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이라는 제작 기간, 미술, 의상, 세트, 소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좀 한다하는 명 스탭들의 참여, 조승우와 수애, 천호진 등 관심 가는 배우들의 출연, 공들인 CG 작업 등 여러 요소들은 <불꽃처럼 나비처럼>에 큰 기대를 갖게 했다. 게다가 아직 여러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는 명성황후와 호위무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번에는 야설록의 동명 무협소설을 바탕으로, ‘무명’ 캐릭터는 실존 인물인 홍계훈 장군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또한 개봉을 늦출 정도로 후반 작업에 신경을 많이 쓰면서 CG 완성도에 기대를 모으게 했고, 추석이라는 시기적인 호기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영화는 기대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예상과 달랐다.
세상을 등지고 자객으로 살아가던 무명(조승우)은 어느 날 우연히 민자영(수애)을 보고 첫 눈에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는 곧 황후가 될 몸.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자영은 고종황제(김영민)의 아내가 되어 궁에 입궐한다. 자영을 사랑했으나 가질 수 없었던 무명은 흥선 대원군(천호진)을 통해 입궁 시험을 보고 자영의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된다. 한편 조선의 국모가 된 자영은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러시아와의 외교에도 신경을 쏟다가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정치적인 의견 대립을 일으킨다. 결국 일본의 개입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계획되고, 무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명성황후 자영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지금까지 명성황후 이야기는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시대적인 격변기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극적인 상황 때문에 여러 소재로 등장했다. 드라마, 소설, 뮤지컬, 뮤직 비디오, 영화 등 여러 매체에서 다뤄졌고 항상 진실과 허구의 애매한 경계로 극적인 재미를 선사했다. 하지만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경우는 이 경계가 매우 뚜렷하다.(명성황후의 역사적인 행적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재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허구의 완벽한 경계로 두 가지를 완벽히 분리한다. 비록 조승우가 연기한 무명 캐릭터가 임오군란 당시 실제로 명성황후를 업어 피신시키고, 을미사변 때도 광화문 앞에서 일본군을 막은 홍계훈 장군을 모델로 했지만, 실제 역사와 둘의 로맨스를 그린 허구는 적절히 융화되지 못한다.
영화는 애초에 두 사람의 로맨스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영화적이다. 정설로 알 수 없는 명성황후의 로맨스는 매번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져왔는데, 이번에는 호위무사 무명이다. 무명은 숨어살던 어느 날, 황후가 되기 전의 민자영을 보고 한 눈에 반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결심한다. 하지만 이렇게 강렬한 마음을 품게 된 특별한 계기가 없으며, 무명의 사랑이 점차 커져가는 과정도 적절하게 표현되지 못 했다. 사건 없이 감정만 존재하며, 그것마저 이야기의 흐름과는 별개로 진행된다. 게다가 두 사람이 만났다가 헤어지는 전개에서 보여주는 동선 자체도 납득이 어렵다. 아무리 허구의 로맨스라지만 감정의 설정만으로는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긴 힘들다.
허구에서 로맨스를 담았다면 현실에선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을 보여준다. 안경이나 전기, 코르셋, 초콜릿 등의 소품을 사용해 서양 문물이 막 들어오던 시절을 보여주고, 일본과 러시아 등 외세의 압력도 중요한 흐름으로 삼는다.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도했던 흥선 대원군과 서양과의 교류를 원했던 명성황후의 정치적 견해가 부딪히는 모습을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상 위에 표현하고 있지만, 명성황후의 로맨스 쪽에 비중을 높이면서 이러한 역사는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수준에서 멈춘다.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 역사적인 사건들은 황후의 로맨스라는 주제에 엉뚱하게 연류 되며 의미가 사라진다. 그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통해 일본으로 하여금 시해를 계획하게 하는 근거가 될 뿐이다.
