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인터뷰가 꽤 많았죠.
어제도 하루 종일 있었고 오늘은 무비스트랑 라디오 출연이 잡혀있어요. 내일도 하루 종일 있고.
그거 다 감독님이 한다고 했던 거예요?
아니요. 저는 그냥 하라는 대로. (웃음) 박찬욱 감독님 정도 되면 “뭐가 이렇게 많냐. 힘들다, 좀 빼자.” 이러겠지만, 저야 뭐 “하세요.” 그러면 “네.” 이정도. (웃음)
그래도 좋겠다. 영화 내놓고 감독이 인터뷰 스케줄 많이 잡혀 있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닌데.
첫 장편인데 관심을 많이 가져 주시니까 감사하죠. 아직 개봉은 안한 거라서 결과는 모르지만 좋은 말씀들 많이 해주시고.
어쨌든 이렇게 첫 장편영화 내놓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요. 28살에 처음 영화 일을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감독을 선택한 남다른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원래는 연극배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공부 대신 연극을 했고 연극 영화과를 가고 싶었죠. 근데 아버지의 반대가 너무 심했어요. 어차피 연극 영화과가 아니면 딴 데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결국 아버지가 원하는 공부를 했고 러시아어과를 졸업했어요. 그 뒤로 러시아 연수도 다녀오고 그와 관련된 일을 했죠. 그러다 확신이 섰어요. 죽을 때까지 내가 이 일을 할 수는 없겠구나. 연극배우를 할지 다른 거를 할지는 모르지만 이거는 아니구나. 하지만 연극영화과를 가고 싶어도 나는 수능이 아닌 학력고사 세대였기 때문에 시험도 보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방황을 했죠. ‘나는 뭘 해야 하나...’ 그러면서 들어간 게 영화 동호회에요. 매일같이 시사회 보러 다니고, 그때 멤버들이 영화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영화에 대해 귀동냥도 많이 듣고.
거기서 뭔가가 있었군요.
여름에 술을 먹는데 사람들이 한예종 이란 댈 시험 본다고 하더라고요. 누가 원서를 냈는데 거기는 수능을 안 본다더라 하는 얘기도 듣고. 잘 됐다 싶었죠. 그리고 회사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되게 지루하고 내가 살아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잖아요.
아~~ 맞아요. (절대 공감)
그래서 자극을 받고 싶었어요. 시험을 봐서 내가 붙건 떨어지건 뭔가 충격을 받고 싶었나 봐요. 너무 재미가 없었으니까. 경쟁률이 높아서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원래 시험 보면 잘 떨어지고 안 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큰 기대 안하고 마침 시험기간이 회사 휴가기간이랑 맞아서 원서를 냈는데 3차까지 해서 붙었어요. 근데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한 번도 노력한 만큼 뭘 얻은 적이 없었거든요. 원래가 노력파인데 ‘너는 참 노력하는 만큼 못 얻는다.’라는 주변의 말만 듣다가, 너무 쉽게 뭐가 되니까 진짜 신기해서 ‘이게 운명인가 보다’ 그랬어요. 회사는 확실히 답이 아닌 게 너무 분명하니까. 그런데 다행이도 연출이 너무 재밌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쭈~~욱 하게 된 거죠.
어쨌든 잘 찾아 오셨네요. (웃음) 그런 사연으로 <미쓰 홍당무>까지 왔어요. 근데 이 영화를 얘기 하다보면 박찬욱 제작이라는 화두가 빠질 수 없어요. 미장센에서 시작한 박찬욱 감독님과의 만남에 대해 듣고 싶어요.
박찬욱 감독님이 미장센 영화제 심사위원이셨어요. 그때 제가 <잘 돼가? 무엇이든>을 사회부분에 냈었고, 그때 박 감독님이 그 영화를 굉장히 맘에 들어 하셨어요. 마침 감독님이 회사를 차리셨을 때여서, 자기 회사에서 장편을 입봉 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나는 그때 연출부를 꼭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연출부를 하고 영화를 하고 싶다 말씀드렸더니, 그럼 지금 <친절한 금자씨>를 하고 있으니까 거기서 스크립터를 하고 영화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하셨어요. 저한테는 최고의 제안이었죠. 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금자씨 끝나고 감독 계약을 했고 홍당무 준비해서 오게 된 거죠.
