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혼자라 외롭지만, 씩씩하게 살던 ‘춘희’(강진아)에게 새로운 인연이 찾아온다. 중학생인 ‘자신’(박혜진)과 넘치는 호감으로 다가오는 남자 ‘주황’(홍상표), 그리고 노숙자인 ‘소정’(황미영)이다. 믿기지 않고 설레고 편안한 감정을 전하는 세 사람과의 만남으로 춘희의 마음속에 어떤 희망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견디는 게 아닌 즐기기, 자기 목소리 내기, 우정 나누기. 그간 경험하지 못한 영역에 한발 내딛는 춘희의 미래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꿈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사랑스러운 성장담을 완성한 최진영 감독을 만났다. 무한 긍정의 힘을 지닌 제목부터 야심 찬(?) 희망 사항까지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후 여러 영화제에서 관객과 만났는데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다면.
SNS나 왓챠 등에 올린 평을 찾아보곤 한다. ‘자신의 10대를 돌아봤다’고 한 감상평을 보고 영화의 의도가 잘 전달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한편으로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해석해 주는 분도 있어서 그 또한 기쁘고 흥미롭다. GV를 진행하면서 관객마다 다른 반응과 생각을 접하고 그걸 흡수해 다시 관객과 상호작용한다는 게 참 즐겁다.
제목 ‘태어나길 잘했어’는 어떻게 정했나. 뭔가 자기 번민의 시간을 거쳐 어떤 깨달음이나 통찰을 얻어야 저절로 나올 수 있는 기쁜 탄식 같은 한마디가 아닌가 한다.
이건 정말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자간담회에서도 얘기했지만, 영화는 낮잠 자다가 꾼 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 근데 꿈을 꾼 며칠 후에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제목이 딱 떠올랐다. 제목은 주제를 품고 있고 한편으론 주제를 단단하게 붙들어 매는 어떤 지렛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목을 미리 세팅하고 작업에 들어가는 스타일이라 중간에 변경될 일도 없었다.
‘어제를 버티고 오늘을 살아낸 내일의 나에게’라는 영화 카피는 제목과 꼭 부합된다. 가볍게 묻자면,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은.
마케팅 담당자분께 너무 감사하다. 그 카피를 받고 너무 좋아 소름이 돋았던 것 같다.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은 음… 영화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했을 때다. 영화 완성까지 여러 일이 있었고 많이 힘들었거든. 제작비도 부족하고, 서울과 전주를 오가면서 몸도 너무 고되고 당시 심적으로 힘든 일도 겹치기도 했다. 또 우리 팀이 워낙 팀웍이 좋기로 유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미묘하고 디테일한 갈등이 있었는데 이런 모든 힘듦이 해소되면서 정말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상영은 1회밖에 못했지만, 배우분들이 모두 와서 같이 영화 보고 해변을 거닐며 영화 이야길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사정상 편집을 직접 몇 달간 했는데 그 기간 동안 혼자 작업하면서 상당히 외로웠던 가 보다. 사람들을 만나니 정말 기쁘더라. (웃음)
영화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어릴 때부터 영화를 정말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 동아리를 직접 만들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공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전공(사회학)을 공부했고 대학 졸업할 즈음 주변의 권유로 전주국제영화제 워크숍에 참석하게 됐다. 이때부터 창작한 것 같다. 그렇다고 바로 영화에 뛰어든 건 아니고 몇 년이 지난 후 본격적으로 직접 써서 제작 지원을 받으며 꾸준히 작업을 이어갔다. 초반엔 직장과 병행하다가 2015년부턴 이쪽에 집중, 전주 건축물 아카이빙 영상 작업 등을 했다. 그러다 오래전 공모전에서 상금만 받고 넣어 뒀던 시나리오를 꺼내 울주세계산악영화제 단편 제작 지원에 응모해 선정돼 <뼈>(2017)를 만들고, 이후 <연희동>(2018) 과 이번 <태어나길 잘했어>까지 찍었다.
춘희의 콤플렉스인 ‘다한증’을 꿈에서 가르쳐 준건 아닐 테고 (웃음)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나.
춘희는 중학교 때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외삼촌 집에 더부살이하게 되는데 이런 정신적인 역경과 더불어 어떤 신체적인 힘듦을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 친구 중 다한증 때문에 손을 잘 안 잡으려는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의 그런 행동이 참 마음 아팠었다. 그냥 손잡아도 괜찮은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이 컸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았던 걸 마음 한편에 계속 담고 있었던 거 같다. 또 육체적으로 뭐랄까 결핍되거나 부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영화 속에 가져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다만 자칫 캐릭터의 성장을 부각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적으로 비칠까 봐 조심스러워서 배우들과 함께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신중하게 접근했다.
