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경 누님. 안녕하신지요. 하긴 [조폭 마누라] 흥행이 잘 되어야 안녕하실텐데... 라디오 프로그램에 엽서를 띄우던 사춘기 감성으로 돌아가 고백하자면, 연예인에게 팬 레터를 쓰기는 정말 난생 처음이네요. 여느 팬 레터가 그러하듯, 우선 들뜬 마음으로 그 동안 쌓으며 묵혀온 사적인 감정을 좀 풀어놓을까 합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부터 누님의 팬이었답니다. 당시 "행복은 성적순이..."의 흥행에 고무되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던 하이틴 영화들과 TV 드라마를 오가며 활약하셨죠. 맡은 역은 거의 의리 있는 왈가닥, 그러나 알고 보면 속은 여려서 영화 후반에 가면 대게 누군가 (부모나 선생님 또는 남자친구)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는 여고생 역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한국영화에선 보이쉬한 캐릭터나, 중성적 매력을 내세운 연기자가 극히 드물었죠. 그런 이유일까요. 저는 스크린 (또는 모니터) 밖으로 펄쩍 뛰어나올 듯한, 누님의 팔팔한 생명력과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시절 누님의 인기는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친구녀석 하나가 은경 누님과 같은 아파트에 산다고 하길래 제 마음을 얘기했더니, "그 욕쟁이 누나를 좋아한단 말야?!"라고 놀리던 기억이 나는군요. 물론, 욕쟁이라는 얘긴 저를 놀리려고 구라를 친 게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누님의 당시 이미지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일화죠. TV 드라마 "마지막 승부"까지 누님은 그런 모습으로 일관하셨죠. 애초부터 여성 특유의 방어적인 이미지를 버리고 공격과 저돌을 택하신 누님. 그러나 그것은 카리스마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적당한 푼수기로 연민을 자아내는 누님의 인간적인 면모는 극 중 종종 남자아이들의 부성애를 자극하기 일수였으니까요.
얼마 전 "엽기적인 그녀"를 보고 나서는 길에, 저의 눈 앞에 어른거리는 얼굴은 전지현이 아닌 누님의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 캐릭터는 우리 은경 누님 거였어! 드디어 은경 누님을 알아줄 시대가 도래했구나... 그래, [조폭 마누라]를 기다리자." 미국에 시고니 위버가 있고, 중국에 양자경이 있다면, 우리에겐 신은경이 있다." 사실 제가 시고니 위버, 캐리 앤 모스, 샬롯 갱스부르, 양자경 등 중성적 매력의 여배우 취향은 아니랍니다. 오히려 남성 호르몬 과잉인 저는, 여자다운 여자를 부르짖는 페미니스트의 적들 중 하나죠.
누님의 숨겨진 매력은 비로소 [창]에서 폭발했죠. 그 동안 노는 계집(의리의 날라리) 역할이 단골이던 누님이셨지만, 다른 종류의 "노는 계집"으로 다시 태어나신 누님. 저는 진정 눈물 쏟으면서 열광하고 말았답니다. 누님이 [창]에서 보여준 애처로운 악다구니는, 배우로써의 누님에 대한 믿음과 앞으로도 계속 될 누님의 변신에 대한 기대를 마음 한 구석에 심어주었지요.
그리고 최근 [조폭 마누라]를 보았습니다. 누님은 여전히 빛나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누님이 지닌, 파괴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충만한 에너지와 무모하리만큼 천진해 보이는 매력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가 영화에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어요. 이제는 예전 같은 청춘도 아니신데, 그 변함없이 여전한 생명력이라니! 그리고 그 깜찍함. 언니가 가슴을 만져보려고 하자, “부끄러워”라고 속삭이며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려 숨는 장면 등 몇몇 부분은, 누님의 매력이 다채로운 것이었음을 상기하게 했지요. “맞아, 신은경의 매력에 저런 것도 있었지…” 확실히 누님은, 아직 가진 저력이 더 많은 배우입니다.
“영화 평에 좋지 않은 얘기가 있으면, 지옥 끝까지 따라와서 따지겠다”. 제작자 서세원 씨 께서 시사회에서 하신 말이죠. 비단 재미있고도 의미심장한 이 으름장 때문만이 아니라도, 이 영화에 다소 실망한 저로써는, [조폭 마누라] 자체에 대해 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사실 전 누님 못지않은 코미디언 서세원 아저씨의 팬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가 기타노 다케시 뛰어넘는 한국영화의 거목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아요. 허나 [조폭 마누라]는 영화인으로써의 서세원 씨는 아직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갈 길이 많다는 사실과, “뗏목을 타고가다 미끄러질”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지울 수 없게 하네요. 결국 도저히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단 얘기죠. 용서하시길.
이 영화를 보며 드는 또 하나의 생각. 영화의 생명은 한마디로, 독창성이란 겁니다. 특히 소재주의의 함정을 피해가야 할 기획영화의 경우는 더욱이 그렇겠죠. 여기저기서 성공작들을 차용, 모방한 냄새가 나는 영화(패러디를 일컫는 게 아닌 거 아시죠?)는 당장의 흥행엔 성공할 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그 나라 영화산업발전에 해를 끼친 혐의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때 융성했던 홍콩영화의 몰락을 떠올려 보세요.
그나마 영화가 삐걱대고 휘청거리면서도 중심을 잃고 중간에 쓰러지지 않은 데는, 신은경 누님의 존재도 한 몫하고 있습니다. 현실감각을 상실한 코미디와 지긋지긋한 신파 그리고 잔혹한 액션 사이에서 우왕좌왕 길을 잃고 헤매는 듯 하던 영화는, 결국 코미디의 본분을 스스로 상기하며 끝을 맺지만, 관객이 이 영화의 “눈 가리고 아웅”을 기꺼이 눈 감아 주는 것은 몰라서가 아닙니다. 아직은 염려스러운 한국영화에 대한 아량과 애정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