뭐가 그렇게 맘에 드셨대요?
일단 박 감독님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래요. 근데 유머 코드가 자기와 맞았데요. 배우들의 연기를 끌어내는 부분도 마음에 드셨고.
보는 눈이 남다르시니까. 뭐.. 어련히 알아서. (웃음)
그렇죠. (웃음)
요즘 박찬욱 감독님이랑 같이 진행되는 인터뷰가 많았어요. 같이 할 때는 어떠세요?
편해요.
아~? 그게 더 편하세요?
혼자서 할 때는 혼자서 다 말해야 하니까 조금 소모량이 있는데, 같이 할 때는 옆에서 내가 정신 놓으면 잘 챙겨주니까. (웃음) 어제는 저녁 7시정도 되니까 제가 정신을 놓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질문 못 알아듣고 딴 소리하고. 그러다 결국 박 감독님한테 숟가락으로 맞았어요. “정신 좀 차려~! 왜 자꾸 헤매~~.” 했던 말 또 하고 질문에 딴 대답하고... “죄송해요. 질문 까먹었어요.” 100번 말하고. (웃음)
하하하. 상상하니까 진짜 웃기다.
그래도 뭐.. 영화 찍을 때 힘든 거에 비하면 인터뷰는 식은 죽 먹기죠.
이 감독님이 정신 놓지 않기를 바라면서.. (웃음) <미쓰 홍당무>에서 공효진의 캐스팅이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퍼펙트 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처음에 미숙으로 공효진을 선택한 이유는 뭐였는지.
시나리오 캐릭터가 너무 세서 여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건네기가 쉽지 않았어요. 캐릭터가 워낙 강하고 모험을 해야 하니까 여배우들이 마음을 열기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 했고요. 초반부터 효진씨 얘기는 나왔는데 그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나, 그 방법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죠. 그래서 효진씨 만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고요. 근데 누가 다리를 놔 줘서 효진씨를 만났는데, 효진씨는 시나리오를 읽고 그다지 호감을 보이지 않았어요. 근데 나는 시나리오가 나오면 시나리오 팔자가 정해진다더니 이게 이 사람이고 인연인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노력을 많이 했죠. 어떻게든 마음을 사보려고.
어떻게 노력을 하셨어요?
고민을 되게 많이 했어요. 정말로 미숙이가 서종철에 대한 마음으로 안절부절 하는 것처럼 내가 효진씨한테 그랬어요. (웃음) ‘내가 너무 적극적으로 하면 도망가지 않을까?’ ‘내가 그렇다고 효진씨에게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무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휴...
영화 속 미숙이의 대사처럼? (웃음)
그렇게 정말 안절부절 하면서 공을 들였어요.
결국 결정한 이유는 뭐래요?
맨 처음에는 그랬어요. 자기가 이 영화를 하면 너무 딱 인 것 같아서 오히려 재미없지 않겠냐. 자기는 미숙이를 잘 모르겠다. 미숙이 너무 이상한 애다. 근데 그러더라고요. 미숙이가 너무 이상해서 하기 싫은데, 미숙이만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나온대요. 그래서 자기처럼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미숙이를 보면 그런 게 생길 것 같다는 거예요.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딱 꼬집어 이유를 말하기는 그런데 웃음이 나는 건 맞아요.
또 효진씨가 고민을 많이 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 당시에 연기 변신에 대한 욕심이 많았는데 너무 모험적인 인물이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효진씨가 되게 조심스럽거든요. 홍당무에서는 뭔가 결정을 내릴 때 고민을 많이 하고 그랬어요. 자기는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데 홍당무 때는 고양이가 물에 발을 담글까 말까 하다가 폭 담그는 것처럼 오랫동안 담금질을 했죠.
약간 속을 썩인 듯?
