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미국 역사에서 자신 있게 위인이라 꼽을 수 있는 인물 링컨을 제법 입체적으로 다루려 한다. 실패한 가장, 자상한 아버지 혹은 무신경한 아버지, 그리고 정치인. 그 중에서도 정치인으로서의 링컨의 얼굴은 다채롭다. '부패로 통과되고 미국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이 추진한 19세기의 위대한 입법'이라는 대사는 영화가 묘사하려 하는 링컨에게 가장 근접하다. 지금 당장 젊은이들의 피를 멈출 수 있는 종전이냐 앞으로 태어날 수백만 명의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이냐, 누구라도 섣불리 손을 들지 못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링컨이, 아니 영화가 보여주는 행보는 흥미롭다. 링컨은 수정헌법 통과에 필요한 찬성표를 모으기 위해 정치 전문 브로커를 고용해 관직을 담보 하는 부정부패도 서슴지 않는다. 전쟁 종결 협상을 위해 도착한 남부 정치 인사들의 발을 워싱턴 밖에 묶어두는 술수도 마다 않는다.
이 영화의 최대 과제로 보이는 수정헌법의 결과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현재 백악관의 주인은 ‘검은 케네디’ 오바마가 아닌가. 영화의 목적은 결과가 주는 반전보다는 역사책에서 비껴 나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있다. 욕설과 비방, 조롱이 난무하는 19세기 의회의 모습과 결과를 안다 해도 수정안 통과 현장이 주는 긴장과 유머가 하이라이트가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화가 온갖 부정부패와 협잡, 매관매직을 수단으로 삼은 인물임을 까발려도 링컨이라는 개인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도덕하고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모종의 수단을 이용해 목적을 이루는 것이 정치 현실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렇기에 링컨이라는 인물을 등장과 암살 직전의 퇴장까지, 거대란 실루엣의 뒷모습이 주는 신화적 아우라로 완성할 수 있다.
스필버그는 링컨이라는 인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 고전영화의 틀을 취한다. 그래서 전기 영화의 진부함이나 지리멸렬을 꼬집는 것은 무용하다. 감독이 택한 고전적 플롯과 드라마, 심지어 촬영 방식은 그 또한 링컨이라는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방법론이 된다. 특히 촛불 속에 링컨의 초상을 오버랩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고전영화의 상투적 수법을 인용했음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링컨>은 관객들에게, 특히 세계사나 위인전으로나 겨우 접한 타국의 관객들에게는 친절하지는 않다. 수정헌법이나 남북전쟁의 상황은 150분이라는 상영시간동안 충분히 체득 가능하지만, 영화를 향한 집중도는 지극히 개인의 관심도에 달려있다. 이토록 기교를 부리지 않는 방식은 감독이 택한 뚝심이다. 그리고 링컨의 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음악 감독 존 윌리엄스가 밀고 가는 위인을 향한 예우다.
2013년 3월 12일 화요일 | 글_프리랜서 양현주(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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