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인가 했더니 어느새 가을이 오나보다. 내리는 비에서 묻어나는 서늘한 바람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침 저녁으로 이렇게 가을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하면 흔히 가을을 탄다고 하는 계절병이 슬슬 기지개를 편다. 일단 가을을 타기 시작하면 영화를 고르는 기준도 달라진다.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나 로맨틱 코미디가 유난히 보고 싶어지고 괜히 울적해서 영화보고 펑펑 울어보고도 싶은게 본격적인 멜로 영화의 계절이 된다고나 할까. 이것도 다 가을을 타기 때문이라던데, 조금은 이르지만 가을에 어울리는 영화들을 미리 짚어보는 건 어떨까.
▶ 가을날의 동화
가을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해봐야 할 명작. 주윤발과 종초홍이 출연, 정통 멜로 영화의 흐름을 따른다. 뉴욕의 파란 하늘과 종초홍의 머리 위에 부서져 내리는 가을햇살, 도시의 야경 등 가을내음이 가득한 이 영화는 노관정이 작곡한 테마곡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식당을 차린 샘이 제니퍼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의 긴 여백과 정지 화면(나지막히 흐르는 대사..‘두분이십니까..’)은 영화팬들이 손꼽아 추천하는 장면. ‘내마음의 사랑을 다시 찾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 가을은 이미 멀어져 갔답니다..’ 노래가사처럼 눈물나게 슬픈 영화.
▶ 가을의 전설
그야말로 전설적인 가을 영화. 브래드 피트의 우수어린 눈빛과 비극적인 사랑으로 전세계 여성팬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브래드 피트만을 위한 영화가 되어버린 아쉬움이 있지만 영화속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은 1995년도 아카데미 촬영상으로 이어졌으며, 이 작품으로 브래드 피트는 세계적인 톱스타로 떠올랐다. 1차대전과 산업 혁명의 변화속에 있던 미국을 배경으로 세 형제의 파란만장한 삶과 사랑을 장대하게 묘사했다. 포인트는 역시 지금보다 기름기가 덜 먹은 브래드 피트의 터프한 매력.
▶ 뉴욕의 가을
헐리우드의 말썽꾸러기 여배우 위노나 라이더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청순 가련녀로 변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매력을 자랑하는 리차드 기어와 시한부 사랑을 나눈다. 헐리우드의 영원한 플레이보이 리차드 기어가 순애보를 보여주는 몇안되는 영화중 하나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뉴욕의 단풍과 겨울의 하얀 눈밭 등 아름다운 영상이 빼곡하다. 특히 센트럴 파크는 영화속의 또하나의 배우로 여겨도 될 정도. 일반적으로 이런 멜로물들이 걷는 통속적인 결말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톱스타들의 애잔한 사랑은 가슴을 울린다.
▶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로맨틱 코미디의 최고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최고의 데이트 무비. 12년동안 만남과 이별, 재회를 거듭하며 우정을 사랑으로 키워나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이다. 맥 라이언와 빌리 크리스탈의 풋풋한 모습에서 한번, 남녀간의 우정과 사랑에 대한 명쾌한 진리들로 두번 즐거운 영화이다. 특히 해리와 샐리가 다시 만났을 때 거니는 공원의 가을 낙엽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장면. 영화 개봉후에 이 장면을 따라하는 커플들이 급속도로 늘어 인기를 실감했다고 한다.
▶ 미술관 옆 동물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려냈다. 이정향 감독의 데뷔작으로 톡톡튀는 대사와 다채롭고 산뜻한 색배합을 이루어낸 화면, 주연배우의 호연으로 빛이 났던 영화. 특히, 심은하의 빨간 자켓과 노란 우산, 미술관과 동물원의 아름다운 풍광등 잊지 못할 장면들이 가득하다. 이 영화덕분에 과천국립현대미술관은 이용객이 몇배로 늘어났으며, 지금은 연인들의 사계절 데이트 코스로 당당하게 자리잡았다. 이제는 스크린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심은하와 당시 신인이었던 이성재가 그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완벽한 커플, 춘희와 철수로 호연했다.
▶ 접속
1997년도 우리나라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 국민배우 한석규와 전도연을 앞세워 청춘들의 실연과 방황을 PC통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려냈다. 감각적인 화면과 탁월한 BGM의 선곡으로 결국 97년도 국내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고 결국 1997년 대종상을 휩쓸고 만다. “만나야 할 사람은 꼭 만나게 된다는 그말...이젠 믿지 않을래요...”라는 전도연의 대사가 심금을 울린다. 무엇보다도 약간 촛점흐린 듯한 미장센과 개봉시기(초가을)에 힘을 입어 가을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멀티플렉스로 재건축중인 종로의 피카디리 극장을 명소로 만들었고 근처 카페수익에 한 몫했다.
▶ 시월애
한국의 대표 가을 영화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영화.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연기탓에 더 순수해보이는 전지현과 부드러운 남자 이정재가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을 나눈다. 영화속의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장소,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의 상처를 간직한 곳, ‘일마레’를 위해 이현승 감독은 강화도에서 석양이 떨어지는 각도까지 계산하여 갯벌위에 세트를 만들었다고. 상투적인 스토리 전개와 부자연스러운 캐릭터가 지적되었지만, 한국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영상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영화들…
가을에 사랑받는 영화들은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결코 쉽지가 않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비극적인, 그리고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을 선택하고 성공확률은 30% 정도밖에 미치지 못한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처럼 사랑도 우수수 떨어져 간다. 하지만 사랑이 하고 싶은 계절이라면 역시 가을을 택하고 가을이라면 역시 눈물나는 멜로 영화를 고르는 것이 솔로들의 심정인 듯 하다. 아마도 보고 또 봐도 아름답게만 보이는 연인과 낙엽이 가득 깔린 길을 걷고 싶은 소망을 스크린을 통해서나마 이루고 싶은게 아닐까. 설사 마음 아픈 결말이 있더라도 말이다. 아..가을… 사랑하고 싶고, 울고 싶은 계절이다. 그렇다면, 연인이 없는 그대여..비디오 대여점에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