아니요. 속을 썩이지는 않았어요. 그냥 제가 혼자 애가 탔죠. 어떤 사람을 너무 잡고 싶으면 상대방은 평범하게 행동해도 내가 약자고 원하는 사람이니까 혼자서 애가 끓잖아요. 그런 거였죠.
결과적으로는 효진씨도 좋을 것 같아요. (웃음) 근데 <미쓰 홍당무>를 보면 현실과 만화적인 요소가 섞여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질투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현실적인데 그들의 태도는 굉장히 판타스틱 하거든요. 특별히 정상적인 인물도 없는 것 같고, 어학실 에서의 상황도 일반적이지 않아요.
<미쓰 홍당무>는 처음 구상 때부터 ‘미숙이를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 일념하나로 시작을 했어요. ‘양양을 소개합니다...’ 그런 양양을 소개하려는 내 마음의 시작은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라는 거였어요. 그러다 보니 모든 인물들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요. 근데 영화를 보고나서 그 사람들이 다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잖아요.
나름 다 이유가 있죠.
영화를 보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편견과 상식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살다보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매도하기 보다는 ‘저 사람은 왜 저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게 됐을까?’를 한번쯤 생각해 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점점 소통이 어려워지는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조금 소통의 숨통이 트이는 어떤 게 생기지 않을까하는 바램도 있었고요. 근데 인물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너무 관객들과 동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운 감정들을 넣어준 거죠. 짝사랑의 감정이라든지, 부모님의 이혼이 싫어서 고군분투하는 딸의 마음이라든지. 사랑이 안돼서 속상한 마음, 질투하는 마음 등. 너무 감정이 동떨어지지 않고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많이 겪어본 감정들을 넣어 준 거예요.
영화에서 현실적이게 느꼈던 것 중 하나는 학생들이 나오는 부분이에요. 애들이 카메라 없는데서 지들끼리 놀고, 나중에 배우들을 끼워 넣은 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자연스러운 장면들이 많아요.
찍을 때 ‘너는 졸고 있고, 너는 어떻게 하고’ 다 지정해 줬어요. (웃음)
그랬구나. 특히 명상시간 반 전체를 비출 때 맨 앞자리에 앉아서, 체육복 바지 위에 교복치마 입고 다리 떠는 학생은 딱 요즘 학생의 모습이더라고요. (웃음) 상반신은 명상으로 정화하고 있고 하반신은 다리 떨고 있고. 보면서 저게 저 학생의 본심인지 의도한 건지.
못 본사람 많은데 그걸 어떻게 보셨네? (웃음) 그 애 옷을 입힌 건 내가 의도한 건데 다리 떠는 건 그 애가 했어요. 학생들 중에 유일하게 내가 만든 디테일이 아니라 본인이 한 거죠. 맨 처음에는 더 심했어요. 내가 그 학생한테 처음에 마스크를 씌웠는데 마스크 쓰고 다리 떠니까 너무 눈에 띄는 거예요. 그래서 마스크 벗기고 다리를 떨게 했죠. (웃음) 그게 진짜 살아있는 디테일이지..
리얼했어요. 정말 졸리고 따분한 것들을 싫어하는 요즘 학생 같아서. 근데 대체 ‘라이타’ 란 뜻의 러시아어는 어떻게 넣을 생각을 한 거예요? 러시아어 학과 나오셨다니까 이해가 좀 되기는 하는데, 사실 캐릭터가 전대미문이 아니라 노골적이다 못해 외설스러운 그 단어가 전대미문이었어요.
시나리오를 쓸 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나 격식, 상식 같은 거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아니다. 안 돼.’ 하는 것들에 대해 ‘그게 뭐 어때서?’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고 싶다는 욕구요. 그 중하나가 성에 관한 거였어요.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거. 자기들도 다 결혼해서 애 낳고, 처녀 총각 때 다들 신부 수녀처럼 지낸 것도 아니면서, 말하고 보여주는 것은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마치 자기네들은 안 그런 것 인냥. 그리고 사실은 그런 것들이 성 부분에 심의 등급을 매기는데 관련이 되니까 좀 짜증이 나기도 했고요.
