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무너지고 싶지 않아 그냥 버틴 것 같아요.” 30년이 넘는 연기 인생 처음 <길복순>으로 본격적인 액션 연기에 도전한 전도연의 소감이다. 국내 영화의 경우 여성 액션물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편이고, 게다가 ‘전도연’이 그 주인공이라면 더욱더 기대치가 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해내야지’ 싶었다는 전도연. 연출을 맡은 변성현 감독이 혹독할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배우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전도연은 <길복순>을 “단비 같은 영화”라고 말한다. 상업적인 성공에 목마를 때 갈증을 잠재울 시원한 물 한 잔 같은, 어떤 물꼬를 터 준 작품인 까닭이다. 이후 오랜만에 찍은 로코 <일타 스캔들> 역시 시청자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로 남고 싶다는 전도연을 만났다.
# 복순도 행선도 그리고 전도연도 ‘서툰’ 엄마
변성현 감독이 ‘전도연 선배 맞춤’ 영화라고 표현했는데…
사실 시나리오를 읽기도 전에 결정했었다. 나를 두고 써보고 싶다고 해서 너무 반갑고 감사했지. (웃음) 엄마와 딸, 모녀 이야기에 액션이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막상 글을 받아 보니 액션 비중이 커서 놀라긴 했었다. 킬러가 주인공이지만, 표현이나 상황이 마치 영화(엔터)업계랑 비슷해서 무늬만 바뀐 듯했고 이야기 자체로만 보고자 했다.
중학생 딸 ‘재영’(김시아)을 둔 엄마 ‘복순’(전도연)과 마찬가지로 실제 중학생 학부모 아닌가. 엄마로서 복순과 싱크로율은 어떤가.
감독님이 모녀 관계에 대해 잘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 우릴 지켜(?)보기도. 덕분에 우리 모녀의 대화 그대로는 아니지만, 엄마와 딸의 관계성은 잘 반영된 것 같다. 가령 ‘입닥’하게 하는 부분 등? (웃음) 아이가 어렸을 때는 엄마의 판단과 행동을 무조건 지지했다면 자아가 생기며 스스로 판단하지 않나. 사춘기이기도 하고. 이런 부분이 비슷하다.
“살인은 심플해”라며 살인보다 양육이 힘들다는 복순의 명대사가 있다. 공감되든가.
살인을 연기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면 일면 동의한다. 양육은 정말 심플하지 않고 명확하지 않은 데다 계속 진행형이라 더욱더 복잡하고 힘들다는 생각이다. 연기는 심플하지 않아도 ‘끝’이라는 게 있지 않나.
딸 재영과 엄마 복순은 서로 말 못 할 비밀을 품고 있는 데다 복순은 살인과 양육을 병행하는 모순적인 캐릭터다. 평범하지 않은 관계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보통의 경우 엄마는 희생적인 캐릭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복순이 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길복순>은 엄마는 엄마대로 딸은 딸대로 자기 길을 선택한다는 점이 좋았다. 각자 비밀이 있던 모녀가 어느 순간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되는데, 이후 재영과 복순의 관계가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비밀의 고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관계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접근했던 것 같다.
복순이 정성스럽게 베란다 정원의 식물을 가꾸는 모습도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한 광경이다.
복순이 핏빛 세계에 속했다면 딸은 그린 세계, 그러니까 자기가 속하지 않은 세상에서 키우고 싶은 바람을 표현한 거다. 보면 알겠지만, 그린과 레드가 자주 대비되는데 그린은 복순이 보고 싶은, 다시 말해 꿈꾸는 세계라고 감독님께 나중에 들었다.
드라마 <일타 스캔들> ‘행선’(사실은 이모)에 이어 ‘복순’까지 학부모 모임에 나가고 사교육에 전전하는 등 아주 현실적인 엄마를 그렸다. 행선, 복순, 그리고 전도연까지 엄마로서 공통점이 있다면.
음… 서툰 엄마라고 할까. 이모로서 엄마의 역할을 찾아가는 행선이나 딸과 대화하며 말문이 막히는 복순이나 엄마로서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그 방식을 잘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 역시 아이가 어렸을 때 엄마로서 크게 능숙하지 못했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복순이나 행선처럼 학부모 모임에 참여해 정보를 수집하고 따라가려고 노력했었다. (웃음)
# ‘엄마가 무슨 액션 하냐고’ 딸이 무시했지만
딸은 <길복순>을 봤는지? 청불이라.
