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사람이 전락해도 이 인간만 할까? 어릴 적 골프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증권회사 영업사원 강승완(김승우)은 작금의 신세가 처량하기만 하다.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대신 노상 따라 다니는 건 조폭의 빚독촉이고 직장에서도 왕따 신세. 그러던 어느 날, 감히 상상 속에서만 그려보던 화려한 인생이 꿈처럼 펼쳐진다. 내가 골프 황제? 옷장엔 값비싼 옷들이 즐비하고 욕조는 수영장만 한 집이 내 거란 말이지? 아리따운 이 여자가 진짜로 내 부인? 한 번의 실수로 인생 사정없이 꼬여버린 남자의 신나는 인생역전을 다룬 영화 <역전에 산다>가 어제(6월 3일) 언론 시사를 가졌다.
하늘빛 도트 원피스가 화사한 하지원은 <가위>, <폰>의 호러퀸 이미지에서 <색즉시공>으로 이젠 엄연한 흥행여왕으로 군림하게 된 듯. 동글동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박용운 감독은 <리허설> 조감독과 <본 투 킬>, <댄스 댄스>의 각본을 거쳐 <역전에 산다>로 입봉한다.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고호경의 모습도 반갑다. 한 박자 늦게 시사회장에 도착한 김승우가 무대에 오르고, 주인공 배우들과 감독은 “열심히 만들었으니 재미있게 봐달라”는 평이하지만 또한 간절해 보이는 인사를 건넨다.
한심한 남자 강승완은 어느 날 맞은 편 차선을 달리던 잘빠진 스포츠카를 보고 탄식한다. 저런 놈도 있는데, 내 인생은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남자가 아무리 봐도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 <캔디 캔디>의 안소니도 아닌 것이 샛노란 금발머리를 드리우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눈이며 코며 영락없는 내 얼굴인 거다. 그리고 터널을 빠져 나왔을 때 두 남자의 인생은 감쪽같이 바뀌어있다. 주변 사람들도 얼굴은 그대론데 각자의 프로필은 판이하다. 어리버리 맹부장(박광정)은 대머리 택시 운전사가 되어 사인을 해 달라질 않나, 나만 보면 이를 갈던 친구의 여자친구(고호경)는 유명 여배우에다 내 불륜 상대란다. 간을 빼줄 듯 살갑게 굴던 착한 친구넘(강성진)도 나만 보면 이를 간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그 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과는 좀 틀린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역전에 산다>는 누구나 해봤을 이와 같은 상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증권회사 영업사원 강승완과 골프 황제 강승완, 1인 2역 아닌 1인 2역을 소화한 김승우는 <라이터를 켜라>이후 코믹 연기에 일가견이 있음을 과시했고, 다채로운 조연과 카메오들이 시시각각 던져대는 웃음 폭탄들도 잔뜩 포진해있다. 9회말 홈런 이상의 신나는 역전극 <역전에 산다>는 6월 13일 개봉한다.
Q: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이 궁금하다. 독특한 설정이 인상적인데.
박용운 감독: 사실 헐리우드에선 이미 빈번하게 사용된 설정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 나라에서 인기 끌만한 스타일은 아니지. 코미디지만 개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격한 것도 아니고 설정 속에서 웃음을 끌어내야 한다. 지금 영화를 보고 나니 어떤 부분은 의도대로 잘 표현된 것 같고, 어떤 부분은 실패했고 그렇다. “도전한다”는 기분으로 시작했고, 해답은 좀 더 뒤에야 날 것 같다.
Q: 왜 김승우와 하지원인가? 두 사람을 캐스팅한 특별한 이유는.
박용운 감독: 김승우는 드물게 편안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다. 그리고 배우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개구쟁이 같은 느낌이 좋았다. 하지원의 경우에는, 주로 출연작들이 그렇다보니 차갑고 강한 이미지가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안에 숨어있는 ‘여자’의 느낌을 봤다.
Q: 김승우에게 묻는다. 연기할 때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김승우: 우선 말해둘 것이, 영화 속에서 내가 두 가지 모습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이건 엄밀히 말해 1인 2역이 아니다. 단지 좀 다른 비주얼만 필요했을 뿐인데... 1인 2역을 연기한 소감, 뭐 이런 질문 받을 때 가장 민망하다. 특별히 연구하고 고민한 것도 없는데. 단지 어떻게 하면 더 큰 재미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Q: 상대배우 하지원에 대한 느낌은?
김승우: 같이 작업하기 전에는 하지원이 출연한 영화들을 보고 ‘참 강한 스타일인가 보다’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같이 부대껴보니 같이 일해 본 배우들 중에서도 이렇게 여리고 착한 여자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원은 집과 촬영장밖에 모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친구가 없었던 거였다. (하지원, 그건 바빠서 그런 거라며 항변한다)
Q: 이번엔 하지원에게 질문. 김승우에 대한 느낌은 어떤가?
하지원: 전엔 왠지 무섭다는 느낌이 있었고, 또 나이차도 적지 않지만(김승우 왠지 쓸쓸한 웃음) 함께 일하면서 친해졌다. 너무나 착하고 애교도 많고 편한 오빠다. 촬영하면서 정말 재미있었고.
Q: 아까 무대인사 할 때 “아줌마 역할이 어렵다. 다신 안 하고 싶다” 이런 말을 했는데, 실제로 보니 뭐 별로 아줌마 같지도 않다.
하지원: 꼭 ‘아줌마스럽다’기 보다는,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들 때문에 힘들었다. 남편의 등을 밀어준다든지, 사랑하면서 돌아서려 한다든지, 좋아하는 남자 외에도 시아버지 등 여러 사람들 돌봐야 한다는 것 등 결혼한 사람의 입장에 서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었다. 뭐 대단한 차이는 없지만, 예를 들어 “이혼하자”로 말할 때 감정적으로 혼란스럽기도 했다.
Q: 김승우의 경우에는 골프 황제와 구박덩이 영업사원, 하지원은 스타 골퍼의 부인과 말괄량이 여기자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줬는데, 어떤 캐릭터 쪽이 연기하기 더 수월했는가?
김승우: 망가져 있는 모습이 훨씬 편했다. 역시 생긴대로 사는 게.... 노란 머리 늘어뜨린 것도 영 어색하고. (이 때 “그거 가발 티 많이 났다”는 지적이 들어온다. 감독은 “한 장면을 두 번씩 찍다 보니 군데 군데 허술한 부분이 적지 않다. 아쉽게 생각한다.”고 시인한다)
하지원: 나 역시 기자 역할이 편했다. 물론 나온 씬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감독님 말씀도 성숙한 여성보다는 말괄량이 역할이 더 어울린다고 하시더라. 언젠가 괄괄한 성격의 캐릭터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취재: 임지은
촬영: 이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