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과거가 사라져 버린 형사를 주축으로 흘러가는 <사라진 시간>은 관습과 문법에서 탈피해 정진영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낸 영화다. 연출부에서 잠시 몸담은 이력이 전부지만, 영화감독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간직해 온 오랜 꿈이었다. 그 꿈에 다가가기 위해 쉰 살이 넘으면서부터 조금씩 준비한 끝에 마침내 일군 결실 <사라진 시간>으로 관객 앞에 섰다. 관련 영화인들의 응원영상이 공개된 요즘, 연출부 막내였던 시절부터 존경해 온 이창동 감독의 칭찬에 안심되고 기뻐, 맛있게 술 마셨다는 신인 감독 정진영을 만났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연출의 꿈을 <사라진 시간>으로 이뤘다. 축하한다. 감독과 배우로서 입장 차이가 있다면.
마음 상태도, 이렇게 인터뷰하고 개봉을 준비하는 자세도 아주 다르다. 배우는 연기로 캐릭터를 평가받지만, 감독은 영화 전체로 평가받는 것 아닌가. 게다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들어가 있을 ‘나’를 (관객이) 엿볼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더 어렵고 긴장된다. 또 영화 전체를 책임진 상황에서 한마디라도 더 신중하게 이야기하게 된다.
2018년에 촬영했다. 개봉까지의 과정을 들려준다면.
2017년 겨울에 글을 쓰고, 2018년 가을 충북 보은에서 한 달 여 촬영했다. 영화의 계절적 배경이 가을이라 작년 가을에 내심 개봉을 기대했는데 일정이 안됐고, (웃음) 올가을은 코로나로 또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 몰라 여름 문턱에서 개봉하게 됐다. 사실 이렇게 상업영화 식으로 크게 개봉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듣자 하니 처음 썼던 이야기를 완전히 엎고 다시 썼다던데.
처음 쓴 시나리오를 완성 후 읽어보니 굉장히 관습적으로 썼더라. 스스로 관습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웃음) 내가 왜 이렇게 규칙에 사로잡혀 있는지 반문하며 자기 검열하지 말고 자유롭게 가보자 했다. 세상에 훌륭한 감독과 뛰어난 작품이 많으니 나이 먹어 도전하는 입장에서 나 하나 정도는 색다르게 이야기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사로잡힌 내가 싫었고 다른 사람이 안 하는 이야기를 해야 신나겠더라. 그렇게 다시 쓴 게 <사라진 시간>이다. 원하는 대로 썼으니 책임도 내가 지고자 원래 작은 규모의 독립영화로 만드려고 했었다. 황당할 수 있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맡긴다는 게 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악인전>, <변신>, <블랙머니> 등 흥행 성공작을 연이어 내놓고 있는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가 투자했다. 자연히 규모가 커졌겠다.(기자 주: <사라진 시간>은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가 제공·배급을, ㈜BA엔터테인먼트와 다나필름이 제작을 맡았다)
원래 2억 내외로 제작하려던 게 순제작비만 7억 5천이 들어갔다. (조)진웅이 덕분이다. 그에게 시나리오를 준 것도 정말 여러 번 망설인 끝에 한 거였다. 책(시나리오)이 마음에 안 드는데 선배인 내 얼굴 봐서 한다고 하면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또 워낙 바쁘기도 했고. 거절당해도 일단 권해는 봐야 속이 시원하겠다 싶어 건넸는데 하루 만에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혹시라도 나를 돕겠다는 마음에 한다고 한 것은 아닌지 물어보니 ‘박형구’(조진웅) 나오는 부분은 토씨 하나 고치지 말라면서 제작사가 어딘지 묻더라.