보고 싶어하지만, 아직 못 봤다. ‘재영’은 자기 이름이기도 해서 특히 궁금해했거든. 내가 액션한다고 할 때 ‘엄마가 무슨 액션을 하냐’고 그 누구보다 무시한 일인이다. (웃음)
액션을 해보니 어떻든가.
솔직히 안 맞았고, 힘들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악바리 같은 근성으로 버틴 것 같다. 촬영하면서 육체적으로 한계가 오고 또 해도해도 안 된다는 좌절을 오가며 해낸 것 같다. 무너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냥 버틴 거지. 사실 국내 영화 중 여성 액션물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데다, ‘전도연’이라고 해서 더 낮아질 것 같아 이를 악물고 ‘해 내야지’ 싶었다.
사전에 식단 관리도 철저히 했다고.
감독님이 근육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웨이트를 했는데 단시간에 생기지는 않는다고 하더라. 그래도 액션 연습하는 동안 술도 끊고 단백질을 섭취하며 근육을 늘리려고 했다. 감독님이 가이드 사진을 주셔서 거기에 최대한 맞추려 했다. ‘희성’(구교환)과의 짧은 베드씬에서 등 근육이 나와서 그때까지 관리했었다.
특별히 힘들었던 장면과 마음에 드는 장면을 꼽는다면.
다 힘들었지만, 오프닝씬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처음으로 촬영한 장면이라 연습을 오랫동안 했음에도 막상 실전에서 하니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더라. 연습실과 현장의 간극에 참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장면이다. 황정민 배우는 특별 출연임에도 액션에 일본어에 정말 준비할 게 많았다. 4일 안에 끝내야 해서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내 욕심에 계속 갈 수도 없으니 말이다. 마음에 드는 장면은 중반부 킬러들이 모인 상가 식당 시퀀스다. 공간은 한 곳이라도 스팟이 여러 군데라 한달 여 동안 촬영했는데, 오래 하다 보니 확실히 조금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감독님이 지금의 컨디션으로 오프닝을 다시 찍으면 좋겠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길복순>의 액션도 그렇지만, <일타 스캔들>에서 달리기도 장난 아니다. 쉬지 않고 달리는 데 정말 잘 뛰더라.
<일타 스캔들>이 먼저 방영됐지만, 촬영은 <길복순>이 먼저였다. 끝낸 직후 체력이 바닥인 상태에서 바로 들어갔는데 <일타 스캔들>은 계속 뛰어야 했다. 특히 초반에는 뛰는 장면이 너무 많은 데다 너무 힘들어하는 게 보이니, 나중에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은 후반작업에 맡겼다. <일타 스캔들>은 자체가 밝은 작품이라 그런지 촬영하면서 오히려 힐링되는 느낌이었다. 이런 작품은 개인적으로 처음이다.
변성현 감독의 디렉팅이 매우 디테일하다는 풍문이 있는데 어떤가. (웃음)
일단 변성현 감독과의 작업은 매우 특별하고 좋았다. 감독님도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쓴 경험은 처음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라 서로가 (새롭게) 보여줄 건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예전에 설경구 배우로부터 영화 <불한당>을 찍으면서 초반에는 변 감독과 많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변 감독이 배우에게 맡기기보다 표정이나 움직임, 동선 등을 아주 디테일하게 정해주는 스타일이라고 하더라.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은 방식이라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흥미롭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 불편한 거다! 한편으로는 배우의 감정이나 판단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가 엄마 복순과 킬러 복순이라는 양면성을 왼쪽과 오른쪽 얼굴로 구분해서 표현하려 한다는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됐다. 정해진 앵글 안에서 편안함을 찾으려 했고, 알게 모르게 내 새로운 얼굴이 나오지 않을지 기대되더라. 얼마큼 어떻게 움직일지 그 이유를 내 나름대로 찾아 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길복순의 강렬한 레드 의상도 감독님이 제안한 건가.
그건 내 몫이었다! 사람들은 변 감독을 스타일리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 또 남성은 여성 의상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도 있고 해서 ‘레드’라는 컨셉으로 가되 스타일링은 내게 맡겨줬다. 사실 레드라는 색은 너무 강렬하고 단조로워 좀 갇힌 느낌이 날 수 있다. 그래서 의상만 레드로 하고 소품은 다른 색상으로 가는 등 또 소재를 벨벳으로 해서 빛에 따라 명암이 달리 보이도록 하는 식으로 변주를 줬다.
