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판의 끝에서 아슬아슬한 자세로 두 남녀가 서 있다. 여자는 “날아가는 것 같다"며 두 팔을 벌리고 있고, 남자는 그 뒤에서 그녀를 지탱하고 서 있다. 표정이며, 자세며 영락없이 살짝 맛이 간 커플의 자살행각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당대 전 세계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흥분시켰던 바로 그 애정행각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11년 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배만 탔다하면 위의 애정행각을 따라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포착되었으니 저 ‘막장커플’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던 듯싶다. 여객선이 두 조각나도 잡은 두 손만큼은 절대 놓지 않았던, 그래서 더 애달프고 애절했던 저 커플의 이름은 바로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 로즈(케이트 윈슬렛)’! 1998년에 개봉한 영화 <타이타닉>의 위력이 실로 ‘대단’ 그 자체였음은 이미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회자되었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으나 ‘잭 & 로즈’에 대해서는 오랜만에 얘기 좀 해야겠다. 왜냐고? 그들이 11년 만에 만났으니까!
1998년, 막장커플 잭과 로즈는 누구?!?!
<타이타닉>이라는 대박영화 한 편이 낳은 최대의 수혜자요, 피해자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앞서 말한 막장커플의 대명사 ‘잭 & 로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잭과 로즈가 막장커플이냐고? 여객선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갖가지 애정행각은 다 펼치고, 거기다 로즈는 엄마에 약혼자까지 남들 속은 다 태워가며 숯검댕이로 만들어 놓질 않았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판국에 뭔 그리 할 말은 많은지 입김 쏟아가며 로맨틱한 멘트를 날려주는 잭의 안간힘 쓰는 모습하며, 죽기 전까지도 잊지 못하는 영원한 사랑의 교본을 보여주신 로즈할매의 순정까지 <타이타닉> 커플은 그야말로 제대로 ‘로맨틱 막장 커플’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흥행과 더불어 엄청난 부와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었으니 수혜자라는 말은 당연하겠지만 생뚱맞게 피해자라는 말은 또 뭔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타이타닉> 이후 잭과 로즈를 연기한 두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하 레오), 케이트 윈슬렛(이하 케이트)의 행보는 그리 유쾌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시작해서 <타이타닉>까지 이어진 레오의 철없는 꽃미남 이미지는 이후 <아이언 마스크>, <비치> 등 출연작마다 줄줄이 혹평과 연기력 논란에 휩싸이게 했고, <타이타닉>의 로즈로 당돌하고 도도한 귀족 아가씨 이미지가 강해진 케이트 역시 차기작에서 이렇다할 빛을 보지 못했기에 피해자라는 말도 그리 과장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이 프랭크 & 에이프릴로 11년 만에 돌아왔다!!
강산도 변하고 남을 세월이 지났으니 제 아무리 잘난 남자와 여자라도 늙기 마련임은 당연하다. 요즘 한창 상영 중인 ‘브래드 피트의 회춘 영화’ 속 주인공마냥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배우라고해서 세월을 붙잡을 능력이 있는 건 더더욱 아니니까 그들 역시 늙기는 매한가지. 11년 전, 전 세계 여인들의 마음을 훔쳤던 꽃피부 살인미소의 레오는 이마에 어느새 석삼자 주름을 지으셨고, 케이트 여사 역시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건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일터. 그래도 그동안 부지런히 연기내공을 갈고 다진 그들이기에 더 이상 <타이타닉>의 후광이나 외모로만 먹고 들어가는 배우가 아닌 진정 자기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연기자가 되어 귀환했다. 그래서 11년 전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얼굴만 꽃미남에서 연기까지 잘하는 훈남 배우가 된 레오, 레오의 파트너 케이트라는 수식어에서 연기파 글래머 여배우로 당당한 매력을 발산하는 케이트의 특별한 재회가 더욱 반갑기만 하다.