성인이 된 춘희가 하는 아르바이트가 ‘마늘 까기’이다. 고글을 쓰고 작업복을 입고 프로답게 마늘 까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데, 수많은 일 중 ‘마늘 까기’인 점도 독특하다.
춘희는 손에 땀이 많아 손을 드러내거나 다른 사람과 잡는 걸 꺼려하지만 손재주는 아주 좋은, 손으로 하는 일을 잘하는 능력자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춘희에게 호감을 표하는 ‘주황’(홍상표)은 말을 더듬지만, 태평소를 매우 잘 부는 청년이다. 입으로 뭔가 하는 걸 잘하는 거지. 이렇게 우리가 결핍(부족) 혹은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을 외면하고 덮기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겹핍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고 가치 있다는 걸 보이고 싶었다.
어떤 정형성이나 편견을 깬 시도 같다. 춘희가 머무는 다락방의 전구 장식, 프로 마늘까기러의 작업복, 주황의 태평소와 마술로 만든 꽃 등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미술과 소품이 영화를 톤업하는 데 크게 역할 한다. 전체적인 톤앤매너는 어떻게 설정해 들어갔고, 도중에 변화된 지점이 있다면.
원래 자기와 성별이 다른 자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꿈이라 처음엔 멜로적인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남자한테 구원받는 게 아닌 스스로를 사랑하는 춘희를 그리고 싶었다. 이를 위해 남성 자아가 아닌 자길 가장 사랑하지 않았을 시기 그러니까 10대의 자아를 만나는 거로 설정했다. 10대의 춘희는 부모님을 잃고 친척 집에 얹혀사는 불행한 경험을 하다 보니 자연히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강진아 배우도 나도 기존의 독립영화에서 익히 본 어두운 캐릭터는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좀 다른 캐릭터로 가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나 역시 고난의 서사라도 꼭 그렇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주제와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지에 의문이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귀엽게 좀 바꿔보자고 했다. 미술이나 세트에 투입할 여력이 안 되니 스태프들이 각자 집에 있는 걸 털어 넣었다. 특히 강진아 배우는 춘희가 외롭고 쓸쓸한 친구여도 옷만은 화사했으면 좋겠다고, 또 그의 감정과 정서 상태의 변화에 따라 의상도 바뀌면 좋겠다면서 동묘 등의 빈티지샵에서 옷을 손수 공수해 왔다.
성인 춘희를 연기한 강진아 배우는 중학생 춘희역의 박혜진 배우와의 호흡에 대해 ‘동작이나 행동이 묘하게 닮았다’고 표현했는데, 촬영하면서 지켜보니 과연 그런가. 사전에 특정 동작을 미리 맞추고 들어가기도 했는지?
음… 사실 편집할 때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할 때도 닮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웃음) 그런데 다른 분이 닮았다고 하니 ‘어!’하게 된다고 할지, 두 분 모두 키가 큰 공통점이 있지만 이런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표정이 닮은 것 같다. 언뜻 보면 되게 공허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 얼굴 안에 다양한 감정이 녹아 있는 게 묘하게 비슷하더라. 사전에 특별하게 동작을 맞추고 들어가진 않았다. 다만 혜진 씨를 먼저 촬영해서 라면 먹을 때의 젓가락을 쥐는 모습을 찍어 진아 씨에게 참고하라고 보여준 기억이 난다.
강진아 배우야 여러 영화를 통해 익히 봐왔고, 이번 박혜진 배우는 확장성 있는 얼굴이라 앞으로도 자주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 춘희가 중학생 춘희를 보고 깜짝 놀라며 ‘정말 나야?’라고 물으며 손바닥의 화상 흉터를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성인 춘희에겐 있는 흉터가 중학생 춘희는 왜 없을까.
일종의 자해를 한 거라 춘희는 어른이 돼서도 그 행동을 계속 후회하고,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을 거다. 성인 춘희가 벼락 맞은 시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중학생 춘희는 춘희의 과거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과거의 춘희는 아니다. 잘 보면 둘의 톤이 좀 다른데, 벼락맞고 등장한 춘희는 밝았던 시기의 딱 자기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어려움을 겪기 전 말이다. 지금의 춘희가 욕망하는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렇기에 후회로 남은 자해의 흔적도 없는 거다.
할머니한테 ‘엄마 집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중학생 춘희나 사촌오빠에게 ‘내 집’이라고 주장하는 성인 춘희나 마냥 당하기만 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한편으로 시원했다. 춘희가 내지르는(?) 포인트를 어떻게 잡아갔는지.