내가 제작사고 그간 저축한 것을 털어 만든다고 하니 걱정이 됐는지, BA엔터테인먼트 장원석 대표가 함께한 모임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정진영 선배 감독 데뷔합니다! 제가 출연합니다” 이러는 거다. 이후 장 대표가 시나리오를 보여 달라고 해 보여주니, 새로운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자기가 하겠다고 하더라. 내가 공동제작자로 이름 올리며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제작비를 올리지 말자고 했다. (예산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맞춰 이야기를 바꿔야 하거든.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한 건가. (웃음)
본편에 한해서는 그렇다. 예고편은 내가 안 했으니…(웃음)
마을의 선생 부부가 화재로 사망하고, 그 사건을 조사하던 형사는 자고 일어나니 다른 사람이 ‘돼’ 있다. 과거가 완전하게 사라진 황당한 상황에 처한다. 또 밤마다 다른 인물로 빙의 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마치 환상소설 같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 영화는 논리적으로 해석하거나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정답을 말하는 것은 영화를 만든 태도와 맞지 않는다. 삶이 바뀐 ‘형구’가 돌아가려고 노력하다가 현재와 타협하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 유발되는 외로움과 슬픔을 그린 이야기, 결국 형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인 척 살고 있다고 확인하면서 느끼는 슬픈 연대감 혹은 조그만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가 관객 앞에 놓인 순간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코미디, 스릴러, 호러(?), 판타지 등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다. 장르는 규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장르는 영화를 보는 프레임이자 해석이다. 내가 어떤 장르로 규정해 버린다면 다양하게 해석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영화의 정체를 규정하지 말고 자유롭게 구성하자고 했으나 사실 (자세히 보면) 모든 이야기에는 근거가 다 있다. 설명하지 않되 어딘가에 숨겨 놓은 거지. 극 중 ‘고라니’가 갑자기 나오는 게 아니다. 빙의도 그렇다. 의도대로 장치를 하나하나 배치했으니 따라가다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간혹 설명이 부족해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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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필요하다면 ‘슬픈 코미디’로 구분하겠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던 주제와 화두를 꺼내 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쓴 당시의 계기가 있지만, 지금 꺼내면 어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접어 두련다. (웃음) 요소요소 자체가 (기존 상업영화에도 많이 등장하고) 새롭진 않지만, 엮고 엮어서 파도타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 게 내 욕망이었다. 다른 사람이 규정하는 ‘나’와 진짜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그사이에 놓인 개인의 외로움에 대해 마지막에 선문답처럼 던지려 했다. 또 선문답도 선문답이지만,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호러, 코믹, 형사, 판타지 등 여러 장르를 거친 이유다. 이런 선문답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조진웅과 정해균 등 원체 연기 잘하는 배우가 붙었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연기 방향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조율은. 또 직접 출연할 생각은 없었나.
내가 원하는 게 주황색 감정인데 배우가 꺼내든 게 주홍색이라면 그건 배우의 선택대로 가는 게 맞다. 만지기 시작하면 느낌이 손상될 수 있고, 하다 보면 결국 주황으로 맞춰진다. 다만 배우가 완전히 다른, 녹색을 꺼내 왔다면 수정하겠지만 워낙 경력이 오래된 이들이라 독해력이 있어 그런 경우는 없었다. 현장에서 촬영하고 모니터 보기 바빠 직접 출연할 계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직접 연기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촬영하는 한 달여 동안은 몸은 힘들어도 마치 미약 먹은 듯 행복했는데, 후반작업하면서 힘들었다고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아주 단순한 이유다. 글을 쓰고, 촬영하는 것은 내가 전문가는 아니라도 배우로서 익숙한 작업이고 현장이다. 한데 녹음, 음악, 편집 등 후반 작업은 프로세스 자체를 몰랐다. 많은 영화를 하면서 지금까진 촬영 종료가 곧 배우 일의 마무리였거든. 작업 프로세스를 새롭게 배우고 깨우쳐 가며 작업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더라. 사실 촬영하는 동안 펑크나 편집하면서 메우리라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는데 뜻대로 잘 안됐다.
