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때리는 X새끼는 지가 안 맞을 줄 알거든. 근데 그 X새끼도 언젠가 X나게 맞는 날이 있어. 근데 그 날이 X같이도 오늘이고, 때리는 새끼가 X같은 새끼네.” 여자를 구타하던 한 남자를 또 다른 남자가 흠씬 패준다. 여자에게 다가선 이 남자, 예상을 비웃듯 따귀를 때린다. “왜 맞고 다니냐, XX년아.” <똥파리>의 상훈(양익준)은 그런 남자다.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똥파리’마냥, 살면서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간형 말이다. 상훈은 입에 걸레를 물었다. 후배들에게 손찌검은 예사다. 운동권 학생들과 노점상, 철거민들을 깔아뭉개는 것이 본업이다. 그래도 직업 정신은 투철하다. 떼인 돈 받아내는 귀신이다. 한 마디로 ‘괴물’이다. 양익준 감독은 이런 상훈의 속내를 들여다보자고 권유한다. 사실 이런 괴물에게도 가슴 한 구석에 투박하나마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얘기다. <올드보이>의 대사를 빌려와보자. “아저씨, 내가요, 아무리 짐승만도 못 한 놈이라도요,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상훈이 이렇게 망가뜨린 연원은 다름 아닌 가정 폭력이다. 어머니와 동생을 동시에 죽음으로 내몰았던 아버지의 폭력은 상훈의 삶을 나락으로 이끌었다. 아버지가 15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지금도 그 사건은 씻을 수 기억으로 남아있다. 양익준 감독은 반복해서 광기에 젖어 좁아터진 부엌에서 칼을 휘둘러대는 아버지들의 얼굴을 흔들리는 카메라에 잡아낸다. 상훈이 우연히 만나 교감을 나누게 되는 여고생 연희네 사정도 크게 다를 건 없다. 베트남 참전 용사이자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아버지는 노점상을 하다 용역 깡패의 폭력에 목숨을 잃은 어머니를 잊지 못한 채 계속해서 폭력을 휘두른다.
이렇게 일상화된 폭력과 아버지, 그리고 핏줄은 <똥파리>를 가로지르는 핵심 주제다. 욕지거리부터 구타를 일삼으며 사채 빛을 받아내는 일까지. 상훈은 이미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됐으며, 또한 스스로도 폭력을 일삼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양익준 감독은 클로즈업과 꽉 짜인 앵글을 통해 우리에게 가감 없이, 아니 집요하게 그러한 폭력을 정면으로 바라볼 것을 강요한다. 실상 이 폭력은 전부 아버지 세대에게 물려받은 유물들이다. “이 나라 애비들은 다 X같아. 근데 자기 가족들한테는 꼭 김일성처럼 굴려 그래”라는 상훈의 절규는 그래서 더 크고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가정의 일상화된 폭력이 결국은 한국사회의 폭력과 맞닿아 있지 않겠느냐고 직설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가 핏줄을 끊을 수 있으랴. 그렇기에 상훈이 가장 신경 쓰는 존재가 바로 조카 형인이다. 배다른 누나와 그의 아들 형인, 이들과 가족을 이루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느껴갈 때 즈음, 과거의 기억을 소환시키는 아버지의 존재는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술에 취한 상훈이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를 흠씬 패 줄때, 이를 목격한 형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러운 피를 다 빼주고 싶다”던 아버지의 피를 함께 물려받은 조카 형인. 그 아이에게만은 폭력의 고리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인 의지. 그러나 양익준 감독은 끝끝내 이러한 핏줄은 끊을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상훈의 더러운 피는 대신 아버지들의 폭력을 공유해 버린 연희의 동생 영재에게 대물림된다. 결국 상훈은 영재의 충동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양익준 감독은 희비를 교차해낸 에필로그를 통해 이러한 폭력의 순환 고리가 전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한다.
사실 <똥파리>의 이야기 구조는 꽤나 전형적이다. 상훈은 우리가 느와르 영화에서 늘상 보아왔던 주인공 캐릭터의 궤적을 그려나간다. 잠시잠깐 안식을 맞이한 밑바닥 인생이 맞이하게 되는 예정된 혹은 예상치 못한 파국. 한국영화에 있어 가까이는 <비열한 거리>의 병두가, 약간 멀게는 <초록물고기>의 막동이가 보여준 비극성과 닮아 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짜 신인 양익준은 이러한 전형성을 정면으로 돌파해낸다. 생생한 현실의 질감과 캐릭터들의 리얼함, 그리고 편집의 적절한 리듬감이 이 익숙한 이야기의 상투성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다. 더불어 특히나 연희와 나누는 교감 중요하다. 구조적으로 비극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 동시에 상훈의 인간적인 면모를 한층 공감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 자실을 기도한 아버지에게 피를 빼 준 상훈, 그리고 칼을 빼든 아버지를 물리치고 상훈을 만나기 위해 한강으로 달려온 연희. 끊어버릴 수 없는 핏줄을 인정한 상훈이 연희의 무릎을 베고 오열 할 때, 관객들은 분명 <똥파리>가 내보이는 진심에 가슴을 열어젖히게 될 것이다.
저예산 영화 <똥파리>는 투박하다. 시종일관 욕지거릴 내뱉지만 그것이 유일한 표현 수단인 상훈이 마냥, 시종일관 은유나 상징과 같은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위악으로 가득 찼던 상훈이의 일상과 기억을 담담하게 따라 갈뿐이다. 그리고 팍팍한 현실을 잠시나마 위무한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훈이 환하게 웃는 연희와의 술자리 장면이나 유일하게 상훈을 이해하는 친구 만식과의 쌍욕이 넘실대는 후반부 대화 장면은 무척이나 소중하게 다가온다. 물론 공은 그런 것이 바로 우리네 삶이라는 듯 카메라를 정직하게 들이댄 양익준 감독에게 돌려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그 화면 안에서 배우출신 감독이 이끌어낸 배우들 모두의 기교를 부리지 않은 진심어린 연기가 빛을 발하고 있다. 분명 독립영화 <똥파리>는 50개관이란 상영관이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우리 시대의 문제작이다.
2009년 4월 7일 화요일 | 글_하성태(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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