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금용 기자]
당초 작년 12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의 여파로 긴 기다림 끝에 개봉하게 됐다.
너무 기쁘고 감사하지만 기다림 때문에 생긴 높은 기대치가 부담스럽기도 하다. (웃음) 배우 공유에 대한 기대치, 내가 맡을 다음 작품을 향한 기대치가 가끔은 동전의 양면처럼 느껴진다. 감사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늘 고비를 맞는다. 기분 좋은 부담이자 자극이고 내가 나태해지지 않게 만드는 원동력인 거 같다.
제작비 160억 규모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극장과 OTT를 통해 동시에 공개하는 건 국내에선 처음인데.
개봉을 하지 못할까 두려웠는데 결국 관객을 만나게 돼 다행이다. (웃음) 두 플랫폼을 통해 영화를 동시에 개봉하는 일은 처음이라 낯설지만 당황스럽진 않다.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추세가 유지될 거 같아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관객이 영화를 보다 편리하게 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복>은 영원불멸의 존재 ‘서복’과 시한부 ‘기헌’의 여정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기헌’과 ‘서복’이라는 상반되는 두 존재가 동행한다는 설정도 끌렸지만 무엇보다 복제인간이 아닌 ’기헌’의 입장에서 영화가 전개된다는 점이 좋았다. <서복>은 ‘기헌’이라는 관찰자의 시점에서 괴롭게 영생을 살아야 하는 ‘서복’을 바라본다는 점이 복제인간을 다룬 기존의 영화들과는 다르다. 보통은 복제인간에 이입해서 영화를 보지 않나. 그리고 공유와 박보검의 조합이 특별하고. (웃음)
동의한다. (웃음)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차츰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더라.
영화가 시작할 무렵의 ‘기헌’은 복제인간의 존재를 믿지도 못하고, 직접 확인하고서도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서복’을 특별한 존재가 아닌 그저 어린 아이 취급한다. 하지만 동행이 길어질수록, ‘기헌’은 ‘서복’의 능력을 깨닫고, 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들으며 그를 파악해 나간다. 그러다 문득 숨겨뒀던 트라우마를 신에게 고해성사하듯 ‘서복’에게 밝힌다. 자신보다 어리다고 생각했던 신비로운 복제인간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거다.
복잡하고 내밀한 감정을 공유하는 만큼 ‘서복’을 연기한 박보검 배우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텐데.
작업하면서 참 심성이 바른 친구라고 느꼈다. 본인이 불편하더라도 힘든 내색을 안 하더라. 묵묵하게 알아서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고 현장에서 진중하게 연기했다. 흠잡을 데가 없이 예쁘고 착한 후배다. 한편으론 같은 남자배우 입장에서 그 나이대의 나를 대입하게 되더라. 오지랖일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속은 그렇지 않을 텐데.’하는 노파심이 자주 들었던 거 같다.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 박보검에게 그런 눈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굉장히 인상적인 눈빛이었다. 배우가 어떤 작품, 어떤 감독을 만나는지에 따라 숨겨진 잠재력이 발휘되는 거 같다. 얘기하다보니 보검씨가 지금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홍보하는 게 부담이 크다. (웃음)
‘기헌’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뇌종양 환자 아닌가. ‘서복’의 쫓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와중에도 수척한 얼굴과 퀭한 눈이 눈에 띄더라.
시한부를 선고받은 만큼 피폐한 모습이 돋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체중 관리를 했다. 볼도 좀 더 패어 있었으면 좋겠고, 눈도 퀭하게 보였으면 했다. 배역에 꼭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몸을 만드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만족할 만큼의 몸 상태로는 만들지 못해 아쉽다. 내 욕심으로는 체중 감량을 더 하고 싶었지만 감독님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막아서 더는 못 뺐다. (웃음)
툭하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예민함과 나약함, 비겁한 면모까지 ‘기헌’은 무척 인간적인 캐릭터다. 어떻게 접근했나.
아마 내가 맡았던 배역들 중 가장 입이 걸걸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웃음)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는 ‘기헌’이 더 말수가 적고 무례할 정도로 피폐하고 어두운 인물일 거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감독님은 그가 시한부 선고는 받았지만 전형적인 아웃사이더 느낌은 아니길 바라셨다. 가끔 농담도 던지고 인간미가 보여야 한다고, 너무 어둡기만 하면 캐릭터가 매력 없다더라. (웃음)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원래 내 생각보다 더 인간적이고 밝은 인물로 그려졌다.
