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아직 기네. 영화 때문에 기른 게 아니었나?
관객 분들에게 견자의 여운을 조금 더 드리려고 아직 안 자르고 있다. 앞으로 무대 인사를 다닐 텐데, 조금이라도 더 견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찾아뵙고 싶었다.
이렇게 기른 건 처음 보는데, 어떤가?
불편해 죽겠다.(웃음) 내가 드라이 해 가면서 머리를 손질 하는 성격이 못 된다. 그래서 요새 모자를 자주 애용하고 있다.
영화는 어떻게 봤나? 사실 비중이 그렇게 큰 줄 몰랐는데, 실질적인 주연이더라. 비중이 큰 걸 알고 들어간 건가, 아니면 중간에 더 늘어난 부분이 있는 건가.
원래 이야기가 견자 중심으로 가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 씬이 편집이 많이 안 돼서 조금 더 커 보이는 느낌도 있다. 영화는 언론배급 시사회 때 처음 봤는데, 그 때는 긴장을 너무 해서 내 것만 봤다. 감독님도 아셨는지, “자, 모두 자기 것만 보기!” 이러시더라.(웃음) 0.1초가 1초처럼 느끼질 정도로 숨죽이며 봤다. 어떻게 봤냐고? 아쉽지. 그런데 솔직히 지금 다시 하라고 해도 그만큼 잘 해 낼 자신이 없다. 워낙 후회 없이 했기 때문에. 다만, 견자가 내적 갈등이 많은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갈등을 조금 더 안고 갔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한다.
말한 대로, 견자는 내적 갈등이 복잡한 인물이다. 서자 신분으로 인해 사회에 대한 ‘반항심’이 가득 차 있는데, 아버지 죽음으로 이몽학(차승원)에 대한 ‘복수심’이 더해진다. 백지(한지혜)를 만난 후에는 그녀가 이몽학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또 얹는다. 감정 기복이 굉장히 큰 인물이지. 표현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감정이 어떤 건가.
서자 신분으로 지니는 울분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가장 오래 걸렸다. 지금 시대에는 느낄 수 없는 아픔이니까. 그래서 견자가 길을 떠나는 계기가 되는 첫 번째 시퀀스까지가 힘들었다. 감독님도 그랬다. “여기까지는 숙명이고, 그 뒤에부터는 운명이다. 운명은 네가 개척해 나가는 거지만, 숙명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뭔가를 확실히 만들고 가야 한다”고. 그래서 서열로서 차별받는 견자의 한과 열등감을 이해하려고 초반에 노력을 많이 했다. 견자는 처음부터 많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캐릭터다. 감독님이 “이 영화는 마지막에 무지하게 뜨거운 온도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0도에서 시작하면 원하는 만큼 못 올라간다. 초반부터 비등점을 높게 잡고 가야 뜨거운 온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 온도를 높게 할 수 있는 건, 견자 밖에 없다”고 하셨다. 황정학은 다소 느긋한 남자고, 이몽학은 굉장히 쿨하고 차가운 남자니까.
안 그래도, 견자의 감정이 첫 등장 씬부터 높게 올라가 있어서 뭔가 디렉션이 있었나 하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핫’하게 있을 것을 주문하셔서 감정을 높게 잡고 갔다.
62회 차 촬영에서 한 회도 빠짐없이 모두 출석했다고 들었다.
영화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 같다. 영화라는 게, 여러 사람의 퍼즐을 맞추는 거잖나. 나 외에 다른 분들은 모두 최고의 배우들이었기 때문에 완벽한 톱니바퀴를 위해서는 내 톱니바퀴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촬영이 없는 날에도 나가서 형님들과 선생님들이 연기하는 걸 지켜봤다.
리듬을 타는데, 많은 도움이 됐겠다.
그렇지. 몰입도도 있고. 무엇보다 집중력을 잃지 않으니까 도움이 많이 됐다.
현장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겠는걸.
에헤헤헤.(부끄러운 웃음)
많이 받는 질문일 것 같은데, 이 영화가 <왕의 남자>(이준기의 ‘공길’역), <즐거운 인생>(장근석의 ‘현준’역)에 이어 세 번째로 도전한 이준익 감독님 작품이다.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 오디션에서 낙마를 했지. 그때는 아쉬웠다. 아쉽고, 아프고. 종종 “<왕의 남자>가 천만 터지고, 장근석 씨가 <즐거운 인생>으로 상을 받았기 때문에 더 배가 아프지 않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것 보다는 내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더 컸다. 나름 자신감이 있었는데, 떨어지니까 내가 아직 멀었구나라는 걸 깨달은 거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철도 들었고, 성장도 했다고 본다. 그 다음 작품에 더 열심히 임하려는 원동력을 얻기도 했고.
