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등장은 또 다른 시대의 퇴장을 예고한다. 1927년 할리우드가 그랬다. 유성영화의 등장은 무성영화의 죽음을 재촉한다. 시대의 변화는 그 속에 속한 사람의 인생도 흔들어놓는다. 단역의 신인 여배우 페피(베레니스 베조)처럼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기회를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성영화 최고의 스타 조지 밸런타인(장 뒤자르댕)처럼 위기에 놓이는 사람이 있다. 쉽게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사람의 마음. 조지에 대한 사랑을 남몰래 키워 온 페피는 톱스타가 된 후에도 그를 잊지 못하고, 그런 페피에게 호감을 느끼는 조지는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 앞에서도 무성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각성제 같은 영화다. <아티스트>는 시각적 확장과 덩치 키우기에만 몰두하는 오늘 날의 영화계에 잠시 쉬어 갈 것을 조용히 제안한다. 조금 일찍 찾아 온 <워 호스>를 통해 클래식의 감흥을 체험했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잊고 있던 영화 본연의 미덕을 되새겨 볼 차례다. 역설적이게도 이 무성영화 안에서 각성제 역할을 하는 건, 다름 아닌 사운드다.(앞서 말한 5%에 해당하는 사운드) 음악 외엔 그 어떤 소리도 허용하지 않던 영화는, 조지의 심리적 압박을 표현하는 씬에는 처음으로 사운드를 사용한다. 영리한 선택이고, 선택은 성공적이다. 당시 유성영화의 등장이 몰고 온 혼란과 충격을 소리 하나가 실감나게 응축해 낸다. 연출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희소성의 가치를 지닌 영화다. 이 영화가 대단한 건, (엄밀히 따져)형식 때문은 아니다. 흑백 무성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이미 100여 년 전 소개된 것이니, 형식 자체가 신선하다 할 수는 없다. <아티스트>를 진정 빛나게 하는 건, 희소성을 찾아내는 역발상에 있다. 너도 나도 3D. 3D도 모자라 4D로 달려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아티스트>가 무성영화의 문법을 꺼내 든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희소성 자체가 경쟁력인 시대다. 무성 영화를 경험하지 못한 관객에겐 <아티스트>는 <아바타>를 처음 만난 순간만큼이나 신선할 수 있다. 각종 디지털 영화에 지친 관객들이나 시네필에게도 크게 다르진 않다. ‘낡은 것’으로 인식되던 문법을 뒤집어 살려내는 ‘안목’과 이를 영화로 발전시키고야 마는 ‘기획력’과 ‘추진력’이 <아티스트>가 지닌 소중한 가치다.
많이 아는 것이 힘이 되는 영화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애호가라면, 이 영화에 대한 감흥은 배가 될게 분명하다. <아티스트>에는 과거 무성영화의 형식뿐 아니라, 과거의 영화가 남기고 간 유물과 흔적들이 가득하다. 눈이 밝다면 찰리 채플린이 실제 사용했다는 사무실과 <시티라이트>의 촬영장 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귀가 예민하다면 배경 음악에 <현기증>의 테마곡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 챌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조지 밸런타인에게서 여러 명의 스타를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리의 등장은 실제로도 많은 배우들이 설 자리를 앗아갔다. 찰리 채플린이 휘청거렸고, 버스터 키튼이 은막 뒤로 사라졌고,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잊혀 졌고, 루돌프 발렌티노가 은막과 종말을 고했다. 주인공 조지는 마치 이들을 엮어 놓은 인물 같다. 일단 이름에서 루돌프 발렌타인이 겹친다. 캐릭터는 무성영화 시기 영웅적인 남성상을 대변했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다름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조지에게서 발견되는 건, 채플린의 환영이다.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유성 영화에서도 자신의 인장을 올곧이 박아낸 채플린의 역사를 기억한다면,(채플린 역시 초반엔 소리의 힘을 폄하했다) 마지막 조지의 탭댄스가 보다 희망적으로 들릴 것이다. <아티스트>는 영화가 지닌 마법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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