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류지연 기자]
이 영화의 시작이 궁금하다
한 여자가 관계에 따라 성격을 달리 하는데, 그 상반된 모습들이 충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은희가 만났던 두 명의 남자는 성격이 다른데 은희는 결국 누구와도 소통을 할 수 없다. 오히려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인 료헤이와 가장 소통이 된다는 것이 생각의 착점이었다.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은희는 나쁜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의 모습은 나 스스로도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적으로 과장을 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영화가 마치 지킬 앤 하이드처럼 극단적인 은희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다. 누구나 상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정말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에게마저 빈틈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원래부터 모순이 있다. 은희는 적어도 료헤이에게는 좋은 여자였다. 그런 은희를 밉고 싫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은희가 처음 본 사람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는 점이 왠지 슬프기도 하다. 료헤이와의 관계도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까.
시간 때문이라기 보다, 성향의 차이에 따라 다를 거다. 현오나 운철은 애초부터 이기심이 큰 인물들이다. 은희 자체도 원래 착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방어를 하다 더 나쁜 여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료헤이와 잘 맞는 사람이라면 둘은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걷고 차를 마시는 단순한 패턴 속에서 이야기를 쌓아나가는 영화의 구조가 인상적이다. 다음 영화 <지나가는 마음들: 더 테이블>도 한 카페에서 네 명의 배우들이 차를 마시는 이야기다.
맞다. 한 카페에서 사람들이 차만 마시는 이야기다. 다만 한 공간 안에서 시간이 바뀌긴 한다. 같은 테이블에 같은 오브제를 두고 사람들만 바뀌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데, 그 이야기가 서로 이어지진 않지만 전체로 보면 결국 하나의 큰 이야기로 보이게끔 하고 싶었다. <최악의 하루> 또한 그런 형식적인 실험 중의 하나다.
작품에서 그런 단순한 구조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
기본적으로 저예산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공간이 나눠지는 이야기를 하고, 계절의 변화를 다 담으려면 적은 예산으로 높은 퀄리티의 영화를 만들 수 없다. 또 가장 심플한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재미있는 층이 여려 겹으로 겹쳐진 이야기를 좋아한다. <최악의 하루> 또한 단순한 구성이지만 어떻게 보면 또 매우 복잡하다. 평소에 하루 동안 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들도 꽤 좋아하는 편이고.
평소에 그런 단순한 것들을 선호하는 취향인지 궁금했다.
그런걸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다. 훈련도 좀 돼있는 것 같고. <조금만 더 가까이>를 찍고나서는 책을 많이 냈다. <그러나 불을 끄지 말 것> 이라는 꽁트집도 냈고. 책에서도 실제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남녀간의 감정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 과정에서 단순한 구성으로부터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훈련이 됐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실제로 직접 살고 있기도 한 서촌의 골목과 벽들, 남산이 참 아름답게 나온다.
서촌이라는 내가 사는 공간에 싫든 좋은 애착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또 이 곳은 계속 변화하는 곳이라 재미가 있다. 예전에 단편작업을 하면서는 외대 이문동 쪽에 살았는데 그때는 그 쪽을 많이 담았었다. 큰 예산을 들일 수 있는 사정이 아니기 때문에, 주로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끌어 모아서 영화를 만든다.
영화는 은희가 연극 연습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는 한 여자의 방황에 대한 이야기 이기도 한데, 이 여자는 관계 속에서 상대에 따라 그들이원하는 연기를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여자는 실제로는 연기를 못한다는 얘기를 듣는 무명 여배우다. 료헤이가 갖고 있는 소설가라는 직업은 거짓말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 둘의 관계를 통해, 은희의 방황에 대한 얘기와 함께 창작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은희는 계속 허구로 도망가려 하는 여자다. 허구와 사실과 경계에 대해 재밌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 속에서 진실과 진심, 가짜와 진짜라는 말이 계속 반복된다.