어느 날, 감독님이 부르셔서 갔는데, 시나리오를 주시면서 바로 “너 하자!”이러시더라.
오디션장에서였나?
아니. 오디션을 따로 보지는 않았다. 감독님이 “더 이상 오디션 볼 거 없다”면서 “너 하자” 이러셨다. 순간 어안이 벙벙하더라. 작품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바로 캐스팅 될 줄은 몰랐거든.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부담도 있었다. 준기 형과 근석이 형이 너무 잘했기 때문에. 또 두 분 다 상도 받았잖나. 그래도 내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했다.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 모두 최종에서 떨어졌다. 그래서 더 아쉽고 아픔도 컸을 텐데, 계속 도전했다. 원래 끈기가 있는 편인가? 연기 말고 다른 것에도?
아니. 유일하게 끈기 있게 하는 게 연기다. 다른 건 한 달 이상을 못 한다. 어머니가 “너는 배우 안 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이러실 정도로 굉장히 무감각하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그런데 이상하게 연기에 있어서는 지고 싶지 않은 욕구가 굉장히 강하다. 인정받고 싶고, 더 잘 하고 싶고. 다른 곳에 있어야 할 욕구가 다 여기로 모인 것 같다.
천직인 셈이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박흥용 화백의 만화가 원작이다. 원작은 봤나?
캐스팅 되고 나서 봤다.
원작이 있는 경우, 아무래도 고정 팬들의 기대라는 게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배우와 원작 캐릭터간의 싱크로율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지. 그런 면에서 외모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원작 속, 견자는 아랫입술이 상당히 두껍고 몸집도 크니까.
만화에서 견자는 온몸이 근육질인데다가 얼굴도 정말 짐승처럼 생겼다. 그러니 외모는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이상을 한다는 건 흉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내가 견자로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하고 고민을 했는데, 성장통이더라. 견자라는 인물은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치는 인물이다. 계속 넘어지고 깨지면서 성장하는데, 그런 모습은 내가 겪었던 거니까. 지금도 겪고 있고.
연기자로서의 당신과 비슷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내게도 어떤 작품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고,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닐 때가 있었다. 길을 못 찾고 방황했던 나처럼, 견자도 서자라는 신분에 갇혀서 방황하던 존재다. 그래서 더 동정심이 갔고, 더 애착이 갔다. 그런 동질감들이 내가 견자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점이 아니었나 싶다. 또 영화에서 황정학(황정민)이 견자를 이끌어 주잖나. 은유이긴 한데, ‘오른쪽은 술 한 잔, 왼쪽은 이몽학!’이 있다고 치자. 황정학은 견자가 결국에는 왼쪽으로 갈 거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끊임없이 알려주는데, 그게 많이 와 닿았다. 나도 여유 없이 앞만 보고 달리려고 했거든. 그리고 ‘빨리 달리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고 알려준 게, 또 황정학을 연기한 정민이 형이다. 그래서 감정이입이 더 됐던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비슷한 반면, 당신과 견자에겐 굉장히 다른 게 하나 있다. 백지가 견자에게 이렇게 말하잖나. “넌 꿈이 없기 때문에 이몽학을 이길 수가 없어!”라고.
맞다. 그런데, 나는 꿈이 있으니까. 견자는 정말 불상한 아이다. “이 나라 왕도 서자야! 언제까지 꿈 없이 살래!”라고 하는 아버지 말씀을 듣고 이제야 꿈을 가지려고 하는데, 이몽학이 나타나서 가족을 해체시켜 버린다. 꿈을 가지기도 전에 목표가 생겨버린 거지. 이몽학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목표가.
집은 나왔을 거다.
그 후엔? 홍길동이 됐을까?(웃음)
하하. 자기만의 꿈을 위해 살아갔을 거다. 그게 꼭 입신양명은 아니더라도, 뭔가 의미 있는 길을 찾았겠지. 결코 멍청한 친구는 아니니까.
“넌 꿈이 없기 때문에 이몽학을 이길 수가 없어!”와 관련해서 다시 묻자면, 감독님이 꿈이 없는 견자를 통해 88만원 세대인 지금의 젊은 세대를 반추하려 했다고 들었다.
이제, 바뀌셨다.
뭘로?