짜증이 났던 계기가 있어요?
제가 시나리오를 쓸 때 ‘존 카메론 미첼’의 <숏버스>라는 영화를 봤어요. 정말 감명을 받았는데, 그 영화에서는 모든 성행위가 다 나와요. 성기 노출은 기본이고. 근데 사랑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너무 아름다워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어요. 그때 ‘존 카메론 비첼’이 ‘강간을 다루는 영화는 상영이 되면서 사랑을 나누는 영화는 왜 상영이 안 되냐’고 했었거든요. 부끄럽더라고요. ‘왜 강간은 되고 사랑은 안 돼?’ 그때 그런 반발심. 신경질이 났었어요. 그래서 ‘이런 게 뭐 어때서?’ 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치부 시 되는 것들을 가지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그런 걸 만들고 싶다는 게 포부였어요. 근데 진짜로 청소년 관람불가가 나올 줄은 몰랐죠.
청소년 관람불가 이유는 총체적인 부분이었어요. 사제지간의 부적절한 관계나.. 뭐 아무튼 내 예상대로 사람들이,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엄격하게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정말로 안 되게 재단을 한 거예요. ‘선생이 어떻게 학생과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아니~ 선생이 나이 값을 해야지 선생 대접을 받지, 나이 값을 못하는 사람이니까 영화에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런 이해심이 없더라고요.
아마도 종희가 양 선생님 따귀를 때리는 그런 장면들도 포함 됐을 거예요.
포함이 될 거예요. 아니~ 근데 내가 학생이라도, 선생님이지만 우리 아빠랑 잔 여자면 따귀 때리겠다. 열 받는데.
그 상황에서 종희는 미숙이 선생님이란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정말 많은 것들을 사제지간을 떠나서 함께한 사이니까. 그 과정을 보면 종희의 행동이 이해가 가는데, 그 장면만 딱 끄집어내서 보면 이해가 안 된다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를 용납을 못하신 거죠. 우리 등급 위원들께서.
다행이었던 건 라이타 장면을 어떤 애가 보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거예요. 또 서종철 선생이 복도에서 여자 빨간 팬티를 들고 있는데도 학생들이 별 반응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려요. 결국 둘 다 흔한 소문의 매개로 변질되지 않죠. 시나리오 작업 하면서 그 부분으로 뭔가를 엮을 까 고민했던 게 있었는지.
아니에요. 딱 그 정도의 수위만 생각했어요. 라이타 장면을 예로 들면, 숨어서 보는 그 애 이름이 시나리오 상에 햄스터였는데 처음에는 그 역할이 없었어요. 근데 종희 역할 오디션에 그 애가 왔거든요. 오디션을 보는데 너무 무심하고 모든 것에 재미를 못 느끼는 그 애의 얼굴이 너무 웃겨서 그걸 넣은 거예요. (웃음) 시나리오에 햄스터라고 쓴 건 그 애가 햄스터를 닮았기 때문이고. 원래 없던 걸 넣은 거라서 그 정도 수위가 적당했어요. 거기서 좀 더 극적 반전을 주면 재미없었을 거 같아.
맞아요. 식상했을 거 같아. 유리가 소문으로 인해 뭐 어떻게 되고 그랬으면 감독님 인터뷰하러 안 왔을지도 몰라요.
(웃음)
근데 영화 보고 나서, 미숙이가 마지막에 좀 더 달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부과 의사에게 가서 “너 참 마음에 든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종희 엄마가 종철을 꼬셨을 때 했던 말이거든요. 미숙은 종철을 잊고 새 출발하겠다고 한 상황인데 같은 방법을 답습하는 것 같아 보여서.
