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예술가들에게 영감(靈感)은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영감이라는 게, 자칫 방심하면 금방 고갈되는 속성을 지녔다는 거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영감을 자극해 줄 뮤즈를 찾아 평생을 헤매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실제로 위대한 예술가의 배후에는 끊임없이 영감을 제공한 뮤즈들이 존재해 왔다. 클림트에게 레아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갈라가, 앤디 워홀에서 에드 세즈윅이 있었듯 말이다. 마리 테레즈 발터를 비롯한 일곱 명의 여성이 피카소에게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진 이야기다. <시카고>의 롭 마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나인>의 주인공 역시 다르지 않다. 영화는 예술적인 영감이 고갈돼 고통 받는 한 카사노바 중년 감독이 다양한 여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위기를 극복해 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65년 이탈리아. 9번째 영화 '이탈리아' 촬영을 일주일 앞 둔 천재 감독 귀도(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상상력이 고갈돼 시나리오 집필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답답한 현실에 숨이 막힌 귀도는 슬럼프 탈출을 위해 휴양지로 잠적 하고, 그 곳에서 정부인 칼라(페넬로페 크루즈)와 유희를 즐긴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아내 루이사(마리온 코틸라르)와 영화 스태프들, 여기자 스테파니(케이트 허드슨)등으로 인해 더 큰 혼란에 빠지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창작 욕구를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
<나인>은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과 1/2>을 무대로 옮긴 브로드웨이 뮤지컬 ‘나인’을 다시 스크린으로 구현한 영화다. 원래 원작은 창작을 앞둔 펠리니 자신의 무의식과 혼란을 신화적으로 해석한 아방가르드한 영화로, 인간의 욕망과 예술에 대한 탐구가 밀도감 있게 조명된 작품이다. 그러나 ‘8과 1/2’에서 ‘9’로 반올림을 시도한 <나인>은 할리우드식 제조법이 섞이며 원작이 지닌 철학적 깊이 대신, 화려한 볼거리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덕분에 <나인>에는 매혹적인 영상미와 화려한 색채, 도발적인 율동과 파워풀한 노래가 시종일관 넘실거린다. 음악에 버무린 리드미컬한 대사와 귀도의 불안한 심리를 포착하기 위한 현란한 카메라 워크도 영화는 잊지 않는다. <시카고> 때와 같이 뮤지컬 음악을 주인공 귀도의 상상 속에 펼쳐놓은 것도 눈에 띤다. <나인>은 귀도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의 세계, 즉 귀도를 옭아매는 갑갑한 현실의 도시 로마와 현실 세계에 대한 귀도의 환상이 담긴 이른바 환상의 도시 로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한다. 감독 귀도가 사용하는 카메라 조명을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거나, 스크린 속 화면을 과거의 한 장면으로 오버랩 하는 등의 시도는 현실과 상상의 모호한 경계를 동시에 그려내려 한 노력을 엿보이게 한다.
하지만 <나인>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타이트 롤을 촘촘하게 채운 배우들에게서 발휘된다. 영화 속에서 페넬로페 크루즈는 요염하고, 소피아 로렌은 관능적이며, 니콜 키드먼은 여신 같은 자태를 보여준다. 노장 주디 덴치가 카리스마 넘치는 아우라를 뽐낼 때, 케이트 허드슨은 발랄함을 한껏 드러낸다. 특히 퍼기가 선보인 야성미 넘치는 탬버린 퍼포먼스와 섹시하면서도 고혹적인 양단의 매력을 보여준 마리온 꼬띨라르의 무대는 뮤지컬 특유의 흥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여성들이 한자리에 뭉쳤다는 점에서 이들을 뮤지컬계의 ‘소녀시대’로 비유한다면 오버일까. <나인>이 출연 배우들을 보는 재미만큼은 확실히 선사하는 영화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것이 <나인>의 약점으로도 작용된다는 점에서 영화는 아이러니함을 드러낸다. (그것이 연출력의 문제인지, 아니면 출연 배우들의 기가 워낙 강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배우들의 존재감’이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도리어 ‘배우들의 존재감’에 ‘영화의 완성도’가 묻히는 역효과를 보인다. 일곱 명이나 되는 주연급 배우들의 퍼포먼스가 기승전결 없이 독립적으로 전개되는 바람에 영화가 다소 산만해 진 것도 아쉬움이다. 여기에 본인의 파트에 등장해 노래 한 두곡 부르고 사라지는, ‘치고 빠지기식’ 구성은 영화 흐름을 단절시키는 요소로도 작용하고 많다. 등장인물간의 극적 긴장감이 느슨하고, 내러티브가 약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 기인한다.
결과적으로 <나인>은 영화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원작에 비해서나, 롭 마샬의 전작 <시카고>에 비해서나 여러모로 힘이 달리는 작품이다. 배우들의 화려한 개인기 덕분에 순간을 즐기며 보기에는 나쁘지 않지만,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그 감흥이 쉽게 사라지는 휘발성 강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만, <8과 2/1>이나 <시카고>와 크게 비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뮤지컬 영화의 백미는 화려한 볼거리라고 생각한다면 시간을 쪼개 극장을 찾아도 아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09년 12월 30일 수요일 | 글_ 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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