영화는 은희의 입장에서 그녀의 자기모순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요즘 영화들은 사회적인 모순에 많이 집중을 하고 또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사소한 관계에서 느껴지는 개인적인 자기 모순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은희라는 여자가 하는 연기, 거짓말을 이용해서 창작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건 영화를 만드는 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영화 속에는 내가 다니는 거리와 차마시고 걷고 하는 나의 생활 패턴, 걸으면서 화를 다스리는 습관, 그 동안 봐왔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 등이 담겨있다. 그건 내 경험이지만 영화는 결국 그것들을 토대로 극적으로 구성한 이야기기 때문에, 그 안에 내가 겪은 진실과 사실이 있더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무의미 한거다. 실제 경험이고 아니고를 따질 필요가 없는 거대한 픽션이다. 이런 경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관객들 또한 추론해 나가면서 보면 재밌을 것이다.
굉장히 심오하다.(웃음)
그렇긴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들 때 기본적으로 밝고, 리듬이 있는 영화이길 바랐고, 관객들도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영화라면 좋겠다. 은희와 남자들의 이상한 관계들이 찝찝하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순적인 부분들을 보여주긴 하지만, 재미있게 볼 수도 있고 위로도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작품에서 확실히 전작보다 유머가 많이 는 것 같다.
그 전에는 쓸쓸한 이야기를 쓸쓸하게 풀었다면 이제 좀 재미있게 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가볍고 즐거운 얘기를 하고 싶었다. 멜로영화를 얘기할 때, 이제는 판타지적인 요소나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아주 과장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성공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현실적인 연애이야기가 성공할 수 없는 시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내가 하고 싶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기반으로 쉽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극 중 은희가 현오, 운철과 만나는 에피소드가 매우 재미있다. 대사도 현실적이고.
둘 다 실패한 연애들에 대한 얘기다. 현오와는 좀 어렸을 때 만나서 투닥거리고 서로 이기적이고 하지만 자기반성도 하는 연애를 한다. 반면 운철과 은희는 좀 더 나이를 먹고 하는 못된 연애 같다. 헤어지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그런 거. 사회생활에서도 그런 게 좀 있지 않나. 직장에서도 말로 싸우진 않고 점잖게 얘기하지만 서로 지는 척 하면서 되게 못되게 행동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연애를 많이 하는 것 같고 나도 역시 그런 부분을 갖고 있다.
극중 여기자가 료헤이와 인터뷰를 나누다 돌연 사라진다. 이 부분의 해석을 부탁한다.
먼저 은희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녀는 료헤이가 만들어낸 등장인물을 닮았거나 어쩌면 그가 만들어낸 인물일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둘이 마치 무대 위에 있는 것처럼 서서 관객을 바라보는 느낌을 주는 이유가 그것 이다. 여기자인 현경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 또한 어쩌면 그녀도 료헤이가 만들어낸 인물일 수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했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 지도록.
서울예대 영화과 출신이시다. 어떻게 감독의 꿈을 갖게 됐나.
일을 하다가 나이를 먹고 20대 중후반에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 서울예대는 2년 과정이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뭔가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느냐 물으면 어릴 때부터 막연히 영화가 주는 위로가 있었던 것 같다. 항상 현실을 즐기지 못하고 영화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영화가 주는 이상한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 있다. 최근에 기묘한 이야기라고 넷플릭스 영화를 보고 있는데, 내 세대에서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향수가 일더라. 80년대 미국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데 그 이야기를 보면서 내가 왜 향수가 느끼는지는 모르겠다.(웃음) 아무튼 그런 영화를 많이 보면서 공감하기도 하고 그런 향수들이 계속해서 남아 결국 영화감독이 됐다.
그 동안 사랑과 연애에 관한 영화를 주로 찍어왔던 것 같다.
