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기 리얼리티 프로그램 〈서바이버〉에서 영향을 받음직한 TV 프로그램이 한국의 한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서바이버>는 미국 CBS의 간판 리얼리티쇼로, (처음에는 무인도였으나 시즌이 거듭되며) 세계 곳곳 오지를 찾아다니며 일정 기간 동안 살아남는 사람에게 거액의 상금을 주는 프로그램. 지금은 미국과 유럽 텔레비젼 쇼의 대세가 된 리얼리티 쇼의 원류에 해당하는 유서 깊은 프로그램이다.
무인도에서 아침을
한국 교포 출신 출연자도 몇몇 포함되어 있어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텔레비젼 쇼는 오지에서 열여덟 명이 생활하는 과정을 39일 동안 추적하는 포맷이다. 그 중 한국 언론에도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는 2006년 뉴질랜드 쿡 아일랜드에서 최종 승리자로 남은 한국계 권율이 포함된 시즌 16편. 오지에서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는 경쟁으로 탈락자가 정해지기도 하지만, 점점 어려워지는 오지에서의 생활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과정 역시 〈서바이버〉의 매력이다. 각박해지고 경쟁을 자극하는 상황에서 신사적인 배려나 수치심 따위는 사치스러울 뿐,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가 더욱 드러나며 감동을 주기도 하는 것. 철저하게 일반인 사이에서 출전자를 선택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즌 16에서 출연한 두 한국계 모두 평균적인 한국인과 비교하면 보기 좋은 외모와 몸매를 갖추고 있는 것 따위의) 미묘하게 그림이 나온다. 자본과 노하우가 풍부한 미국 텔레비젼 쇼의 노련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볼 수 있다.
미국에서 터진 〈서바이버〉의 빅히트를 한국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반인을 선발해 매주 계속되는 경쟁 끝에 최종 승리자를 남기는 포맷은 시행착오를 거쳐 예능 프로그램에 안착했고, 연예인 짝짓기 프로그램과 '리얼-' 버라이어티를 거쳐 현재 인기 프로그램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같은 TV 쇼가 변형된 유산을 물려받았다. 한국에서는 연예인적인 기질을 가진 일반인을 뽑아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 연예인 자체를 이용한 프로그램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축적된 경험으로 깨닫게 된 결과다. 하지만 2008년 4월에 EBS에서 방영한 <무인도에서 한 달 살기>는, 서두에 언급한 바로 그 프로그램, 그동안의 한국 〈서바이버〉계열의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원안에 가까웠다. 게다가 더욱 독하다. 일반인 중에서 지원자를 뽑았다지만 쇼에 맞는 엄선을 거치고 방송 프로그램에 걸맞는 컨텐츠로 구성한 〈서바이버〉에 비해, 방송사 EBS의 성격을 따라 〈무인도에서 한 달 살기〉는 사회 실험 프로그램에 가깝기 때문이다. 쇼적인 준비는 전혀 없이 무작위로 뽑은 출연자들이 살기 시작한 무인도에서, 금세 사람들의 동물적 본성이 드러나고 결국 부족한 식료품마저 구할 방법이 마땅치 않게 되자 급기야 제작진의 텐트를 급습하는 일이 벌어진다. 사전에 준비한 티가 역력하게 나는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가 자연에서의 삶을 시트콤같은 형식으로 꾸몄다면 〈무인도에서 한 달 살기〉는 아무런 가공도 없는 날 것 그대로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원작 〈서바이버〉에서 비슷하게 멀리 떨어진 셈이다.
무인도에서도 쇼를 해라
거친 촬영과 허둥대는 대응을 볼 때, 제작진의 텐트를 습격하는 것까지는 예측하지 못한 모양이다. 프로그램 전체를 놓고봐도 며칠만 지나자 기본적인 식료품을 구하기도 힘든 무인도에 아무런 대책없이 출연자를 데려다 놓은 것부터 제작진의 준비미흡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프로그램이었다. 상황만 던져주면 〈서바이버〉수준까지는 아니어도 비슷한 상황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이는 프로그램일지라도 TV를 통해 공개되어 시청률을 올리는 데에는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 그 해 6월에 새롭게 선보인 프로그램에서는 제작진의 그런 경험이 우러나 있다. 또 그러나 경험에도 불구하고 어쩔수 없던 것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찍을 수 있는 〈서바이버〉 제작팀과 비교할 수도 없이 적은 EBS의 제작비였다.
