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런 영화다. 엔딩 크래딧이 모두 올라가고 조명이 환하게 얼굴을 내리쬘 때까지도 여전히 칠칠치 못한 눈물을 또록 굴리면서 되 뇌였다. 또 이런 영화군. 집으로 가는 길,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산산한 바람과 함께 애써 추스리며 다시 몇 번이나 중얼거려야 했다. 또 이런 영화네. 또...
혹자가 술자리에서 얼큰하게 설파하던 '상업영화가 잘 되야 고양이, 나비, 와이키키 다 만들 수 있는 거라니깐.' 논리에 하릴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극장가에서 꼬리를 감춘 고양이, 날개 꺾인 나비, 비바람이 부는 와이키키에 대한 안타까움은 마음을 저민다. 한편에서는 한국 영화 전성시대네 뭐네 목소리 큰 조폭들이 몇 백만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데, 목소리 작고 얌전한 영화들은 겨우 몇 천, 몇 만의 관객을 헤아린 후 사그라지는 모습들. 영화판의 '파이'가 얼마나 더 커져야 이 가난한 백성들에게도 맛난 파이 한 입 돌아갈까.
어쩌다가 들어선, 얼토당토않은 길을 되짚어 꽃섬으로 향하는 그들의 여정에 동행하는 것은 디지털 카메라이다. 혜나의 디지털 카메라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생생하게, 가장 내밀한 아픔을 솔직하게 포착해 낸다. 하지만 사람들은 카메라에 자신의 치부를 들킬 새라 자꾸만 그녀의 시선을 뿌리친다. 세상을 들여다봄으로써 치유의 날개를 달아보려 했던 혜나는 도리어 자꾸만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쳐진다. 그러던 그녀는 비밀에 싸인 엄마의 죽음을 마음에 묻고 바다를 처음 보면서 차츰, 삶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깨달아 간다.
이 영화에서는 '마법'이 주요한 줄기로 작용한다. 하나 둘 셋 하면 사라지는 거북이와, 명상 속의 눈물로 상처를 씻어 내리는 최면술, 그리고 역시 하나 둘 셋에 이 혼탁한 삶에서 사라진 유진. 세상과 소통하는 기이하고 영묘한 주술들을 통해 영화는 우리에게 잠재된 의식을 일깨운다. 혜나가 터득해 가는 마법으로 우리가 마음 저만치 묻어둔 씨 한 톨이 풍요롭게 피어난다.
어떻게 보면 군더더기일 수도 있겠지만, [꽃섬]에는 친절한 설명이 뒤따른다. 자못 난해한 형식을 선택한 대신,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관객을 이해시키고 있는 것. 따라서 [꽃섬]은 그렇게 다가서기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부디 이번에는, 혜나가 꺼억꺼억 토해내는 울음 소리가 메아리쳐 숱한 관객들에게 전율이 되었으면. 아니, [나비]처럼 이틀만에 막을 내리지 만은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