정해균 배우만 캐릭터와 실제 이름이 동일하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아끼는 후배다. <황산벌>(2003) 때 처음 만났는데 몇 신 없는 데도 너무 잘했었다. 그의 연기는 탄탄하고 깊이가 있다. 알고 보니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더라. 연극무대를 거쳐 이름을 알리는 배우가 많고, 해균이도 그럴 거로 생각했다. 근데 너무 천천히 알려지는 거지. 배우 입장에서 대중이 얼굴만 아는 것과 이름까지 같이 기억해 주는 것은 다른 의미다. ‘정해균’ 이렇게 알아봐 주는 게 훨씬 의미가 크다. 그래서 원래 시나리오에는 다른 이름이었으나 고쳐 영화 내내 불리게 했다.
흠… 그런 사려 깊은 의도였다니! 연출이 오랜 꿈이었다고 했는데, 그 꿈을 이루기까지 꽤 긴 세월이 걸렸다.
영화 감독을 꿈꿨으나 연출쪽으론 이창동 감독님의 <초록물고기>(1997) 연출부 막내로 잠깐 일한 경험밖에 없었다.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배우로 살며 능력이나 비용 등을 고려할 때 연출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작품 하나 끝나고 잠시 쉬는데, 문득 생각하니 아들이 벌써 고3이 됐더라. 가장으로 가족을 책임지는 게 내 주된 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어느새 다 큰 거지. 예술가적으로 살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안정된 시스템 안에 안주하며 살고 있고, 예술가는 어렵고 힘들어도 도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어릴 때 생각했거든.
작은 영화를 하고 싶던 차에 전혀 일면식도 없던 장률 감독님, 홍상수 감독님이 신기하게도 차례로 책을 보내와 같이 작업하게 됐다. 이후 독립영화에 들어가려고 일정을 비워 놨는데 결국 일주일 전에 엎어졌다. 황당하고 화도 나고, 제작자와 신인 감독이 불쌍하기도 하고 참 황망한 마음이었다. 다음 스케줄까지 두 달 정도 공백이 생기더라.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영화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두 감독(장률, 홍상수)과 작업해보니 중요한 것은 제작비가 아니라, 이야기더라. 능력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으나 이야기를 써보자 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됐다.
<사라진 시간>으로 일단 꿈을 이루는 데는 성공했고, 두 번째도 고려하는지. 또 우문을 던지자면, 연기와 연출 중 어느 쪽이 더 좋나. (웃음)
<사라진 시간>은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완성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두 번째는 ‘하고 싶다’가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영화적 가치이든 상업적 가치이든 어떤 가치 있는 작업이어야 한다. 때문에 지금은 판단하기 힘들고, 영화 개봉 후 관객과 만나고 그들의 반응을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다. 하고 싶다고 또 한다면 그건 욕심이 돼 버린다. 연기와 연출 중 하나를 택하라니… 왜 나를 철창에 가두려 하나!(웃음) 지금도 하고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은 연기이고, 연출은 앞으로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상황, 모양, 분위기 등 뭔가를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그대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엔도르핀이 많이 나오는 작업이다.
마지막 질문!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일이 있다면.
몇몇 감독과 작가들이 <사라진 시간> 관련 멘트를 해줬고, 어제 그 영상을 공개했다. 보면 위로인지 덕담인지 칭찬인지 대충 짐작이 된다. 일단 위로는 없는 것 같고, (웃음) 덕담이 2개 정도 나머지는 칭찬에 가까워 보이더라. 개인적으로 이창동 감독님의 평이 특히 궁금했었다. 굉장히 엄정한 분으로 절대 감정을 꾸미지 않으신다. 할 말이 없으면 빈말을 하기보다 말씀을 아끼는 스타일이신데, 내가 보기에 그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을 하셨더라. 그 말을 듣고 긴장이 확 풀리면서 어찌나 안심되고, 기쁘던지! 최소한 ‘정진영이 허튼짓 안 했구나’ 싶어 어제 맛있게 술 한잔했다. (기자 주: 이창동 감독은 “아주 신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배우 정진영씨가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꾼인 줄 처음 알았다”고 평했다)
2020년 6월 19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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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