그건 내가 관계의 불안과 같은 주제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다. 스릴러나 느와르 같은 장르영화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그런 영화들은 규모가 커 제약이 되는 부분이 많다. 연애 영화만 찍고 싶고, 그에 대한 욕심이 있기보다는 간단하게 찍을 수 있는 영화를 찍어야 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한정된 조건 속에서 두 사람만 가지고 그 안에 생겨나는 일들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에 집중하게 된거다. 연애 영화를 통해서 연애만 말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단편 영화로 이름을 알린 감독이시다. <조금만 더 가까이>의 경우에도 장편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다섯 커플의 단편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 같은 영화다. 이번 영화도 어찌 보면 은희가 3명의 남자와 만나는 각각의 단편 이야기 같다.
한시적인 것, 한정적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취향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이야기만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른 구조나 취향을 드러내는 영화도 준비하는데, 그걸 상업영화로 만드는 과정이 쉽지가 않다. 상당히 오래 걸리고 투자 문제도 어렵기 때문에. 취향도 분명 갖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저예산으로 쉽게 찍을 수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감독이기도 하시지만, 책을 여러 권 쓴 작가이기도 하다.
영화는 한 편을 만드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다 보니 중간중간에 글을 쓰게 된 거다. 책이든영화든 내게는 창의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찾고 싶다.
영화를 만드는 것과 글을 쓰는 일은 어떻게 다르던가.
영화는 일단 만드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웃음) 글과 달리 영화는 여러 창작자들을 만나서 그들이 만들어낸 좋은 것들을 선택해 만들어 낸다. 결과적으로 영화 감독에게는 좋은 선택을 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내 안에서 나오는 발상들만을 쓰는 게 아니라 남에게서 온 것들을 조합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또 영화의 완성 과정은 사회적인 시스템 안에서 여러 사람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게도 사회성을 많이 필요로 한다.
영화 감독으로 살게 되어 행복한가.
고단하다. 창작이라는 게. 내가 썩 잘 풀리는 감독도 아니고.(웃음) 이제 여러 작품을 찍다 보니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늘어나긴 했지만. 참 고단한 작업이지만 그래도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보면 자기만족을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내게는 영화나 창작을 통해 뭔가 닿고 싶은 곳이 있는 것이다. 아직 닿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어딘가에 닿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 속 에서 즐거움보다는 고단함이 더 많은 것 같다. 아직 시작점에 있다.
얘기를 듣다 보니 극 중 료헤이의 출판기념회가 휑하게 치러지는 장면이 생각난다. 실제 경험인가? (웃음)
그렇게 나쁜 기억까지는 없다. (웃음) <최악의 하루>가 내가 한 영화 중 가장 큰 영화라 할 수 있는데 그 전에 독립영화를 하면서는 비슷한 일이 있긴 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적은 관객들과 만날 수 밖에 없는 영화를 하면서 작은 상영회도 많이 다녔는데, 그러면 창작적으로 고단한 일들이 굉장히 많이 생긴다. 그런 경험에서 느껴진 것들을 담았다.
멍 때리거나 주로 책 많이 읽고 또 많이 걷는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는 여행을 많이 다닌다. 술도 먹고. 그래도 계속 창작적인 긴장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 계속 뭔가를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좀 부지런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언론 시사회를 하면서 지인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보고, 영화 끝나고 뒤풀이 술자리에 사람들이 많이 왔을 때. 그 분들께서 재밌다고 말씀해주셨는데, 내 느낌에 빈말이 아닌 느낌으로 말을 해주니까 단순한 대답이긴 하지만 그 때 행복했다. 격려 받고 축하 받는 다는 것이 행복한 일이다.
영화와 관련된 것 말고 개인적인 순간 중에는 없는가.
굉장히 많다.(웃음) 사실 영화 때문에 행복한 것보다는 개인적인 이유로 행복한 때가 훨씬 많다. 계절이 바뀌는 걸 볼 때, 맛있는 커피를 마실 때, 좋은 곳에 갔을 때, 좋은 걸 봤을 때 모두 행복하다.
2016년 8월 31일 수요일 | 글_류지연 기자 (jiyeon88@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imovist.com)
사진_김재윤 실장(Z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