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물고기>(2013)와 <혼자>(2016)를 통해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해온 박홍민 감독이 세 번째 장편 <그대 너머에>로 관객을 찾는다. 영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 엄마로부터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딸 그리고 엄마의 옛 남자친구인 영화감독. 세 인물을 중심으로 기억과 망각, 존재에 관해 의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관계 안에서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믿음에 관한 고민을 담은 영화”라고 소개하는 박홍민 감독을 만났다. 처음으로 시도한 VR촬영, 표정까지 읽히는 듯한 개미 촬영 에피소드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복기하면서 촬영해 나간다는 그가 만드는 영화 과정에 대해 귀기울여 본다.
<그대 너머에>는 가까운 사람의 투병을 지켜본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했다고 들었다.
아주 가까운 분이 정확하게 알츠하이머는 아니지만, 유사한 증상을 지닌 병에 걸려 힘든 시간을 보냈다. 매주 찾아가 지켜보고 그 극복의 과정을 함께 겪으며 ‘존재’와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이를 영화적으로 풀어 보고 싶었다. 전작인 <물고기>(2013)와 <혼자>(2016)가 그랬듯이 작업 당시 내가 처한 상황이나 감정을 작품에 투영하는 편이고 카메라와 자아 그리고 존재, 죽음과 삶은 항상 머릿속에 담고 있는 테마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 ‘인숙’(오민애), 엄마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끄집어 내고 싶은 ‘지연’(윤혜리), 인숙의 과거 속에 존재하는 영화감독 ‘경호’(김관후)까지 세 인물은 모두 존재를 인정받고자 분투하는 인물이다. 제목의 ‘그대’가 의미하는 바를 짚는다면.
‘그대’는 사전적 의미로는 상대를 높이는 2인칭 대명사로 인숙, 지연, 경호 그 누구일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자아를 의심하고 또한 지금의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서로를 치열하게 찾고 확인하려 한다. 이런 그들이 자신을 괴롭히던 내면의 어느 지점 너머, 미지의 단계로 각자 용기 있게 나아갔으면 하는 응원의 마음을 담아 제목을 지었다. 지연은 엄마 인숙이 딸인 지연을 생각한다는 걸 믿기를, 인숙은 지연과의 연대를 통해 내면의 평화를 찾기를, 경호는 자신이 추구하고 원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를 이렇듯 각자의 방식으로 퍼져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영화에서 무엇보다 한눈에 들어오는 건 빽빽하고 굽이굽이 펼쳐진 골목길을 헤쳐 나가는 지연과 그의 뒤를 쫓는 경호의 움직임이다. 로케이션 지역과 로케이션에서 신경 쓴 점은.
중구에 있는 골목길로 대략 20킬로 반경에 있는 동네에서 촬영했다. 인위적으로 계획된 게 아닌 저절로 만들어진 듯한 골목과 그 옆에 늘어선 집을 보며 혼자 상상하곤 한다. 외부만 봐도 그곳에 사는 이의 삶이 상상되는 게 있거든. 이런 골목과 길 옆의 집들은 어떤 삶의 군집이자 그 자체로 삶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골목길을 헤쳐 나가는 것이 마치 인물의 머릿속과 머릿속을 넘나든다고 생각했다. 촬영 공간을 선택할 때 가장 눈 여겨 본 지점은 실내와 실외의 자연스러운 연결이었다. 지연과 경호가 다니는 길과 밀접하고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드는 방을 찾느라 꽤 고생했다. 골목골목을 다니며 빈 방을 찾은 후, 나중에 콘셉트에 맞게 방을 꾸몄다. 세트로 간다면 비용적인 문제도 있고 또 너무 꾸며진 느낌이라 맛(재미)이 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빈방을 구한 후 그 안은 개인 물건을 갖고 오기도 하고, 버려진 물건을 주워서 닦아 넣기도 하고, 당근마켓에서 구매하는 등 다양하게 채워 넣었다.
전작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롱테이크 촬영이 많다.
기억의 줄기가 한 줄로 이어졌으면 했다. 경호가 지연을 쫓아가는 장면을 만일 분절하고 분할했다면 파편처럼 더욱 혼란스럽게 펼쳐 놓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보다는 경호가 계속 길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막히는 듯한 느낌을 부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롱테이크로 촬영했는데 단순히 인물을 팔로잉하는 게 아니라 시점을 바꾸는 게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경호를 따라가다가 인숙과 지연이 함께 있는 놀이터를 비추고 다시 경호의 시점으로 바뀌는 식이다. 마치 인물의 여러 내면이 겹쳐 있는 것 같은 질감을 주고, 누구의 시선인 건지 중첩되어 보이도록 접근했다. 영화를 찍을 때 카메라에 대한 생각이 많은 편이긴 하다. (웃음)
이번에는 어떤 생각으로 임했나.
