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잉여쾌락의 존재다. 잉여쾌락은 후기산업사회의 버팀목이다. 굳이 거창하게 라캉에서 지젝에 이를 필요도 없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상품들의 홍수, 그것들이 실생활에 정말로 필요한지를 의문한다면 이미 당신은 후기자본사회와 거리를 둔 사람일지 모른다. 욕망과 결핍 사이를 오가는 인간의 속성은 기업에겐 확실한 생산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잉여쾌락의 사회는 우울증과 강박증과 속전속결의 속도전이 횡횡하는 곳이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살아남은 후에 쓰라린 속과 텅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술과 마약과 섹스와 소비와 권력을 탐닉한다. 누구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허락되지 않는다. 후기산업사회가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제적동물이거나 집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는 은둔자형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1등석 티켓을 발권하고 보통사람이 지하철 패스를 인식하듯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여 좌석에 안착하기까지, 그 남자의 손을 거쳐 꾸려지는 출장가방, 절도 있는 기계적 몸짓과 그를 기다리는 최상급 서비스들, 즉 발권, 탑승, 렌터카, 호텔 등. 제이슨 라이트먼의 영화 <인 디 에어>의 시작은, 한 편의 CF처럼 스피디하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1년 중 322일을 비행기에서 보낸 남자, 콤팩트한 짐 꾸리기의 달인이자, 1,000만 마일의 플래티넘카드가 목표인 스페셜리스트이자, 즐거운 마음으로 하늘 위의 집에서 생활하는 자.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의 직업은 해고통보전문가이다. 소심한 보스를 대신해 고연봉자나 정년을 앞둔 장기근속사원을 일언지하에 회사 밖으로 날려버리는 일을 하는 이 남자. 영화의 시작에서 본 말쑥하고 스타일리시한 이미지와는 달리 피도 눈물도 없이 건조하고 고립된 그를 행복하다 여기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니까,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화려한 출장프로세스의 종착역이, 고작 해고를 통보하고 처음 본 타인을 인생 낙오자로 만들어 진창 속으로 처박아버리는 일임을 알게 될 때, 일상은 부러울지언정 그의 인생까지 닮고 싶지는 않다는 것. 냉혹한 자본주의를 상징화하는 제이슨 라이트먼의 영민함은 영화의 시작부터 이렇게 발화된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의 종사자일수록 술과 환락에 빠지기 십상이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컨대, 소위 ‘사’자 붙은 직종의 종사자들을 비롯해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이들치고, 폭음에 능하지 않은 이가 없고, 성적 욕망 또한 높은 걸로 알려져 있다. 해고통보 대상자에게 적당한 위로와 적절한 친절을 베풀면서 실수 없는 일처리를 하지만, 짓누르는 압박감과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터. 그러니 바에서 만난 유사한 유형의 매력적 여인 알렉스(베라 파미가)와 순식간에 한 몸이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사실 라이언 같은 일상과 삶을 지닌 남자에게 결혼과 연애와 안락한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불안정한 노년과 외로운 죽음이라는 공포가 있겠지만 그건 훗날의 일일 뿐, 언제 어떻게 죽을 런지도 모르는 미래에 사로잡혀, 현재의 풍요롭고 화려한 삶을 포기할 남자가 얼마나 있을라고. 이보다 더 사실적인 묘사가 있을까. 때문에 <인 디 에어>를 지배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꿈꾸지만 쉽게 말하기 힘든’ 것들을 묘사하는 도구로써의 ‘리얼리티’다. 어느 해고통보전문가의 고해성사 따위의 빤하지만 제법 먹힐 법한 거짓 설정이 아닌, 리얼리티에 담보한 이야기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감독은 상대의 불행을 기반 삼아 살아가는 인물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것들을 밝혀내어, 사회고발드라마를 만들거나 한정계층의 지지를 얻기보다는, 누구나 수긍할 만한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녹녹치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라이트먼은 <주노>에서 태어날 아이의 입양 준비과정에의 동참한 등장인물 누구도 서두르는 법 없이 주노의 내적 성장에 기여하도록 만든 바 있다. 마찬가지로 <인 디 에어> 역시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정밀한 테크놀로지의 힘에 의존하기보다는, 아날로그적인 인간미에 기대려는 감독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대선배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의기양양하던 나탈리가 고작 남자친구의 결별문자에 통곡하는 모습과, 업무수행과정에서의 당혹감과 두려움을 표출하는 것으로, 사람을 배제한 그 어떤 시스템도 인간을 완전히 납득시킬 수 없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매뉴얼워커(Manual Worker) 이상은 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장지에서 만나 하룻밤 관계를 탐닉하거나 철부지 신입사원을 동행하거나 찰나의 인연으로 영원한 원수가 될 수 있는 해고전문가의 삶이란, 혹은 우리네 인생이란, In The Air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것의 목적지는 미정(Up In The Air)일 수밖에 없다는 전언. 때문인지 라이언의 이동 구역은 어떤 특징을 지닌다.
