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들로부터 몇 통의 전화를 받았다. 독립영화전용관과 미디어센터의 신규 주체와 핵심운영진에 대한 정보를 묻는 전화였다. 나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사실이 그랬다. 독립영화진영에서조차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을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나. 사람들은 모르는 상대, 전력이 노출되지 않은 상대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정보가 부재한 경우, 상대의 행동예측이 불가능한데다가,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킬 수 없다보니, 대비책 수립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나이트 M. 샤말란이 “공포란 낯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 것도 이런 까닭일 터이다.
남매의 집
조성희 감독의 <남매의 집>의 한 장면. 모자란 듯한 민머리의 청년이 등을 보인 채 아이를 엎드리도록 종용하고 있다. 그는 욕을 했다고 앵무새를 해머로 내리찍더니, 이제는 아이마저 박살낼 태세다. 단순무식한 예측불허의 행동이 정점을 이루는 순간이다. 이때 눈여겨 볼 것은 해머를 쥔 청년의 오른 손이다. 보통의 경우 (관객에게 등을 돌린 위치에서) 해머를 든 오른 손은 당연히 손등이 보여야 맞다. 그런데 지나치게 꽉 쥔 손가락이 보인다. 거꾸로 잡은 것이다. 이렇게 잡을 경우 내려칠 수가 없게 된다. 조밀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던 스릴러 사이로 공포가 밀려온다. 뒤집힌 손은 연출의 결과였을까? 당연히 연출이고, 관객의 심리를 쥐락펴락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미 우리는 정과 망치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지 않나. 서영희와 하정우 말이다.
감독이 아이까지 죽게 만들진 않을 것이라고, 그래주길 관객은 간절히 바란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해머를 거꾸로 잡은) 손을 본 것이다. 방금 전까지 설마 했던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다. 해머를 거꾸로 잡을 정도로 아무생각 없는 녀석이라면, 그깟 아이를 내려치는 건 대수도 아닐 것이다. 청년은 몇 번이고 반복해 다그친다. 동어반복의 공포, 중언부언의 소름끼침,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목소리 톤과 변화 없는 억양의 연속이다. 그런 그의 손에 해머가 들려있다. 이 바보 같고 어수룩한 청년의 낯선 행동들이 불러오는 공포.
낯선 사람들
‘게임의 법칙’ 제 1법칙은 「먼저 움직이는 자가 진다」 이다. 정보를 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런 법칙과 사례들도 낯선 대상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예컨대 최첨단 정보시스템을 구축한 미국이 아랍의 테러리스트를 쉽사리 제압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들은 이메일을 쓰지 않으며 전자인증 인식시스템에 어떤 정보도 올린 적이 없다.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세상 어디에도 자신들에 관한 단서나 정보를 남기지 않는다. 이렇게 남의 손에 나의 정보를 넘겨주지 않는 한 일방적으로 지는 게임이란 있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정책, 영진위의 한국영화진흥책은 무엇보다 낯설다. 내용도 낯설고 그 앞에서 진군나팔을 울려대는 자들 모두가 낯선 사람들이다. 낯선 단체 낯선 사람들에게선 패턴을 읽어낼 수가 없다. 예측불허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영화란 산업이고 상품이라는 믿음으로 똘똘 뭉쳐있다. 심지어 얼마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얼마나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느냐를, 영화의 가치평가 기준으로 삼은 자들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 그들은 상대를 너무나 잘 아는데, 10년 간 숙지했는데,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겉으로 드러난 학력과 이력이 고작이다. 우리의 패는 다 읽혔는데, 그들은 이제야 내놓을 패를 추릴 참이다.
비평 헤게모니
2010년 벽두부터 독립영화계는 금시초문인 상대에게 처참한 일격을 당했다. 그래도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상대의 패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상대도 모든 패를 공개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힘들겠지만 참고 견뎌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려 애써야 한다. 그것의 시작은 변치 않는 애정과 관심이다. 구체적으로, 독립영화에 더욱 관심을 가지되, 언제나 비평적 결과물로 완성시키도록 힘써야 한다. 끝내 살아남는 영화는, 오래도록 관객에게 기억되는 좋은 영화는, ‘비평과 함께 하는 영화’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평의 수혜를 입지 않고 긴 생명력을 지니는 영화를 보았는가. 독립영화, 소자본 영화가 입소문에 의존한다고는 해도, 무엇보다 그 동력을 지속시키는 것은 비평이다.
내 판단으로 자칭 ‘다양성영화’를 주창하는 집단의 가장 큰 핸디캡은 비평적 지지기반이 전무하다는 데 있다. 안정적 비평집단이란, 뜻 맞는 사람을 모아 사단법인을 설립하고 며칠 만에 공모에 응모하듯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현재의 독립영화가 우월적 지위를 가지는 대목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닌 비평의 힘을 보여주는 것, 자주 보고 열심히 써서 애정을 표출하는 적극적 행동이 필요하다. 비판이던 상찬이던 상관없다. 비평의 신전에 상정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적어도 독립영화와 다양성영화 간의 승부는, ‘비평 헤게모니’의 획득여부로 결정될 것이다. 그래, 이제부터는 비평 싸움이다.
글_백건영 편집위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