‘약정 세대’로 바뀌셨다. 비슷한 건데 요즘 젊은이들 대부분이 뭔가를 갚아야 하는 할부나 약정 같은 것에 걸려 있잖나. 그것에 묶여서 살고. 견자도 똑같다. 아버지라는 약정을 깨고 나오려고 하는데, 이몽학이라는 약정에 걸려서 마지막까지 가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황정민 씨가 맡은 황정학 같은 경우는 인생을 달관한 듯한 인물이고, 차승원씨가 맡은 이몽학은 세상을 바꾸려는 야망이 조금 더 강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견자는 어떨까? 개인적으로 견자가 어른이 되면, 황정학보다 이몽학에 가까운 캐릭터로 가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해 봤는데, 더 살았으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지금 당장 견자의 논리는 ‘대동 세상은 없다’다. 이게 견자와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이다. 황정학과 이몽학은 대동사상은 있는데, 그걸 보는 관점이 다른 거고, 견자는 아예 ‘대동사상은 없다. 네가 그걸 봤냐?’ 이런 거고.
허무주의군.
요즘 젊은이들과 비슷하다. 굉장히 방관적인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개인주의. “네가 날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너를 건드리지 않았을 텐데”, “네가 말하는 대동사상이 뭐길래 나를 건드리냐. 네가 그걸 봤냐?” 이게 견자의 논리였던 것 같다.
디테일하게 생각 한 걸 보니, 견자에게 상당히 이입해서 살았을 것 같은 느낌이 온다. 어땠나? 촬영 당시.
많이 격해져 있었다. 항상 뜨거웠고. 심지어 매니저 형이 나를 무서워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혼자서 대사를 중얼중얼 거리니까. 미친놈처럼.(웃음) 대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으니까 항상 견자랑 대화를 했다. 그 때는 내가 봐도 내가 어떻게 됐나 싶었다.
촬영 끝나고, 견자와 이별할 때 많이 서운했겠다.
아이~ 후련했다.(웃음) 애를 이제 못 본다는 섭섭함도 있었지만, 내 위에 너무 많은 짐이 있었기 때문에 끝나는 순간 후련했다. 그런데 눈물은 나더라.
영화 속에서 견자가 그나마 풀어지는 순간이 황정학과 함께 할 때였다. 황정민 씨와 드라마 <그저 바라 보다가>(이하 <그바보>)로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연기가 더 편하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싶다.
맞다. 개인적으로 형님하고 연기하는 건, 정말… 아~ 정말 어떤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그바보>때부터 형님을 너무 존경했고, 형님처럼 되고 싶었고, 형님에게 영향도 너무 많이 받았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내가 어느 길을 가야 할지 혼란스러워 할 때, 길을 제시 해 주신 분이다. 내가 운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인복은 있는 것 같다.
인복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고등학교 1학년 때, 연기자를 계속 할 것이냐, 공부를 할 것이냐는 고민을 했었다. 그 때 (조)승우 형이 나타났다. “넌, 배우를 해라~” 지시를 받는 것 같았다.(웃음) 승우 형 연기 하는 걸 보는 순간. “(감탄) 아~!”
승우 형이 연기하는 걸 볼 때 마다, 거기엔 뭔가 더 큰 세상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승우 형이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과 뭔가 다를 것 같다는 그런 이상한 환상이 있었다. 그 환상은 지금도 있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게 나도 너무 궁금하다. 그래서 그 세상을 보고 싶어서 지금 계속 가는 거다.
그때 왜 고민했나? 공부를 할까, 연기를 할까.
고등학교를 올라왔는데, 공부해서 소아과 의사가 너무 되고 싶은 거다.
소아과 의사?
내가 어린 아이를 너무 좋아해서 아이들 아픈 걸 고쳐주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을 했는데, 그 때 승우 형을 만난 거다. 감사한 일이지. 또 그 시기가 지나서 배우로서 방황하고 있을 시기에 감사하게도 정민이 형을 만났다. 이번 작품으로 (차)승원이 형을 뵌 것도 나에게는 굉장히 큰 행운이다. 정민이 형 것만 보지 않고, 승원이 형 것도 많이 봤거든.
두 분이 굉장히 다른 느낌이지.
나도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걸 배운 거지. 감독님께서 승원이 형은 내비게이션을 가지고 아스팔트 위의 도로를 정확하게 질주하는 스포츠카고, 정민형은 ‘와~앙~ 파악!’ 하면서 거친 오프로드를 달리는 에스유브(SUV)같은 연기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도로를 달리다가 오프로드로도 빠져서 질주했다가 다시 아스팔트로 올라와서 내비게이션 달고 정확하게 연기하는 그런 배우가 돼라”고 말씀해 주셨다.
