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 한지과 공무원 필용(박중훈)은 시장이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복원 사업에 매달리는 중이다. 3년 전, 자신 때문에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내 효경(예지원)이 지공예가이기도 하지만, 승진을 잡을 수 있는 기회라 더 열심이다. 그 사이 필용은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감독 지원(강수연)과 티격태격 대다 종국엔 교감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다. 하지만 예산이 깎여버린 사업의 진행은 순탄치 않고, 아내 효경마저 필용과 지원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한지는 조강지처, 화선지는 첩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이러한 한지 예찬이 넘쳐난다. 직설화법을 넘어, 비전문배우들이 한지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심지어 지원의 작업을 빌어 다큐멘터리 화면를 그대로 삽입되기도 한다. 이를 단순한 정보전달 기능이 아닌 임권택 감독의 전통과 한지에 대한 애정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달빛 길어올리기>는 오히려 간결하면서도 진득한 드라마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임권택 감독이 실로 오랜만에 연출하는 동시대를 그린 작품이기에, 박중훈이 넉넉하게 연기한 필용의 일상이 종종 잔웃음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롱테이크와 함께 영상미로 유명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답게 탄성을 짓게 하는 유려한 장면들도 제법 여럿이다.
전주시가 관여했다고 해서 ‘관’스러운 느낌으로 충만한 것도 아니다. 그 보다 중요한 건 그 스스로가 장인인 이 노감독이 ‘천년이 가는 한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다. “여기 모인 사람들, 다 마친 사람들이죠. 달밤에 종이 뜨는 저 사람들이나 그걸 기록하는 나나”라는 클라이막스 속 지원의 대사처럼, 어떻게든 ‘혼’을, ‘정신’을 이어나가는 이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지만 또 세속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전작들과의 변화의 지점이라면 형식이 아닌 이러한 시선일터다.
대신 <서편제>나 <취화선>을 필두로 그가 줄곧 그려왔던 삶에 대한 집념, 그리고 ‘광인’의 기질을 드러내거나 초탈한 듯한 면모를 보였던 예인 혹은 직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효경은 스러져가는 전통에 대한 명백한 상징이다. 그러나 극의 중심이 필부들의 시선과 그리 다르지 않을 필용이 한지에 대해 배워나가며 맞게 되는 삶과 태도의 변화라는 점에서, <달빛 길어올리기>는 좀 더 쉽고 친근하다. 관조와 여유는 늘었지만 진심은 그대로다. 임권택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2011년 3월 18일 금요일 | 글_하성태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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