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감독은 날라리 대학생 같아요. 용돈이 많을수록 기쁜 학생처럼 제작비도 많을수록 좋죠. 구현할 영역의 폭이 훨씬 넓어지니까요.” 650억 원이 투입된 대작인 디즈니+ <무빙>을 연출한 박인제 감독의 말이다. CG와 와이어, 특수효과의 도움을 받아 한국형 히어로물을 완성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감독을 만났다. <무빙>의 관점 포인트로 멜로, 액션, 가벼운 코미디까지 ‘모든’ 장르가 다 포함된 다채로운 맛을 꼽는다.
<무빙>은 디즈니+의 한국 론칭 이후 최고 히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소감 한 말씀!
작품의 히트 여부를 미리 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랬다면 망하는 작품도 없겠지. (웃음) 사실 영화든 시리즈든 작업이 끝나면 다시 안보는 편이다. 부족하고 부끄러워서 그렇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최대한 관심두지 않으려 한다. 이번 <무빙>도 마찬가지다. 반응이나 리뷰 등을 잘 안 찾아보지만, 그래도 좋게 봐주시는 분이 많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연출 제안을 받고 어느 면에 끌렸는지.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각본을 받았었다. 그래서인지 가족 이야기라는 점에 우선 끌렸고, 또 새로운 시도가 많아서 좋았다. 하늘을 나는 등 초능력 히어로 이야기가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흔하지만, 국내에서는 드문 이야기 아닌가. 여러 면에서 도전할 가치가 있겠다 싶더라. 과연 해보니 하나씩 그림을 그려 나가는 작업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조인성, 한효주, 류승룡 배우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감독으로서 무엇보다 든든했을 것 같다.
운이 좋은 덕분에 영화 때부터 초호화 캐스팅을 쭉 했었다.(웃음) (기자 주: 영화 <모비딕> (황정민), <특별시민>(최민식)) 이번 캐스팅은 ‘스타’라서가 아니라 너무 연기를 잘하는 배우와 함께라서 좋았다. 주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는 물론이고, 유승목, 김종수, 전석호 배우까지 너무 잘 해줘서 고마울 뿐이다.
오리지널 캐릭터, 다시 말해 원작인 웹툰에는 없는 캐릭터인 ‘프랭크’와 류승범 배우의 캐스팅이 신의 한수라는 평이 많다. 그만큼 초반을 흡인력 있게 견인한다.
원래 설정은 프랭크가 백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술을 익혀서 액션 연기를 하고 여기에 한국말도 어설프게 할 수 있는 백인을 캐스팅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겠더라. 몸값이 높은 배우가 와야 캐릭터를 살릴 것 같은데 알다시피 예산은 한정돼 있으니… 고민하던 중 류승범 배우를 떠올렸다. 강풀 작가가 류승완 감독과 친분이 깊은 데다가 류승범 배우는 뭐랄까 무술팀이 제일 존경하고,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 1순위라 역할에 적합하다 싶었다. 마침 류승범 배우 역시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나처럼) 가족 이야기에 끌렸던 것 같다. 류 배우는 정말 타고나길 멋있다. 그냥 주막 한 번 날려도 폼이 난다.
일명 ‘아기 3인방’인 정원 고등학교 세 친구 ‘희수’(고윤정), ‘봉석’(이정하), ‘강훈’(김도훈)의 캐스팅 역시 성공적이다! 비결이 있나. (웃음)
그간 최민식, 황정민, 주지훈 배우 같은 약간 거친 느낌의 사내들과 작업한 터라 20대 배우들에 대해 잘 몰랐다. 젊은 배우와 함께 작업해 본 경험이 영화 <특별시민> 때 심은경 배우밖에 없기도 하고! 예전에는 신인을 캐스팅하기 위해 대학로에 나가 연극을 보곤 했는데 이제는 세태가 달라지지 않았나. 그래서 웹드라마를 보며 20대 배우를 거의 다 살펴봤었다. 당시에 봤던 배우 중 많은 분이 지금 잘 되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더라. 캐스팅할 때 리딩이나 연기는 시키지 않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중요하게 본다. 최종 후보로 올라온 배우들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이 과정에서 캐릭터와 겹치는 지점이 많은 배우를 캐스팅한다. 사실 캐스팅이 거의 다라고 생각한다. 잘하는 배우들을 캐스팅하면 현장에서 크게 할 일이 없거든.
옆에서 보니 ‘의외더라’ 하는 배우를 꼽는다면.
글쎄, 선입견을 갖지 않는 편이라 ‘의외’라고 할 여지가 없기도 하고, 또 평소 여자 배우들은 접근이 쉽지 않아서 잘 모른다. 다만 한효주 배우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아주 성실하고 한결같아서 좋았다. 촬영이 너무 길고 힘드니까 뭐랄까 사기진작 차원에서, 예전 여름 성경학교에서나 할 법한 마니또 게임을 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시작해서 12월 31일에 발표하기로 했는데, 이때 한효주 배우가 (마니또) 상대에게 너무 성심껏 잘하더라.
20부작은 좀 길다는 시선도 있고, 또 누가 봐도 후속 시즌을 예고한다는 평이다. 결정된 바가 있는지.