<용의자>(2013) 때부터 무술 감독들이 나를 너무 믿는 경향이 있다. (웃음) 하지만 아직 액션에 자신이 없고 또 요즘엔 대역 배우분들이 너무 잘하시지 않나. 그분들 덕에 보다 풍성한 액션신이 완성됐다.
<불신지옥>(2009), <건축학개론>(2012)의 이용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은 SF물이다보니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거 같은데.
캐릭터를 비롯해서 설정이 복잡하고 어렵다보니 감독님께 거기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다. 굉장히 섬세한 분이기도 하고, 이번 작품을 오랜 기간 준비하신 만큼 막힘없이 답변을 주시더라. (웃음) 종종 현장에서 즉석으로 대사를 수정하신 적도 있는데, 아마 감독님이 너무 영화 대사 같은 대사를 경계해서가 아닐까 싶다. 대사 수정 같은 경우는 오히려 좋았던 거 같다. 대사가 너무 극적이면 집중이 깨지고 오글거려서 연기를 잘 못하겠더라. (웃음)
먼저 수정을 요청한 적은 있나.
“니들 같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게 되면 그게 바로 지옥일 거야.”라는 대사가 너무 ‘신파’스러워서 입에 담기가 힘들다고 주장한 적 있다. 그런데 감독님이 그 대사만은 끝까지 강경하게 고집하셨다. 연기할 때 좀 힘들더라. (웃음)
원래 현장에서 의견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한편으론 웬만해선 작품을 총괄적으로 설계하고 만든 감독님을 따르는 편이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따라가는 입장이다.
이용주 감독은 영화를 통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함으로써 삶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던데.
그 지점에 대해선 감독님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솔직히 ‘기헌’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백퍼센트 해방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기에 그 두려움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초반부에 느꼈던 두려움이 점차 덜해졌을 거라고는 생각한다. 엔딩 장면에선 조금 내려놓은 듯한 마음가짐과 상대적으로 편안한 눈빛으로 연기에 임했다. 여전히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헌’이지만 전에 비해 덜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했다.
벌써 5년이 지난 <도깨비> 이후 배우 공유의 드라마를 기대하는 팬들이 많다. 다음 드라마 계획은 어떻게 되나.
최근 <고요의 바다> 작업이 끝났다. 그간 한국에선 보지 못했던, 달을 배경으로 한 SF 시리즈다. 찍으면서 배우들 간의 합이 너무 좋았고, 어느때보다 즐거운 현장이었다. 6개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했고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일이란 걸 잊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한 목표를 위해 논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던 같다. 또 제대로 된 장르물을 하는 것에 대한 성취감이 컸다.
<서복>에 이어 연달아 SF물을 한 셈이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
나이나 상황, 그리고 그 시기에 내가 가진 정서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에 조금씩 영향을 준다. 그래도 내가 지닌 기본적인 틀은 크게 변하지 않는 거 같다. 배우로서 책임감은 있지만 동시에 흥행 성적이나 관객의 반응에 타협하지 않으려 한다. 트렌드에 무조건적으로 맞출 생각은 없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선택할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담은 시나리오를 발견했을 때 기쁜데 그런 작품을 제때 만나는 게 쉽지가 않다. 예전에 비해선 좀 더 나를 드러내더라도 균형을 잘 지켜가면서 그 안에서 내 소신을 지키며 내 길을 가고 싶다.
아직 소년미가 물씬 풍기는데 놀랍게도 어느덧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소년미가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웃음) 우선 스스로에게 너무 인색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난 20여년 간 버티고 견뎌온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한때 미래에 대한 거창한 계획이나 꿈이 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일단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자는 생각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얼마 전 사고 싶었던 신발 응모에 당첨됐는데 최근 들어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신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감할 텐데 항상 응모하는데 당첨은 잘 안된다. 내가 제 값 주고 사는 건데 주체할 수 없이 기쁘더라. (웃음)
사진제공_매니지먼트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