미숙이는 은교가 되게 부러울 것 같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결국은 가졌고 종철이 그 여자에게서 벗어나지 않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미숙이가 유리처럼 머리를 바꾸잖아요. 그것도 유리가 너무 싫은데, 너무 싫은 이유가 유리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거든요. 그것처럼 미숙이가 ‘난 니가 마음에 든다.’ 라고 은교가 했던 말을 답습하는 것은 은교가 부러웠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은교처럼 되고 싶어서. 은교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가끔 싸우기도 하겠지만,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사는 거 해 보고 싶어서. 그래서 따라하는 거 같아요.
좀 더 자신을 가꾸고 영어에 미친 듯이 몰입하는 장면도 있었으면 했어요. 영어시간에 항상 봉준호 감독 앞에서 미친 듯이 졸았으니까. 또 상투적일 수도 있겠지만, 갑작스럽게 사랑스럽지는 않아도 언젠간 사랑스러울 수도 있겠구나 하는 모습들도 좀 담겼으면.
미숙이가 천성이 있고 원래 베이스가 있는데 갑자기 너무 사랑스럽게 변하는 거는 너무 거짓말 인 것 같고, 저는 좀 현실적으로 얘기 하고 싶었어요. 어학실에서 10분 명상을 할 때 미숙이가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리고 카메라가 미숙이의 코트 벗은 몸을 훑어 주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걸 넣었던 이유는 미숙이가 이렇게 비 호감으로 어필이 되는 건 얘가 못생겨서가 아니라, 자기가 못났다는 콤플렉스에서 나오는 성격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걔가 맨 날 빨간 얼굴로 소리 지르고, 짜증내고, 화내니까 못생겨 보이고, 머리도 창피하다고 맨 날 푸르고 다니니까 지저분해 보이는 거지, 머리를 하나로 묶고 갑옷 같은 코트를 벗어 던지니까 참 예쁜 몸과 얼굴을 가진 여자애로 보이잖아요. 비록 빨갛더라도. 그래서 ‘너도 예쁜 애야’ 라는 걸 보여주는 게 내가 미숙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표현의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지막 장면도?
그 전까지는 미숙이의 빨게 지는 얼굴이 무섭고, 막말로 똥구멍에 다이너마이트 100개 꽂아 놓은 것 같은 그런 얼굴이지만 (웃음) 마지막에 ‘난 니가 마음에 든다.’ 라고 말할 때 발그레 하게 되는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럽게 느껴질 거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미숙이가 사람들 마음에 애잔하게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었어요. 그래서 언젠가 내가 살아오면서 괴롭혔던, 혹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나로 인해 상처받았던 미숙이들이 생각났으면. 그랬기 때문에 아주 해피하게 끝내는 거는 그냥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 마무리가 될 것만 같아서 그 정도로 했던 것 같아요.
막상 듣고 나니까 또 애잔해지네.
여태까지 살면서 그런 경험들은 다 있을 거예요. 누구를 왕따 시키거나 내가 왕따가 되거나. 그럴 때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 내가 왕따를 시켰던 이에게 좀 미안한 생각을 가졌으면 했어요. 애가 좀 불쌍하잖아요. 씩씩하게 살려고 그러는 것도 좀 안쓰럽고.
모든 것이 의도한 데로 다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나와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마음은 정말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거 재밌었어요. 구구절절 대사 없이 음향효과로 인물의 심리를 표현한 거.
아~ 편집하면서 장난처럼 ‘땡’을 넣자고 그랬어요. 그래서 효과음을 넣었는데 웃긴 거예요. 그래서 ‘딩동댕’도 넣을까 그랬더니 ‘아~ 감독님. 영화 후져져요~’ 그러는 거예요.(웃음)
왜~ 너무 사랑스럽던데. 그런 짧은 위트 하나가 영화를 살려주는 거지. (웃음)
그래서 난 그게 너무 웃겨 가지고 넣었지, 그냥.
이제부터 <잘 돼가? 무엇이든>에 대해서 좀 얘기해 볼게요. 여주인공 둘을 무역 회사 다니는 사람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
일단은 내가 해운회사 다녔기 때문에 그 일을 잘 알아서였어요. 그리고 서울에 있는 중소기업으로 설정한 이유는 뭔가 잘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하지만 일류가 되지 못한 그런 여자애들이, 이류의 세계에서 잘 살아 보겠다고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해서였어요.
