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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프강 보르헤르트, <문 밖에서> 중에서
영등포에 처음 간 날을 잊을 수 없다. 현대적인 복합 쇼핑몰의 정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왔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같은 동네라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현실 같지 않았다. 그 당혹스럽고 기묘한 기분 때문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곳은 피부로 체감되는 공기 자체가 달랐다. 그것은 세련된 모노톤 사진 속에 존재하는 서울이 아니었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공기가 모든 감각의 촉수를 자극하는 진짜 도시였다. 아니러니하게도 나는 그 순간 ‘살아 숨 쉬는 세상’이라는 걸 강하게 실감했다. 한편으로는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했지만. 김기덕의 영화를 볼 때면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며칠 전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기덕은 “차기작은 내가 늘 이야기했던 것처럼 삶의 균형에 대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영화라면 로맨틱 코미디라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물론 그의 로맨틱 코미디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힘들지만.) 몇 해 전 아르헨티나의 평론가 마르타 쿠를랏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검은 색과 흰 색은 같은 것이다”고 말했다. 선문답 같은 이 말은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화두다. 세계는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고, 흰 색을 설명하려면 결국 검은 색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둘 사이의 경계, 균열, 모순, 균형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다수가 불편해하는 건 당연하다. 누구나 다 알면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먼발치에서 보는 건 쉽다. 문제는 그게 느닷없이 자신의 면전에 들이닥쳤을 때다. 비록 그게 ‘살아있는’ 것이라 해도, 영등포 뒷골목에 발을 들였을 때처럼, 사실은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게 누구나의 본심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보르헤르트의 희곡 <문 밖에서>의 한 대목이 머리를 스친 건 <피에타>를 본 직후였는데, 이처럼 김기덕의 영화들과 정확하게 매치되는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인간을 뿌리까지 이해하고 싶다면 비위와 담력부터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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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은 사람들이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보고 놀랄지언정 언제나 싱싱한 횟감을 잡아 내놓는다. 비유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리트윗’으로 우회하지 않고 거칠더라도 자신이 직접 쓰는 식이다. 한 가지 궁금해진다. 만약 <피에타>가 기록적으로 흥행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를 둘러싼 상황과 여건이 모두 바뀐다면 그의 표현에도 변화가 생길 것인지. 확신은 못하지만 당분간은 그렇게 될 것 같지 않다. ‘검은 색과 흰 색’의 비유가 유효한 이상은 그럴 것이다. 그 자신의 말대로 김기덕의 영화들은 모두 ‘내 삶의 모순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순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는 그의 목표가 이루어진다면, 흰 색과 검은 색이 똑같아진다면, 그때는 또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영화를 만들 이유가 아예 없어질 수도 있고.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 글_최승우 월간 PAPER 기자(무비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