너나 같이 비슷한 양복과 타이를 맨 샐러리맨의 틈바구니에 프랭크 윌러도 끼어서 기차역의 계단을 내려온다. 그도 평범한 월급쟁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인 에이프릴 윌러는 집 안에서 빨래와 청소를 하느라 정신없다. 그녀 역시 항상 같은 일상만이 연속인 특별할 것 없는 가정주부이니까. 세상의 모든 부부들이 다 비슷하게 살아가겠지만 연애하던 시절로 돌아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군다나 이리저리 날뛰며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이 남자가 내 남자친구다”라며 동네방네 알리던 철없던 잭 & 로즈 커플 또한 10여년이 지난 후에는 서로에게 슬슬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프랭크 & 에이프릴 부부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사는 건 다 그런 거니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람이 변했으니 변할 수밖에... 안그래??
흔히 말하는 ‘첫 눈에 반한 사랑’을 만나 결혼에 골인하고, 부부의 연을 맺어 아이도 가지고, 부지런히 살다 보면 ‘정’ 때문에 살게 되는 게 요즘 부부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물론 죽는 순간까지 가슴에 묻어 있는 뜨거운 순정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하겠지만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타이타닉>의 로즈 할매나 <벤자민 버튼>에 등장하는 할매 정도로 세월이 지나봐야 꺼낼 수 있는 얘기일 뿐. 서로가 아니면 죽고 못 살 것이라 여기던 커플들도 결혼하고, 현실에 부대끼다 보면 결국 서로로 인해 죽고 싶은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는 법이다.
값비싼 다이아몬드청혼도 거절하고, 가난한 화가와의 사랑을 선택했던 <타이타닉>의 귀족아가씨 로즈처럼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가정도, 부부생활도 새로운 모험을 하고 싶은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에이프릴. 하지만 남편인 프랭크의 입장은 다르다. 총각시절에는 <타이타닉>의 잭 못지않게 진취적이고, 도전적이었던 그였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현실에 짓눌려 살다보니 꿈보다는 야망이 앞서고, 이상보다는 현실의 안주가 우선시된다. 그러다보니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줄어들고, 눈만 마주쳐도 화가 나니 에이프릴의 잔소리는 늘어만 가고, 프랭크의 분노는 나날이 심각해져만 간다.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타이타닉>의 닭살커플이 이처럼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부부로 귀환하게 될 것을 말이다.
세월이 지나면 사람도 변해가기 마련이고, 사람이 변하면 당연히 감정도 바뀌어져 가는 것이 순리다. 사랑도 예외일 수는 없는 법, 영원할 수는 있겠지만 그 형태나 방법은 변해가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윌러 부부도 마찬가지다. 잭과 로즈 마냥 철없이 사랑만 하던 젊은 시절과 달리 두 아이를 둔 평범한 부부로서 살아가는 프랭크와 에이프릴 역시 사랑하지만 그 방법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졌을 뿐이다. 같은 배우가 연기하지만 서로 다른 커플의 모습과 사랑의 이야기는 11년이란 세월을 건너 뛴 레오와 케이트의 겉모습만큼이나 달라져 있다. <타이타닉>이 풋풋했던 두 주연배우만큼이나 로맨틱한 사랑으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면, 농익은 연기력으로 재회한 레오와 케이트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부부의 현실적이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로써 눈보다는 가슴을 먼저 사로잡는 그런 영화라 할 수 있다.
20대에 처음 만나 30대를 훌쩍 넘겨 버린 지금 재회한 레오와 케이트는 11년이란 세월이 무색할 만큼 여전히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 예전보다 한층 깊어지고, 농익어진 그들의 연기만큼이나 사려 깊으면서도 통찰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돌아 왔다. 11년 전의 풋풋함 보다는 자연스러운 안정감으로, 20대의 뜨거운 열정 보다는 30대의 차가운 이성이 먼저 느껴지는 레오와 케이트의 모습은 더 이상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의 왕이다”를 외치던 레오의 그 도전적인 눈빛과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과감하게 누드화의 주인공이 되어 준 케이트의 당돌함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스크린에 살아 숨 쉰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보다 앞으로 흘러갈 시간들에 맞춰 변해갈 모습이 더욱 기대되는 그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기약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또다시 그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재회해주길 바라는 것은 비단 필자 혼자만의 욕심은 아닐 것이다.
2009년 2월 23일 월요일 | 글_김진태 객원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