그런 단편영화 찍을 때는 보통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시나리오는 금방 나왔고. 찍는 거는 우리가 좀 사고가 많고 그래서 두세 달 정도.
상 받을 때 좋으셨죠. 내 인생이 이런 날이 있나 싶고.
그럼요! 당근 아주 좋죠!(웃음)
혹시 배우나 스텝들 컨트롤하는데 여자 감독이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있어요?
여자이기 때문에 불편한 건 없었어요.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불편함은 있었어도.
연출에 있어 스스로가 장점이라 인지되는 것들도 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본인은 만족하기가 어려워요. 계속해봐야 알겠지만 아직까지 다행인건 내가 재밌다고 느끼는 걸 다른 사람들도 재밌다고 느끼는 거예요. 그런 건 다행인 것 같아요.
전작과 <미쓰 홍당무>는 많은 부분이 닮아있어요. 갈등관계의 여자들이 나오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여자는 자기가 주인공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을 안 하고. 그래서 더 뻔뻔스럽죠.
제가 여자 둘이 싸우는 모습을 그리는 게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재밌어요. 눈치가 없어서 본인이 상대에게 소리 없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본인이 가해자라는 것도 모르고.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고.
응. 그런 사람들은 늙지도 않아요. 스트레스를 안 받아서.,(웃음) 그런 거 보면 재밌어요.
밤새 고민하고 다음날 가서 ‘어제 그건 내가 좀 미안했고’ 그러는데, 완전 깜찍하게 ‘뭐?’ 이러는 거. (웃음)
맞아.
<잘 돼가? 무엇이든>과 <미쓰 홍당무>를 보면 모두 회사에서 잠을 자는 여자들이 나와요.
저도 그 공통점을 생각 못했는데 며칠 전 어떤 인터뷰에서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쓸 때는 모든 걸 계획 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이 많이 작용해요. ‘나는 왜 이렇게 쓸까’ 하는 걸 스스로 탐구하면서 쓰게 되거든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주인공을 외로운 사람으로 설정했잖아요. 근데 집이 없는 것만큼 외로운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렇죠.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지지고 볶고 해도 신경 쓰고, 돌봐줄 가족도 없고. 왜 이렇게 좁은 땅덩어리에서 사람들이 집을 사겠다고 난리를 치겠어요. 집이 주는 안정감이 있기 때문인데 집이 아예 없는 사람이 설정이면, 그만큼 설정 상 외로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보통 일터는 벗어나고 싶은 공간인데 오죽 머물 곳이 없으면 사람들이 가장 벗어나고 싶은 공간에서 머물겠어요. 그만큼 외로운 인물도 없다고 느껴서 제가 자꾸 그렇게 설정하는 것 같아요.
근데 홈리스처럼 보이진 않아요. (웃음)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열심히 하지 마라. 결국 상처 받는다.’가 두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가졌던 공통적인 마인드에요. 혹시 감독님 개인마인드의 영향이에요?
저는 좀 반대에요.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느끼면 너무 괴로워해요. 결과보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느끼는 것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목적이라서. 근데 잘 돼가? 의 지영이나 홍당무의 미숙이는 콤플렉스가 많고 너무 여려서 자기 방어기제가 단단한 애들이잖아요. 그래서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이죠. 뭐가 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건데, 그런 애들은 지들은 열심히 하면서 남들한테는 열심히 하지 말라고, 뭔가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얘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둘 다 콤플렉스가 있고,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 흔히 갖기 쉬운 공격성을 가진 애들이니까. 그래서 그런 이율배반적인 말들을 하는 것 같아요.
전작에서는 주인공들이 서로의 얘기를 잘 안 들어요. 그것에 비해 <미쓰 홍당무>는 갈등관계에 있는 것은 같아도 적과 물고 물리는 관계에 있어서 끈끈함이 보이거든요.