대단한 조언이군.(웃음)
하하. 그래서 그 마음을 가지고 형들에게 많이 배우려고 했다.
아역배우로 시작해서 연기를 벌써 16년 했다. 그런데 사실, 어렸을 때는 배우라는 것에 대해 뚜렷한 자의식이 없잖은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 느끼게 되는 건데, 당신은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느꼈나? 아니면 아직도 찾고 있는 중인가.
왔다. <마라톤> 하면서부터 느꼈다.
일찍 느낀 편이다.
그런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사고가 계속 확장 돼 나가지 않나. 내 사고가 확장되는 만큼, 연기에 대한 사고도 확장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지금도 계속 확장이 돼 가고 있는 중인데, 내 경우에는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부터 연기에 대해 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조숙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빠른 선택을 강요받았으니까. 선택을 강요당한 거다, 나는.
강요? 누구한테?
내 스스로가 나에게. 어영부영은 못하거든, 나는. 연기를 하면 성적이 안 나오고. 그렇다고 두 개를 다 잡기에는 너무 힘들고. 물론 학생으로서의 본분은 지켰지만, 뭐가 우선인지는 정하고 싶었다. 그런 고민 끝에 결국 배우의 길을 선택한 거지. 그리고 소아과 의사는 연기에서도 할 수가 있더라고.
현답이네. 그때부터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서 흔들린 적이 없나.
그랬다. 그 다음부터는 연기를 잘 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연기에 대한 욕심도 그때부터 점점 커졌다.
어느 순간 갑자기 어른이 돼서 나타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굿바이 새드니스’ 뮤직비디오를 보고 당신이 ‘언제 저렇게 컸나’ 하고 놀랐었다. 그런데 그건, 내가 본 느낌이고. 당신은 언제, 스스로가 성장했다고 느꼈나?
어른이야 일찍이 돼 있었지. 주민등록증을 받은 순간부터 나는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봐 주지 않더라. 참 재미있는 게, 작품을 하지 않는 배우는 보일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봐 주지 않으면 또 작품을 할 수가 없다. 그러면 항상 아이로만 남아있게 된다. 당시에 내가 그런 시기에 있었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그런 상태. 그때 나를 도와주신 게 ‘굿바이 새드니스’의 창 감독님이다. 그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많은 분들이 “어? 뭐냐, 쟤? 쟤도 성장을 했구나” 하면서 봐 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후에 <코끼리> <울 학교 이티>도 하고, <시드니 인 러브>라는 단편 무비도 찍고 그랬던 것 같다. 창 감독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아역 이미지에 갇혀 있었을 거다. 다들 그랬다, 나에게. “너는 언젠가 될 거야!”, “너는 연기에 욕심이 많으니까, 언젠가 알아 봐 줄 거야. 나랑도 언젠가 하자” 그런데 정작 써 주지는 않았다. 싫었다, 그런 게! 아팠다!
말 뿐인 줄 알았나?
걱정은 해 주는데, 정작 말만이었던 거지. 그 때가 나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였고, 또 가장 성장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단단해졌다고 해야 하나? 내 스스로가.
그런데 말만이지 않았다 싶은 게, 그 중에 한 명이 이준익 감독님 아니었나? <왕의 남자>와 <즐거운 인생>때 “언젠가 함께 하자”고 하신 걸로 아는데, 진짜로 해 주셨잖나.
감독님 같은 분만 계시면 세상이 얼마나 밝을까 싶다. 정말 행복해 지겠지.(웃음) 이번 영화가 더 의미 있는 이유도 그거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너무 부담스러워 하니까, 정민이 형이 “야! 네가 견자로 캐스팅 된 이상 견자는 이 세상에 너 한 사람 뿐이야. 자신감을 갖되, 스스로를 속이는 연기는 하지 말라. 최선을 다 했는지 아닌지는 너만이 아는 거니까 감독님이 아무리 오케이를 하시더라도 거기에 만족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 말씀을 영화 끝나는 날까지 잊지 않고, 매 씬 매 컷 마다 내 자신에게 물었다. “너, 정말 이 씬 지나가도 후회 없겠냐? 어떻게 생각해? 잘 했어?”, “어, 했어!”, “그러면 오케이야?”, “어! 이번 건 오케이!” 이런 식으로 매번 진행 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을 납득시키는 게 가장 힘들었다. 솔직히 이번 영화는 내가 가진 능력보다 넘치는 그릇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든 안 넘치게 하려니까 더 힘이 들었던 거다. 오죽하면 영화 끝나고 후련하다고 했을까.(웃음)
울분을 토하는 장면들 대부분에서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 돌아 가셨을 때도, 내가 서고에서 뛰쳐나와서 울잖나. 그 장면만 열 번 정도 했다. 감독님이 세 번째에 오케이 하셨는데, 아니라고,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고 감독님에게 재촬영을 부탁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감독님이 어디 인터뷰에서 말씀을 하셨더라. 내가 울면서 와 가지고 “한 번만 더 할게요~ 흑흑흑”이랬다고.(웃음)
(웃음)나는 지금 배우 백성현과 앉아 있는데, 굉장히 행복해 보이고, 연기에 대한 욕심도 많아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평소의 백성현이 궁금한데, 배우 백성현과, 인간 백성현의 가장 큰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나.