라이언은 무수한 도시를 돌아다닌다. 대략 꼽아 봐도, 그의 회사가 있는 네브라스카의 오마하에서, 달라스, 위치타, 털사, 밀워키, 캔자스시티, 세인트루이스, 마이애미까지 쉼 없이 비행기로 이동하는데, 라이언의 이동 지역이 주로 미국 중(동)부라는 점은 흥미롭다. 미국의 탄생을 주도한 정치중심 동부도 아니고, 서부개척시대를 아메리칸드림으로 가치 환원시킨 약속의 땅 서부도 아닌 중부라는 것. 풀 한 포기 허락하지 않는 사막 같은 남자의 자아 찾기로 보아도 무방할 영화에서, 감독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가늠하는 대목이다.
제이슨 라이트먼은 미국의 건국이념, 행복한 중산층가정 혹은 순수했던 미국인의 꿈 따위는 관심조차 없는 듯, 지극히 소박하게 영화를 풀어간다. 라이언이 어떤 인물인가. 그는 야망 가득한 사내도 아니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의로운 남자는 더욱 아니며 오직 비행기에서 보내는 일상에 만족하면서 세계에서 일곱 번째의 플래티넘 회원이 되는 희망에 차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그의 출장에서 해고대상자 외에 어떤 만남도 무의미하며 어떤 풍경이나 정서가 개입할 틈이 없다.
일찍이 할리우드영화에서 대륙횡단 여행은 ‘잃어버린 이상이나 자아를 회복하는’ 도구로 곧잘 사용되곤 했다. <델마와 루이스>의 두 여성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서부로의 횡단여행을 기꺼이 감행했고, <레인 맨>에서 동생 찰리는 형과의 여행을 통해ㅡ형제의 여행 역시 동부에서 서부로의 여정이었다.ㅡ사라진 ‘미국의 꿈’을 회복한다. 반면에 <인 디 에어>에서 라이언의 여정은 중부에 머물러 있는데, 이는 소소한 일상과 지극히 사적인 일에 집착하는 그의 개인주의적 성향과 무관치 않다. 라이언의 여행이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거나 자신을 참모습을 발견하는 데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연한’ 결과에 가깝지 않을까? 아마도 감독이 작심하고 한 남자의 자아 찾기로 영화를 만들려했다면 이처럼 깔끔하면서 만만치 않은 무게감을 겸비하긴 힘들었을 터. <인 디 에어>를 근래 후기산업사회와 개인주의에의 알레고리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는 비록 금융위기가 불러온 대량해고와 실업사태에 쾌재를 부르는 모습을 보여줄지언정 밑바닥까지 삭막하지는 않다. 해고통보 전문가의 일상을 통해 대량실업시대의 미국을 보여주면서도, 아날로그적 경험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세상을 움직이는 원천은 ‘사람’과 ‘소통’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첨단 디지털기술이 인건비절감과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시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감독은 디지털로 무장한 젊은 세대에서 발견되는 의외의 보수적 성향과, 아날로그적 감성에 의존하는 선배세대의 쿨 한 생활방식 사이를 오가는 동안, 금속의 차가움을 체온으로 데워낸다. 마치 빙하를 도도하게 걸어가는 매머드처럼 감독의 인물들은 실업과 해고의 차가운 강을 제법 기민하게 넘나든다고나 할까. 제이슨 라이트먼의 화법이 맘에 드는 이유이다.
요컨대 <인 디 에어>는 후기산업사회의 현상과 징후를 매력적인 터치로 그려낸 영화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혼동케 만드는 것은 후기자본주의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젖과 꿀처럼 보이지만 막상 다가서 입에 대려는 순간 돌로 변하기 마련이다. 실체는 돌이지만 맛있는 젖으로 보여야만 우리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라이언이 추구하는 삶 역시 돌을 욕망하는 것에 불과하다. 플래티넘 클럽 가입을 욕망하고 마일리지에 따른 각종 서비스에 우쭐대는 행동이 부질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천만에! 대부분의 삶은 이런 하찮은 것에 몰두한다. 그렇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욕망이고 삶의 에너지다. 원래 그렇다. 그러므로 판타지 속에서 욕망의 대상은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이다. <인 디 에어>의 시작, 라이언의 멋진 발걸음과 민첩한 손놀림과 당당한 미소에 매혹되었다면, 당신 또한 교환가치를 거부할 수 없는 사람이다. 누구도 거부하지 못한다. 철저하게 교환가치로 존재하는 사람이 라이언이기 때문이다. 교환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욕망의 크기다. 그의 삶이 크게 보일수록 라이언의 가치는 무한대로 커지게 된다. 이렇게 <인 디 에어>는 가볍고 매끈하게 빠진 드라마의 형식을 띠면서도 한편으로 둔중한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후기자본사회의 경제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전형을 전시하면서 말이다.
인간의 경험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경계가 없는 삶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욕망이 제거된 삶이기 때문이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일치는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혹은 영화 속 해고대상자처럼 더 이상 소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빈털터리가 되거나 파산을 맞았을 때, 그의 효용성은 ‘0’이 된다. 제 아무리 인간적으로 연민을 느끼더라도 해고자보다는 라이언에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도 이와 무관치 않다. 따라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일치하지 않는 한, 즉 살아 숨 쉬는 한 삶은 계속된다. 계속되어야만 한다. 라이언의 삶도, 알렉스와 나탈리의 삶도 그리고 당신과 나의 삶도. 한 없이 쿨 한 영화 <인 디 에어>가 남기는 준엄한 메시지다.
글_백건영 영화평론가(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