잘 돼가? 나 홍당무, 둘 다 소통을 얘기하는 건 같아요. 근데 잘 돼가? 에서는 좀 느슨하게 인물들을 지켜보는 관찰자적인 시점이 강했다면, 홍당무는 ‘여자들이 모두 화가 나서 싸운다. 여성들의 심리 난투극이다.’ 라는 것이 맨 처음 컨셉이었기 때문에 에너지가 굉장히 많고 모두가 붙었다 하면 폭발할 거 같은 에너지를 보여줘야 했어요. 그래서 서로 주고받는 대사가 중요했죠. 핑퐁처럼.
뾰족하잖아요. 대사들의 느낌이.
탁 치면 더 세게 날아오고, ‘엿 먹어라~!’ 그러면 ‘너 엿 먹어라~! 반사!!’ 이런 걸 계속하고 있죠. 애들이. (웃음)
잘 돼가? 에서 지영이 “난 글 쓸 거예요” 하니까 옆에 희진이 종이를 사정없이 구겨서 내 던져 버려요. 그때 희진은 그딴 얘기는 귀에도 안 들어온다는 표정이었는데, 종이 구기는 소리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세팅한 이유가 있었는지.
희진이 무심히 한 행동이 지영에게 ‘엿 먹어라~!’ 라는 느낌을 강하게 줬으면 좋겠어서.
지영이 울고 있을 때 희진이 지지대를 붙잡아 주는 건 별로였어요. 지지대란 의미의 의도가 너무 적나라해 보여서.
지영이와 희진이는 전혀 소통이 안 돼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희진이가 지영이 마음에 불을 질러놓고 지영이가 우니까 마치 달래주는 것처럼 앞에 앉죠. 하지만 우는 지영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지지대가 무너질까봐 걱정 하는 거예요. 끝까지 소통이 잘 안 되는 사이인 거죠.
아~ 그럼 내가 생각하는 거와 다른 거네?
그건 유머 코드였어요. (웃음)
그렇구나. 나는 지지대란 말의 어감 때문에 지지대를 붙잡아 주는 행동이 저 둘이 서로 의지하게 되는 뭔가의 방향을 보여주는 거라 생각했어요.
아니에요. 희진은 지영을 걱정한 게 아니라 지지대를 걱정한 거예요. (웃음)
미쓰 홍당무를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팁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주인공 미숙이는 뜬금없고 예측불허의 행동들을 하잖아요. 우스꽝스럽고. 그래서 미숙이를 둘러싼 주변사람들의 행동 역시 우스꽝스럽고 영화는 그거 때문에 많은 웃음을 주죠. 근데 영화를 보면서 얘네 들이 뭐 땜에 이렇게 처절하게 달려가고 있는가를, 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보면 그냥 웃기기만 하지 않아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내가 웃으면 웃을수록 마음에 쓸쓸함이 생기는 그런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영화를 두 번 보면 다르다고 말씀 드리거든요. 영화를 처음 봤을 땐 캐릭터들이나 재미있는 상황에 빠져서 웃느라 정신이 없어요. 근데 영화가 끝났을 때는 얘네 들의 처지나 피나는 노력들에 대해 인지를 하신단 말이에요.
생각해 보면 다들 처절해요.
미숙이 같은 경우는 고아에다 어디 한 군데 마음 둘 친구 하나 없는 애고, 종희 역시 부모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는데, 부모의 이혼을 막겠다고 자기가 너무 싫어하는 선생님과 친구를 맺잖아요. 그런 미숙이나 종희의 마음을 인지하고 영화를 다시 보면 어느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나요. 그래서 그런 마음을 느끼셨으면 하고 두 번 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얘기하는 거예요.
감독님의 바람이 잘 전달되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혹시 차기작 구상한 거 있으세요? 너무 이른 질문인가? <미스터 홍당무> 이런 거 나와도 재밌을 거 같은데. (웃음)
(웃음) 아직까지 구체적인 건 없고 구상을 해봐야죠. 우리 미숙이를 세상에 좀 더 알리고 나면요.
2008년 10월 20일 월요일 | 글_김선영 기자(무비스트)
2008년 10월 20일 월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