전사가 나오진 않지만, 춘희는 원래 여유롭게 잘 살다가 부모님의 죽음으로 외갓집으로 들어오면서 눈칫밥을 먹게 된다. 춘희는 외가 식구라는 공동체에 들어가고 싶지만, 계속 내쳐지는데 그러면서 어떤 자기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듣는 역할을 하게 된다. 사촌오빠의 술주정도, 외숙모의 신세 한탄도 가만히 듣고 있는 거지. 좀 전에 말한 두 포인트가 춘희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부분이다. 어릴 땐 외할머니가 가장 거리감이 적은 가까운 사람이라 속 마음을 이야기했을 거다. 이후 계속 침묵하다가 벼락을 맞고, 주황을 만났다가 헤어지고, 10대의 자길 만나고 떠나보내면서, 비로소 자기 언어와 목소리를 갖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자기의 존재 이유와 쓸모를 찾아갈 사람이 되어 친척 오빠한테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던 거지.
춘희가 터널에서 벼락을 맞을 때, 옆에 있던 홈리스 ‘소정’(황미영)과의 관계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춘희는 처음 본 소정에게 사발면을 주고 새 신발도 준다. 그게 춘희의 기질과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아도 춘희는 분명히 마음을 쓸 거라는 생각에 홈리스를 등장시켰다. 한편으론 춘희에게도 같은 성별의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또 개인적으로 홈리스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언젠가는 (영화로) 해보고 싶은 생각에 등장시킨 것도 있다.
영화의 공식적인 소개를 보면 ‘스스로 믿음이 별로 없는 인물의 성장담’ 인데, ‘스스로 믿음이 없다’는 데서 요즘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춘희는 자존감이 높은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고백하자면, (나는) 자존감이 높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고 자존감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겠는 부분도 있다. 그냥 자길 덜 미워하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존감이라는 단어로 퉁쳐 온 게 아닌가 한다. 대체로 창작자들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높은데, 나 역시 장난 아니라서, (웃음) 사랑받기를 정말 원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영화를 찍으면서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고 대신 내가 사랑을 많이 주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게 나의 자존감과 연결되는 것 같고, 이런 마음이 춘희에게 투영됐다고 생각한다. 춘희는 매우 외로운 처지에 자기 혐오감도 갖고 있지만, 홈리스 같은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사랑을 주는 인물이 아닌가 한다.
출신지인 전주에서 활동 중으로 이번 영화 역시 전주 올로케이션으로 ‘한벽굴, 철봉집, 경기전’ 등의 명소를 담았다. 영화 촬영지로서 전주의 매력을 꼽는다면.
일단, 밥이 좀 맛있다. 오래된 도시로 적절하게 근대와 현대가 뒤섞인 공간이고 도시라 그간의 시간과 문화가 자연스럽게 퇴적되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게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저 건물 안엔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나고, 골목 구석구석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 자꾸 상상하게 한다. 이런 상상을 하기에 어울리는 리듬과 속도 그리고 느림에서 오는 여유와 아기자기함이 있는 도시다.
지역의 창작 생태계와 창작자 간의 교류 정도는 어떻게 이루어지나.
전주가 부산 다음으로 영화나 드라마 등의 촬영을 많이 하는 지역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제작 지원 면에서는 아무래도 서울과 격차가 날 수밖에 없다. 지역의 창작 생태계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는 건 독립영화협회다. 전주의 경우는 전북독립영화협회를 통해 교류하고 지방에서 지속해서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그 내용을 계속 발화하고 있다. 이런 교류를 통해 (지역의) 여러 사정을 전달하고 있고, (소통에 능한) 스피커들 덕분에 지원이 다른 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탄탄하다는 생각이다.
준비 중인 작품이 있으면 소개해달라.
원래는 <태어나길 잘했어>의 다음 이야기로 1999년을 배경으로 한 10대 여고생들 이야기인 ‘20세기 소녀들’(말했듯 제목부터 세팅하고 들어가는 편이다!)을 기획, 개발하는 중이었다. 내가 딱 이 시기에 10대를 보낸 그야말로 20세기 소녀거든. 한데 요즘 90년대 서사가 너무 많이 나와서… 개인적으로 경험한 90년대는 드라마 속의 풍경처럼 막 그렇게 뽀샤시하고 청량감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추억을 이야기하며 90년대를 활용하는 방식에 일면 동의하지 않는 면이 있어서 일단 멈추고 두고 보려 한다.
현재 작가로 드라마에 참여 중이고, 다행히 제작사에서 영화의 개봉에 집중하라고 배려해 주셨다. 앞으로 멜로 영화를 찍고 싶어서 트리트먼트를 하나 써서 제안 드렸는데 아직 답은 받지 못한 상태다. 현실화하긴 힘들지라도 머릿속으로 캐스팅까지 다 마쳤다. (웃음) 한석규, 김희애님이 부부로 나오는 그레이 로맨스를 한번 해보고 싶다. 드라마 <아들과 딸>(1992) 이후 두 배우가 다시 부부로 만나다니 근사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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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1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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