시즌2 여부는 내 몫이 아니다. (웃음) 알다시피 ‘브릿지’, ‘타이밍’ 등으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강풀 유니버스라 작가님이 글을 써야 후속편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제작 여부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이긴 하다. 길다고 하지만, 각본 자체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각본을 받고 ‘시나리오는 사용 설명서 같아야 하는데 설계도 같아 놀랐다’고 밝힌 바 있다. 어떤 면이 그런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작가님은 각본이 처음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용설명서와 설계도가 무엇이 다른 지 생각해 봐라. (웃음) 마치 뜯어봐야 알 수 있는 설계도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각본집이 나중에 나온다면 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거다.
원작자가 각본을 직접 쓴 만큼 디테일한 글이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연출자의 운신 폭이 좁을 것 같은데 어떤가.
작가님이 여지를 많이 줬고, 나 역시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해서 이해의 폭이 컸다. 작가와 감독의 의견이 항상 똑같을 수 없고, 의견이 100% 일치한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각기 다른 위치에서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연출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20부작의 풀 콘티가 성경책 두께로 약 3권 정도의 분량일 정도로 방대했다. 동선의 가능 여부, 대사 등에 관해 수시로 의논했었다. 또 액션 시퀀스 같은 경우, 대표적으로 프랭크의 운전씬, ‘장주원’(류승룡)의 여관방 액션, 원테이크 장면 등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라 연출적으로 구현한 장면이다.
강풀 작가와 정서적인 유대감은 어떤 편인가. 통하는 구석이 많은지. (웃음)
아재 감성이 닮았다. (웃음) 다행히 또래라 문화적인 경험과 정서에 있어 공통 분모가 있다. 평소 멜로 영화를 잘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포맷이 있는데, 영화 <101번째 프로포즈>, <노팅힐> 등 너드와 공주님의 러브라인을 좋아한다. 희수-봉석, 미현-두식에도 이런 면이 투영된 것 같다.
자녀 세대(현재)에서 부모 세대(과거)로,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구조와 캐릭터 하나하나 소개하는 구성이 특이하다. 또 봉석이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부양한다는 설정은 학원물의 상큼함을 더하는데, 추가된 설정이라고.
구조와 디테일한 복선은 이미 각본에 충분히 나와 있어서, 이를 어떻게 잘 구현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다만 봉석이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부양한다는 설정은 각본엔 없었고, 그냥 ‘남자가 난다’ 이 정도로 표현돼 있었다. 그간 멜로는 내가 고려해 본 장르는 아니었지만 봉석과 희수, 미현과 두식의 카테고리 안에서 사랑을 느낄 때 부양하는 건 어떨지 아이디어를 내 봤다. 원래는 두식과 미현의 키스신 또한 유머러스하게 넘어가는 설정이었는데, 이를 봉석의 부양과 연결지어서 로맨틱(?)하게 그려본 거다.
인트로 시퀀스가 없는 점과 각 에피소드마다 ‘무빙’이라는 제목의 스타일과 디자인을 달리한 점도 독특하다.
각화의 ‘무빙’ 타이틀은 해당 에피소드의 내용과 연계되어 있다. 보통 OTT 시리즈의 경우 공통 인트로가 있고 이를 건너뛰기 가능하게 해놨는데, 우린 이런 인트로가 없다. 그 비용으로 차라리 타이틀에 의미를 두고 힘을 주자는 생각으로 시도해 봤다.
희수의 17 대 1 싸움씬을 비롯해서 지하 수로 추격씬 등 액션에 호평이 많다.
액션 연출은 초보와 마찬가지인데, 개인적으로 이야기와 캐릭터의 감정이 묻어나는 액션이 좋은 액션이라고 생각한다. 캐릭터가 이기고 지는 이유, 감정의 시발점은 어디이고, 이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며, 연출자로서 캐릭터의 감정을 액션 안에 녹여내려 했었다.
수위가 상당히 센 편이다. 장주원 에피소드와 프랭크가 관여하는 몇몇 장면이 특히 그렇다.
주원은 재생 능력을 지닌 캐릭터라 이를 표현하려면 태생적으로 어딘가 찢어져야 했다. 개인적으로 무언가 부닥쳐서 나는 이상한 느낌을 유도하려 했다. 무슨 말이냐면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프랭크가 등장해서 갑자기 잔인한 장면으로 전환할 때의 낯선 이질감 말이다. 청춘 로맨스에서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서 피 튀기는 킬링의 장면이 나오는 등 정반대의 정서와 그림의 상충을 표현해 봤다.
애정하는 에피소드를 꼽는다면.
모든 작품은 헤어진 여자친구라는 생각이다. 촬영할 때는 너무 사랑하지만, 끝나고 나면 다시는 안 보는 편이다. 이건 단편 때부터 그랬다. 내가 찍은 걸 보는 게 너무 창피한 거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아니까, 내가 너무 투영돼서 보기 힘들다. 애정하는 에피소드는… 모든 에피소드다.
마지막 질문이다. <무빙> 같이 큰 스케일과 예산이 투입된 작품을 만들며 많은 걸 배웠겠다.
정말 너무 많이 배웠다. 이렇게 긴 호흡의 드라마도 처음이고, 물리적으로 이렇게 많은 CG 작업도 처음이다. 와이어 작업도 정말 많이 했다. 제일 중요한 건 배우를 얻었다는 점이다. 항상 작품을 통해 배우와 인연을 맺고 교류를 쌓는 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2023년 9월 26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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