이야기로는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시각적인 요소들은 눈에 들어온다. 미술과 의상, 세트, 로케이션 등은 시대적인 배경을 잘 살리면서 무명과 명성황후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무명이 쓰는 칼인 흑명도나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명성황후의 다양한 의상, 궁궐의 압도적인 위용 등이 그러하고, 바닷가와 나루터, 갈대밭과 같은 장소는 서정성을 더 한다. 특히 궁궐 내부를 표현한 세트는 그 규모나 디자인에서 획기적이다. 유동적으로 변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 하나의 세트로 여러 공간을 만들어냈으며, 미로처럼 구성되어 있어 영화를 보는 내내 궁궐의 내부를 그려보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CG는 비주얼에, 아니 영화 전체에 큰 오점을 남겼다. 총 440컷이 넘는 CG가 사용됐으나 거의 모든 부분이 영화에 이질적이며, 가끔은 완전히 다른 질감을 만들어 영화와 분리된 듯한 느낌도 준다. 나룻배를 타고 펼치는 액션은 비주얼에 너무 집착해 현실감을 떨어뜨린다. 어떤 장면에서는 눈길을 잡아끌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균형감을 맞추는 데에는 실패했다. 풀 3D로 작업된 경회루 대결 장면은 이 영화 최대의 흠이다. 마치 <300>을 연상하게 하는 이 대결은, 사이즈와 속도, 각도 등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며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만들었지만, 갑작스럽게 공간을 변화시킨 CG는 납득이 어렵고, 동작 자체도 임팩트를 주지 못한다. 차라리 허황된 액션에 더욱 치중할 것이었다면 확실한 비주얼이라도 완성했어야 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스타일은 영화에 섞이지 못하는 CG만을 위한 ‘동영상’에 그치고 말았다. 이 외에도 1만 대군을 상대하는 광화문 전투의 허술함(CG뿐 아니라 대사와 액션 모두)엔 민망함이 들 정도고, 마지막 일본인 낭인과의 전투에서는 현실감이 없는 상황 전개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파편적인 영상을 극명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멋들어진 영상들이 힘주어 만들어졌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주변에 흩어져있고, 이야기의 연결도 치밀하지 못하다. 심지어 사건의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해 영화의 전개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들은 감정을 추스를 힘조차 주지 않고, 현실과 분리돼 따로 노는 CG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이유 없이 길게 삽입된 암전 화면이나 애매한 부분을 인서트로 처리하고 그 위에 보이스 오버를 입히는 안일함도 문제다. 전체적인 화면 톤이 튀는 것도 문제고, 영화의 길이가 2시간이 넘는다는 점도 마이너스 요소다.
영화는 무명과 명성황후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두 남자의 액션과 당시의 시대상(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차원은 아니다), 외세의 침략,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적인 대립 등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마지막 명성황후 시해 장면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다. 무명의 검술도, 두 사람의 사랑도, 안타까움으로 북받치는 감정도, 명성황후의 처참한 최후도 마지막 시퀀스에 다 담겨있다. 결국 마지막 장면을 위해 1시간 50분 간 전제 조건을 설정하는 과정인 셈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 비해 마지막 힘은 부족했다. 전제된 에피소드들은 유기적인 관계를 무시하고 나열되어 있으며, 캐릭터들의 감정도 필요할 때만 표현되는 소비적인 성향을 띤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92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대작이다. 게다가 개봉 시기도 추석이다. 많은 관객이 극장으로 몰리는 성수기임을 감안할 때 그 실망감이 더 크지 않을까 예상된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은 그와 상관없는 너무 많은 ‘다른 이야기’를 봐야 한다. 게다가 그 과정을 거친 후에 보게 되는 둘의 사랑은 충동적이고 감정적이기까지 하다. 기술적인 완성도에서도 흠집이 많고, 역사 왜곡을 떠나 전반적인 전개에도 동의가 어렵다. 좋은 상상력을 좋은 비주얼(CG 제외)로 표현하는 것만으로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로맨스에 CG를 이용한 액션을 섞을 생각이었다면 균형을 맞췄어야 했다. 아니면 아예 도드라진 영상으로 볼거리라도 제공하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색한 포지션을 취한 영화의 각 요소들은 영화 자체를 무장해제 시켰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수애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말이 많긴 하지만, 수애는 캐릭터로서의 명성황후를 잘 표현했다. 그의 슬픔을, 외로움을, 사랑을, 차분함과 천진함을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눈길을 끈다.
2009년 9월 21일 월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