집중력! 아우~ 내가 평소에는 건망증이 진짜 심하다. 눈앞에 보이는 것도 놓고 가고.(웃음) 그럴 정도로 평소에는 집중을 안 하고 산다. 굉장히 무감각하기도 하고. 또 뭔가를 사고 싶다는 욕심도, 갖고 싶다는 욕심도 없다. 그냥 멍~ 때리고 있지. 하하하. 글쎄. 백성현은… 내 입으로 나에 대해서 말하려니까. 그냥 운동 좋아하고, 영화 좋아하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그런다.
사람을 깊고 좁게 만나는 스타일인가 보다.
대신 연을 한 번 맺으면 오래 가는 스타일이다.
보통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되는데. 어째 벌써부터.(웃음)
하하하. 귀찮아서~ 귀찮아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려면 열과 성의를 보여야 하잖나. 그런데 그게, 아이고~ 힘들다.(웃음)
그런 사람은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끌리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 안 하는 사람.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감이 약간 생겼다. 대화를 나눠 보면 어떤 사람인지가 대충 느낌이 오는 거지. ‘이 사람은 내가 믿고 마음을 열어도 되겠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애초에 마음의 문이 안 열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게 조금 생긴 것 같다. 내 스스로의 기준점. 이건 안 좋은 건데. 그래서 형들도 그런다. 조금 편안하게 생각하고 다양하게 만나라고.
배우라는 직업 때문에 사람을 더 가리게 된 게 아닐까? 사람들이 인간 백성현이 아닌, 배우 백성현을 보고 다가오지 않나 하는 생각들 때문에 말이다.
이 작품 끝나면 더 그럴 것 같다. 이제까지는 내가 뭔가 크게 보여 준 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크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아마 내 성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떤 것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인가.
잘 속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속았다고 생각하나.
아니. 지금까지도 안 속았는데, 더 안 속을 것 같다.
좋게 말하면 현명해지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영악해 지는 건데.
어떻게 보면 사람을 재는 거지.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하면서.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무슨 나쁜 마음을 먹고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웃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언젠가 또 다른 감이 오는 순간이 올 거다. 지금은 아닌 것 같으면 무조건 닫는데, ‘밑지더라도 한 번 더 열어볼까’ 하는 순간이 말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게 아닐까 싶다.
(고개를 끄덕이면)그 때를 위해서 사람을 많이 만나봐야겠다.(웃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하면 어떤 날씨가 떠오르나. 개인적으로는 감이 잘 안 잡힌다. 흐린 날 같기도 하고, 굉장히 맑은 날 같기도 하고.
맞다. 구르믈 버서난 ‘(강조)달처럼’에서 마지막의 ‘달처럼’에 의미를 두면, 밝은 느낌이고. ‘(강조)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러면 구름이 약간 낀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런데 나는 영화를 찍었으니까, 우리 영화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아픈 사람들에게 치유의 빛을 주는 그런 의도를 지닌 영화라고 생각한다.(웃음)
구름은 달 뿐 아니라 햇빛도 가린다. 구름이 해를 가릴 때와 달을 가릴 때는 미묘한 차이가 있지. 본인이 생각하기에 당신은 해와 달 중 어느 쪽에 더 가깝나?
음… 일단 견자는 태양이다. 견자라는 인물은 굉장히 주도적인 인물인 것 같다. 아까 잠시 얘기했듯, 견자가 나이를 먹으면 이몽학 같은 인물이 됐을 것 같다. 어디를 가든 수장을 하지, 밑에 있을 인물은 아니거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황정학은 달이고, 이몽학은 태양이라고. 그러니까 견자는 이몽학 같은 사람이 됐을 것 같다. 그리고 나! 인간 백성현은 황정학 같은 사람이 될 것 같다. 달 같은 사람이 말이다.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