사람이 왜소해 보이는 부감이나 커 보이는 양각 등 이런 기본적인 테크닉 외에 존재 자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누구의 시점인지 또 내면의 혼란한 심정을 어떻게 반영할지 등에 대해 고민했다. 바라보는 어떤 방식을 다르게 바라봐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촬영 기간은 어느 정도인가.
2020년 2월에 촬영을 시작했고 총 12회차 촬영했다. 본 촬영은 10회차로 마무리했고, 이후 2회차는 개미만 촬영했다.
아, 개미! 개미 얘기는 잠시 뒤로하고(웃음), VR 촬영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VR로 촬영한 이유와 촬영 과정에 대해 들려준다면.
영화에서 보면 경호는 일반적인 시간대를 걷고 있지만, 행인들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장면이 있다. 이를 360도 VR로 찍은 후 나중에 편집으로 샷을 구성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구현하며 여러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본 장면은 결국 공간을 크롭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 소스의 해상도가 높아야 해서 인스타 360 타이탄이라는 장비를 사용해 11K라는 초고해상도로 촬영했고, 영화의 장면은 4K로 크롭해 사용했다. 촬영은 저녁 8시, 행인이 많이 다니는 시간대에 일정 시간을 촬영하고 속도를 빠르게 했다. 저녁 11시, 영화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머니와 아들이 자리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을 약간 빠르게 넣었다. 새벽 시간대에는 경호 혼자 걷는 장면을 촬영하여 3가지 다른 시간대의 동일 공간을 겹쳐 넣은 실험을 해 보았다. VR 촬영은 카메라가 움직일 경우 공간이 틀어지기 때문에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촬영 동안 세워둔 카메라를 교대로 지켜야 했었다. (웃음)
도심 골목길 안에 구현한 기억의 미로가 상상과 사고의 회전을 재촉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촬영이 큰 몫을 담당한 것 같다. 데뷔작 <물고기>는 3D로 촬영했고, 이번엔 VR 촬영을 시도했다. 새로운 영상 기술을 작품에 접목하는데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영상 기술은 정서를 표현하는 하나의 테크니컬한 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이를 이용해 어떤 또 다른 표현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시험하는 편이다. <물고기>때는 3D 영상이 워낙 리얼하다고 하니 궁금했었다. 3D로 표현되는 화면은 과장과 왜곡되는 면이 있고, 시선을 통제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폭력적인 느낌도 드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영상의 질감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번엔 VR이 요즘 워낙 많은 분야에서 활용되고 개인도 많이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풀 촬영보다는 같은 공간을 시간대를 달리해 촬영하여 중첩해 영화에 삽입했다.
|
개미 이야기 좀 해보자. (웃음) 평소 개미를 무서워해서 표정까지 읽힐 것 같은 초 밀착 촬영에 오싹하더라. 어떻게 촬영한 건지, 순간 CG가 아닌지 잠시 생각하기도.
먼저 개미를 찍겠다고 마음먹고 이후 어떤 방식으로 촬영할지 공부했다.(웃음) 일반 렌즈는 개미만 크게 찍을 수 있지 공간은 안 잡히고, 매크로 렌즈는 포커스가 너무 예민해 개미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어렵더라. 그래서 찾은 게 프로브(Probe) 렌즈인데, 값이 꽤 나가지만(200백 만원 정도) 이번에 쓰고 이후 중고로 팔면 된다는 생각에 질렀다. 표정까지 읽힐 것 같았다니 일단은 성공이다.
개미로 시작하는 오프닝을 비롯해 개미는 인애와 경호의 과거 사연에 등장하고, 이후에도 개미만을 꽤 길게 잡는 신이 때때로 등장한다. 왜 개미일까.
영화를 만들면서 정말 구현하고 싶은 장면인가, 즉 내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에 맞는 기호를 담고 있는 장면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완성 이후에도 그 장면을 다시 보며 스스로 고민할 지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개미 장면이다. 나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은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그 와중에 서로를 보살피고 보듬으려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평범하면서도 작은 존재를 생각하다 떠오른 게 개미였다. 일단 물리적으로 작은 존재이고, 너무 작아 얼굴을 구분할 수 없는데 만약 큰 스크린으로 본다면 어떤 얼굴과 표정일지 궁금하더라. 그래서 직접 키워서 촬영하게 됐다.
직접 키웠다니! 먹이는 뭘 줬는지… 양육(?)담 좀 들려달라.
과자도 주고 이것저것 주는데 매우 잘 먹는다. 키우면서 20%는 죽었는데 놀랐던 게 죽은 동료를 한쪽으로 모아두고 묻어주더라. 항상 질서 정연하게 무언가를 만들고 있어서 키우면서 많을 걸 느꼈었다. 촬영 후 날씨가 어느 정도 따뜻해진 시기에 장춘단 공원에 방사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세 마리가 가지 않고 있길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가더라. (웃음) 너무 해맑은 얘긴가 싶지만 작별인사를 한 건지도.
