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과 크게 다를 게 없다. 피터 파커(앤드류 가필드)의 부모는 일찍 세상과 등졌고, 의지했던 삼촌은 괴한의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미에 물린 후 어마어마한 힘을 얻었지만 삼촌 말마따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터라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공부벌레’와 ‘히어로’를 오가는 이중생활 역시 똑같이 전개된다. 그럼에도 각각의 에피소드 조율이 탄력적으로 이뤄져 지루함이 느껴지진 않는다. 조금 더 밝아진 주인공의 성격도 전편과 한 뼘 더 거리를 두게 한다. <스파이더맨>을 관객들이 유독 사랑했던 건, 주인공 피터 파커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집 형, 옆집 오빠 같았기 때문이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이와는 다른 방법으로 관객이 피터 파커에게 몰입하게 한다. 마크 웹이 만들어 낸 피터 파커는 엄밀히 말해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는 전문가들이 풀지 못한 유전공학 공식도 풀어내는, 한마디도 천재소년 두기 뺨치는 물리학 천재다. 영화는 이런 천재소년의 체면을 세워주는 데에도 각박하지 않다. 그러니까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이 주인공의 소시민적 면모를 이용해 관객의 동질감을 유도했다면,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히어로의 멋들어진 모험담과 초월적 재능을 진열함으로서 관객의 쾌감을 이끌어내는데 주력한다.
무엇보다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하는 피터 파커는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 파커보다 욕망 표출에 자유롭다. 사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는 지나치게 금욕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동굴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스타일이었다. 선의로 행한 행동이 오해받을 때에도 입을 다물었다. 사랑하는 여인도 멀리했다. 하지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는 타인이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중 앞에서 보다 쉽게 마스크를 벗는다. 보다 빨리 여자 친구 그웬(엠마 스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심지어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그웬의 창가로 다가가 모성애도 자극한다. 어린애 같다고? 설마. 어쩌면 이건 인간의 너무나 당연한 욕구다. 개인의 욕구를 지나치게 억누르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논란거리라면 주인공의 성격이 밝아지고 고민의 흔적이 옅어진 사이, 영화가 품은 깊이가 단순해 보인다는 점이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이 작품적으로도 큰 점수를 받은 데에는 특유의 다크함이 한몫했다. 샘 레이미는 거미줄마냥 꼬이고 꼬인 인간관계 속에서 단순한 슈퍼히어로 물을 넘어선 인간 사회의 속성을 품으려 했다. 이와 달리 마크 웹은 많은 인간관계 중 달달한 로맨스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신기한 건 이것이 오히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만의 고유한 정체성이 된다는 사실이다. 마크 웹은 <500일의 썸머>에서 보여줬던 낭만적이고 로맨스적인 감성들을 초특급 블록버스터 안에 무리 없이 녹여낸다. 피터와 그웬이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500일의 썸머>에서 톰(조셉 고든 레빗)과 썸머(주이 디샤넬)의 풋풋한 한때를 떠올리게 한다. 블록버스터물을 이토록 감수성 있게 그려낸 경우는 아마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매력은 그 유연한 활강에 있다. <아바타>가 나왔을 때 덩실거렸을 건, 20세기폭스 만이 아니다. 소니 역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미소를 지었을 게다. 거대한 빌딩 숲을 종과 횡으로 누비는 스파이더맨의 모습만큼 3D에 최적화된 게 어디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3D다. 그리고 예상대로 3D를 입은 스파이더맨은 근사하다. 특히 시점숏으로 잡은 카메라가 뉴욕 밤거리를 훑는 화면에서는 놀이공원의 청룡열차를 탄 듯한 짜릿한 희열이 전해진다. 영화도 보고 놀이기구도 타고. 이런 걸 일석이조라 한다지.
(덧붙이기- 사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 망해서 소니가 디즈니에 거미를 팔아넘기길 바랐는데, 글렀다싶다. 이건, 흥행감으로 보이니까. <어벤져스>에서 스파이더맨을 볼 가능성은 희박해져간다. 슬프다.)
2012년 6월 28일 목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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