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백수란 뭘까. 단순한 필자는 ‘백수=실업자’라는 생각으로 이십 여년을 보내 왔다. 그런데 누가 그러길 백수와 실업자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단다. 왜냐하면 ‘백수(白手)’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백수건달’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하며, ‘건달(乾達)'이라는 말은 흔히 깡패로 알고 있으나 직접적인 관계도 없이 싱겁게 붙어 다니는 사람, 돈도 없이 난봉을 부리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 그런데 주로 실업자가 되면 초면인 사람들에게 종종 공짜술을 얻어먹기도 하니 어찌 보면 싱겁게 붙어 있는 모양새며, 간혹 배알이 뒤틀려 화기애애한 술자리를 아이스맨처럼 얼어붙게 하면 그야말로 난봉꾼이 되는 것이니 결국 백수는 곧 실업자라는 공식으로 자연스레 돌아오고 만다.
청년 실업률이 심각하다는 매스컴의 보도를 보고, 처지가 처지인 만큼 문득 백수들이 나오는 영화들을 다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결국 깊이 생각하길 싫어하는 필자는 이런 저런 의견을 모두 수렴해 임의대로 백수를 지정했다. 백수란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으로, 여기에는 주로 실업자나 몽상가, 혹은 재력을 소비에 일삼는 무리들이 한데 포함된다. 자, 그럼 백수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시자구요.
▶시대가 낳은 멋진 백수, 찰리 채플린
하지만 퇴원하고 보니 밥줄은 이미 끊겨 있고 할 수 없이 거리를 떠돌다가 시위 군중에 휩싸여 감옥 살이까지 하게 되니 그 신세 처량했다. 하지만 감옥에서 풀려나와 또다시 거리를 떠돌다가 빵을 훔치던 예쁜 소녀를 만나는데 그녀가 그의 구직 의욕을 뜨겁게 불태운다. 근사한 집을 사기 위해 백화점 경비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철공소에서도 일하며, 카페에서 노래 부르는 일까지 분주하게 일하는 찰리. 하지만 지지리 운도 없는 그는 우연한 소동 때문에 또다시 떠돌이로 남게 된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저려오는 떠돌이지만, 그 겁많고 허약한 찰리는 결코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의 희생양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결연히 고통을 초극하여 일어선다. 희망, 꿈, 갈망이 덧없이 사그라지고 나면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발길을 돌릴 뿐. 아, 그 얼마나 멋진 백수였던가.
▶<어바웃 어 보이>의 댄디 백수, 프리먼
하지만 못된 생각을 하다 보면 반드시 일은 꼬이는 법. 하필 열두 살 소년 마커스가 나타나 그의 멋진 백수 스타일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윌은 외롭고 소극적인 그 왕따 소년에게 마치 아빠와 같은 책임감으로 ‘멋진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는가. 머리만 컸지 아직 덜 떨어진 인간인 윌은 시간이 지날 수록 그가 마커스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점차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더도 말고 윌과만 같았으면 하고 뭍백수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산 그는 ‘돈 많은 백수는 할 만하다.’는 부르주아 백수의 전형을 보여준다. 단지 불로소득의 죄의식과 남들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고독’과 ‘소외감’이 그의 흠. 하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고독과 소외감이 느껴진다면 별로겠지.
▶<트레인스포팅>, 우울한 백수의 전형
그리고 마지막 대사 “직장과 가족 그리고 대형 텔레비전을 사고 세탁기, 자동차, CD 플레이어, 전기 오프너, 건강, 저콜레스테롤, 건강을 위해 치과 보험증도 가질 것이다. 좋은 집, 레저 용품, 정장 세 벌, DIY, 게임쇼, 인스턴트 음식, 아이들…공원을 산책하고, 정시 출퇴근, 골프, 세차, 스웨터도 고르고…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연금을 받고, 세금을 내면서 죽을 때까지 건전하게 살 것이다.” 이 영화의 뒤안길을 보며 문득 백수로 사는 것과 정상적으로 사는 것, 그 둘 모두가 ‘가치있는 삶’과는 거리가 먼 듯한 느낌이 되는 건 왜일까.
▶백수의 인생에 불빛을 켜라, <라이터를 켜라>
동창회에서 그토록 무시당하는 그가(왜 동창회를 찾아가는 것일까…) 영화의 엔딩 부분에서 통쾌하게 백수란 오명을 벗어던지는 박치기를 날린다. “백수가 백수의 그림자에서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자신감 부족 때문이리라. 박차고 일어나 그런 세상에 박치기를 날리면 인생은 달라진다.” 박치기를 할 수 없는 두개골을 가진 사람이거나 대열차강탈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좀처럼 백수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왜냐하면 라이터는 허봉구에게 인생 역전의 로또 복권 같은 것이었을지니.
▶백수가 판타스틱한 건 아니지, <판타스틱 소녀백서>
상대는 매력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마흔 살의 순진남 시모어. 하지만 이 괴짜 소녀, 취향도 독특하여 남들이 버리는 오래된 잡동사니 수집광에 허리에는 늘 초강력 보안대를 차고 다니는 그가 황홀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성장 영화가 그렇듯 어느덧 우정도 지나가고, 사랑도 덧없이 지나간다. 남은 것은 자신의 꿈을 찾는 것.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고, 화합할 수 없는 사회를 떠나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 백수란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위해 잠시 움츠리고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결혼은 백수의 무덤, <뮤리엘의 웨딩>
상대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위장 결혼을 하려는 수영 선수로, 남편의 명성 덕에 그녀는 하루 아침에 유명해진다. 하지만 갑작스런 어머니의 자살과 아버지의 예고된 파산 등으로 비로소 정신이 든 그녀는 자신의 거짓된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난다. 지금 백수에서 탈출하기 위해 혹여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들이여, 뮤리엘을 떠올릴 지어다!
▶위험한 백수의 전형, <해피엔드>
그럭저럭 모른 척 지내는 차에 딸에게 먹일 분유에 벌레가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갑자기 분노가 폭발한다. 결국 치밀한 각본으로 아내를 살해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딸과 생활하는 그(아내를 살해한 것이 상상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뭐 이런 남편이 다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드는 생각은 그럼 이제 딸도 키워야 하는데 취직은 할 건가??
▶예비된 백수 인생, <청춘 스케치>
‘5센트, 커피, 담배, 그리고 너와 나'라는 레이나와 트로이의 대사처럼, 이 영화는 미래를 불안해 하면서도 더 이상 꿈을 믿지 않는, 그러나 현재를 덤덤히 살아가는 청춘 군상을 솔직하게 담고 있다. 그런데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들은 백수여도 왜이리 멋있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렇다고 그들처럼 되려고 한다면 좀 곤란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