복순과 얽힌 두 남자 ‘민규’(설경구)와 희성과의 호흡은 어땠나. 설경구 배우와는 벌써 세 번째 호흡이다.
설경구 배우야 뭐 마지막 액션 시퀀스를 찍을 때는 내게 다 맞춰주고 기다려 주고 했었다. 사실 복순-민규 사이에 멜로 감정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그 장면을 찍으면서 ‘이게 민규의 감정이었구나’ 싶었다. 구교환은 <꿈의 제인>(2017)이나 <메기>(2018)를 보면서 팬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배우였다. 진지할 거로 생각했는데 되게 독특하고 유쾌한 친구다. 그와의 멜로가 너무 짧아서 정서적인 교감이 크지는 않았지만, 재미있었다.
<일타 스캔들>의 젊은 행선과 <길복순>의 킬러 연습생 ‘영지’를 연기한 이연 배우와도 연거푸 함께했다.
말했듯이 <길복순>을 먼저 촬영했는데 이때 친해졌다. 처음부터 막 편했던 건 아닌데 성격이 워낙 붙임성이 있고 쿨한 편이라 그런지 어느 순간 나도 편해지더라. <일타 스캔들>에서 20대 행선을 연기할 배우가 필요했고, 처음에는 나보고 하라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부담돼서… (웃음) 이연이 떠올라서 전화해 보니 마침 스케줄이 없다고, 흔쾌히 수락해줬다.
# 잠깐 물 한 번 마셨다고 갈증이 해소되나
그간 작품성은 인정받았으나 상대적으로 흥행(시청률)이 저조해서, 상업물에 갈증이 크다고 밝힌 바 있다. <길복순>과 <일타 스캔들>을 통해 어떻게 좀 해소가 됐나. (웃음)
잠깐 물 한잔 마셨다고 갈증이 온전하게 해소되는 건 아니지 않나. (웃음) 계속 가야지. 사실 상업물의 경계를 잘 모르겠다. 내 딴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라 선택했는데 많은 분이 봐 주지 않아 답답한 심정이 컸었다. <길복순>도 <일타 스캐들>도 상업성을 기준으로 선택한 건 아닌데 이렇게 사랑받아서 감사하다. 특히 <일타 스캔들> 스탭들이 어느 정도 성공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히트칠 줄 몰랐다고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웠다. 드라마를 통해 젊은 친구들이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이전보다 더 많이 알게 된 듯하고 덕분에 앞으로 나올 작품에도 좀 더 관심을 갖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앞으로 배우로서 욕망이 있다면. 또 전도연 앞에 붙이고 싶은 수식어는 뭘까.
매번 시청률 1위나 글로벌 1위에 오르는 작품을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작품을 때때로 만난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내가 잘 해왔고, 내 길이 옳다는 확신을 주고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도 연기할 것 같다. <밀양>으로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후 ‘전도연의 정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한 분이 ‘지금이 너의 정점이 아니고 앞으로가 궁금해’라고 말씀하셨었다. 이번에도 <길복순>을 보고 문자를 주셨더라. ‘앞으로 또 무엇을 할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할지, 기대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예능 출연은 원래 잘 하지 않음에도 이번에는 유튜브 <채널 십오야>에 설경구 배우와 동반 출연했다.
사실 너무 힘들었다. 평소 게임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승부욕이 너무 세서다. 더불어 사람 이름을 정말 못 외우는 편인데, 이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관심과 호기심은 크지만 이상하게 이름만은 못 외운다! 이기긴 해야겠는데 사람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너무 답답하고 창피하고 민폐 같아서 괴로웠다. 또 <유퀴즈 온 더 블럭>에도 나갔는데 TV에서만 보던 유재석 씨가 옆에 있으니 마치 연예인을 보는 것 같고 현실 같지 않았다. 결론은 예능은 스킬이 필요한 것 같고, 이번에 두 번 출연한 걸로 족하다는 거다.
마지막 질문이다. 전도연에게 <길복순>은?
음… (오늘 내리는) 단비 같은 작품이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2023년 4월 24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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