 속에 진행되는 [황산벌]에는 이해하기 힘든 설정이 몇 가지 있다.
김유신은 언제 비가 올지 염두에 두고 병사들로 하여금 고령토 덩어리를 만들게 하는데, 신경통 환자들을 몇 차례나 종용하는 것으로 봐선 그 반전의 묘미가 제법 짭짤할 듯 싶다.
드디어 비가 오자, 예의 고령토 덩어리들은 투석기를 통해 백제군을 집중공략한다.
비가 그치고 쨍쨍한 햇볕이 들자 고령토 덩어리는 바싹 굳어버린다.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혹은 시각적인 해석의 부진함이 발견된다.
영상으로 보기엔 전혀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데도, 백제군들은 아교라도 칠해진 듯 갑옷을 벗기 위해 안간힘들을 쓴다. 전투에서 지략적으로 승기를 뺏는다는 반전의 묘미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기에는 그 시각적인 표현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장면이다.
이런 표현력의 세심함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몫을 하기 마련이다.
[반지의 제왕]과 [황산벌]을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지 모르나, 어떻게 수레전차를 밀어붙여 성문을 부수는 데 성문의 나무가 반듯하게 일자로 부서질 수가 있는가.
작은 나무 젓가락 하나도 예리한 결을 이루며 부서지기 마련이거늘, 그것도 두개의 성문이 하나같이 톱으로 자른 면이 나오도록 영상에 담아낸 것은 연출력의 대담함인가? 소품의 모자람인가? 차라리 백제군의 리모콘을 빼앗아 성문을 열어 젖힌다면 ZAZ사단의 깜찍함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신명나는 퓨전 역사 코미디’라는 어정쩡한 홍보 카피처럼 [황산벌]은 코미디도 아닌 역사물도 아닌 퓨전도 아닌 영화가 되고 말았다.
코미디라고 하기엔 너무나 진지한 눈빛과 처연한 장면들이 즐비하고, 시대상을 반증하는 역사물이라 하기엔 영화의 히든카드인 사투리가 양날의 칼이 되어 스스로를 자해한다.
이런 모든 핸디캡을 벗어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황산벌]의 홈페이지에는 ‘[간첩 리철진]과 [달마야 놀자], [아나키스트]를 제작했던 씨네월드 작품!’, ‘[간첩 리철진]과 [달마야 놀자]의 이준익 감독’이라는 말이 명함격으로 내세워 진다.
물론, [간첩 리철진]과 [달마야 놀자]의 감독은 이준익이 아니다.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은 이 두 영화의 제작자였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제작이라는 말을 살짝 숨겨둠으로써 잘 모르는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인하는 미끼로 두 영화의 명성을 이용하고 있다.
이준익 감독은 1993년 [키드캅]이라는 기억도 가물거리는 작품을 단 한번 연출했을 뿐, 이렇다 할 작품은 없는 셈이다.
감독의 경력이 영화와 필수적인 상관관계를 가질 필요는 없지만, 영화의 흥행에 눈이 멀어 관객의 눈마저 가려버리는 글 장난은 없어야겠기에 굳이 달게 되었다.
“누가 감독이라고 했나? 감독이라는 말은 없잖아!”라는 무책임한 변명은 더 이상 싫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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