첫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때 민간인 중에서도 전직 직업군인 출신이 적응력과 정신력에서 더 나았던 점에서 착안했는지 6월에 새로 공개한 〈리얼 실험프로젝트 X〉는 예비역 8명을 무인도에 풀어놓고 20일을 지내게 했다. 예비역이라는 조건은 한국 남자 사이에서는 별다를 것도 없는 변수, 대신 특전사와 해병대를 포함해 방위 출신까지 섞어 팀을 만들었고 4명 씩 두 조로 나누어 경쟁 구도를 만들었다. 사실적인 사회성 실험 프로그램에서 좀 더 쇼적인 요소를 깨달은 결과물인 셈이다. 게다가 '예비역'들이 전국 각지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몰래 다른 팀의 식료품을 훔쳐오고 하는 장면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린 경우도 많았을 터, 좀 더 예능에 가까운 준비에 EBS가 아닌 다른 방송국에서 기획했다면 제법 화제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돈은 무인도도 춤추게 한다
무엇이 EBS와 (〈서바이버〉를 공급하는) 미국 CBS를 다르게 했을까. 이미 알고있다시피, 돈이다.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시장에서 경쟁하며, 시청률에 초점 맞춰 반 년마다 성과를 점검하는 상업 프로그램이 제작하는 프로그램이 단 일 분이라도 시청자를 눈쌀 치푸리게 할 일은 만무하며,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정말 가혹한 무인도를 원하지 않는다. 넉넉한 제작비는 이를 가능하게 한다. 거친 자연환경에서 인간성이 망가지더라도 적당해야 볼 만하고, 경쟁을 통해 부가적인 재미를 끌어내야 하며, 일반인에서 뽑았다지만 보기 좋은 외모를 가진 출연자가 있어야 TV 앞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무인도에서 생고생하는 <캐스트 어웨이>처럼 쉽게 인간성을 잃지 않으며, 〈푸른 산호초〉처럼 무작위로 아름다운 소년 소녀가 무인도에 살아남으며, 〈스웹트 어웨이〉처럼 인간은 극한의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고 웅변한다. 그리고 다시 TV 프로그램으로 돌아가 이런 출연자 섭외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힘은, 전 세계로 방영되는 프로그램의 유명세와 상금으로 걸려있는 '백만달러'라는 거금이다.
영문 제목 〈A Million〉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10억〉 역시 최후 승리자를 위한 상금을 놓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금액이 미묘하게 맞아 떨어지듯 영화 속 TV 프로그램의 모델은 〈서바이버〉다. 영화 속에서도 서바이벌 쇼에 초대 받은 군상이 다양하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은 대부분 혹독한 환경에서도 빛나는 외모와 젊음을 가진 사람들이며 다양한 직업에 걸쳐져 있다. 다큐멘터리 프리랜서 한기태(박해일), 피자배달월 조유진(신민아), 유리닦이 박철희(이민기), 고시준비생 김지은(정유미), 증권회사 직원 최욱환(이천희), 호스티스 이보영(고은아), 수영선수 홍수연(유나미), 백수 하승호(김학선)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촬영하는 PD와 카메라맨. 그런데 단순히 서바이벌 쇼? 이미 영화라는 것은 모두 알고있고, 그렇다면 〈서바이버〉보다 재미있기 쉽지 않는데?
텔레비젼 쇼만 〈서바이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똑같이 여러 사람이 무인도에 떨어져 생고생하는 컨셉은, 〈서바이버〉를 따라 잡을 수 없는 19세기 〈15소년 표류기〉적 아이디어라는 것을 21세기 영화제작자는 죄다 알고 있다. 그러니 〈로스트〉같은 드라마는 단순히 여객선 불시착으로 무인도에 표류한 것으로 부족해서, 알 수 없는 괴물과 이상한 현상으로 무인도를 도배해 놓지 않았나. 돈에 홀려 서바이벌 쇼에 지원한 이 사람들도 결국 이상한 사건을 겪으며 누구는 죽어나가고, 실종되며, 기억을 잃기까지 한다. 이 모든 것의 이면에 음모가 있나니 〈서바이버〉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변신하는 순간.
약간 힘겨울 줄 알았던 TV 쇼 출연이 목숨을 건 생존기로 변해버린 상황에서도 ‘10억’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을까? 다행히도 우리는 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이를 확인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2009년 8월 5일 수요일 | 글_유지이(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