작별인사였다는 데 한표! <그대 너머에>를 보면 의외로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몇몇 장면이 있다. 밤에 혼자 보면 무서울 것 같았다. 분위기와 연출을 쫄깃하게 잘 가져간 것 같다.
어떤 장면인지 알겠고,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경호의 감정을 중심으로 표현한 시퀀스다. 영화 감독인 경호가 자기가 쓴 시나리오를 거부당하는 등 주변에서 외면받으면서 점점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서 고립된다는 느낌을 전하려 했다. 지연은 경호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존재다. 지연을 외면해도 마음속에는 있고, 지연을 따라가면 막다른 골목에 닿고, 또 지연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문을 두드리고 창문 밖에 서 있는 등. 그의 두려움이 증폭하면서 방에도 나타나는데 실제 지연과 경호가 만들어 낸 지연이 혼재되어 있다.
인숙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경호가 메모해 놓은 종이를 찾는 인숙과 마주하는 시퀀스가 인상적이었다. 주방 가구 수납공간마다 흰 종이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그중 특정 종이를 찾는 건 마치 켜켜이 쌓인 기억의 저장고 속에서 사라진 기억을 찾는 듯이 보이더라. 알츠하이머의 병증을 영상적으로 잘 묘사했다는 생각이다.
기억을 찾는 과정을 물리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고민한 장면이다. 그래서 인숙이 말하는 대사도 ‘여기 있었는데’, ‘이쪽인가’ 이런 식으로 실질적으로 무언가를 찾는 느낌이 들도록 했는데 촬영하기는 만만치 않았던 장면이다. 왜냐하면 인숙의 감정이 폭발하는 데다가 인숙과 경호의 충돌도 있어서 그 감정의 진폭을 조율하고 변주해야 했다. 또 종이를 꺼내는 타이밍, 감정의 폭발, 배우의 움직임 등이 다 맞아야 하는 장면이라 걱정했는데 오민애 배우가 처음부터 너무 잘 해주셨다. 거의 몸을 던지듯이 하는데 너무 영화적인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쳐올리면서 변주하는 걸 보고 감탄했었다. 스탭들은 종이를 차곡차곡 쌓아 놓고 흐트러지면 다시 정리하고, 구겨서 연출하는 과정 등을 여러 번 해야 해서 고생 좀 했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끝까지 가져갔으면 한 포인트나 키워드가 있다면.
<물고기>로 해외영화제에 초청됐을 때 한 외국평론가가 영화를 한 줄로 어떻게 축약하겠는지 물어서 멘붕에 빠진 적이 있다. (웃음) 한 줄로 줄이라고 하면 무섭고, 이래서 상업영화를 못하나 싶기도 하다. 내가 영화를 완전히 장악하여 주제에 꼿꼿하게 맞춰 간다면 대답할 수 있겠지만, 나조차도 질문하는 상황에서 만들어 나간다. 큰 맥락에 따라 촬영한고, 그 결과물을 보고 질문하고 복기하고 정리하는 식이라 딱 정의해서 말하기가 힘들다.
이번에는 어떤 질문을 하며 완성해 나갔나.
음, 마지막 인숙이 지연을 찾는 장면을 아주 좋아한다. 비록 찾는 소리만 들리고 찾는 모습은 화면에 잘 보이지 않으나 계속 찾고 있고 카메라는 고정되어 그 장면을 찍고 있다. 인숙이 지연을 열정적으로 찾는 모습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증명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그전까지 카메라가 누군가를 찾는 이들을 비췄다면 이 장면에서는 카메라의 도움없이 인숙은 지연을, 관객은 인숙을 찾음으로써 (인숙과 지연이) 우리 영화 밖으로 또는 경호의 시나리오 밖으로 나갔으면 했다.
영화가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는지.
<그대 너머에>는 관계 안에서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믿음에 관한 고민을 담은 영화다. 익숙하지 않은 구조라 낯설 수 있지만, 인물의 상황과 감정에 마음을 던진다면 나름 느낄 점이 많을 거로 생각한다. 장면과 장면이 어떠한 의미와 연결성이 있는지를 상상하고 나름의 해석을 하면서 영화를 즐기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한다.
차기작 계획은.
피해의식과 알 수 없는 분노, 그리고 허망감이 녹아들었던 <혼자>의 주인공도 이번 <그대 너머에>의 경호도 모두 직업이 영화감독이다. 상당 부분 나를 투사한 인물로 이야기를 전개했는데, 다음 작품에는 전혀 다른 캐릭터로 이야기하고 싶은 바람이다.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인물을 중심으로 해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삶과 죽음의 어느 부분에 서 있든 생의 열망과 열정을 내려놓지 않는 인물을 만들고 싶은 바람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은.
개봉을 준비하며 정신이 없지만, 그만큼 많은 걸 배우고 있다. 이번에는 농부영화사(박홍민 감독 제작사)가 <그대 너머에>의 배급을 직접 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공부할 것도 또 감사할 것도 많다.
사진제공. 농부영화사
2021년 9월 15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