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일처의 결혼 양식이 제도적으로 확립된, 그것도 여전히 남성성에 편향된 지배의식이 관성처럼 유지되는 대한민국 커뮤니티에서 <아내가 결혼했다>는 그 문구 자체로 하나의 도발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제도적 대안을 주창하는 반사회적 야심을 품었다거나 현실제도에 반발한 정치적 도전이라 인식될만한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떤 특수한 사례에 가깝다. 폴리가미(polygamy)나 폴리피델리티(polyfidelity)와 흡사한 주인아(손예진)의 자유연애관도 그렇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노덕훈(김주혁) 같은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특수하다. 비현실적인 사안을 가능케 하는 건 어떤 특별한 인연의 성립이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벌어지는 ‘가족의 탄생’ 과정은 어느 특수한 개인의 욕망이 납득될 수 있는 대상을 찾았기 때문에 가능한 현실일 따름이다.
주인아의 연애관념은 정치적 선언이라기 보단 본능적 선택에 가깝다. 애초에 주인아는 섹스를 사랑과 동일한 개념으로 나열하는 여자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자신이 사랑이라 인식되는 상대에게 헌신적이다. 이 사람도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아내로 살고 싶다는 주인아의 부탁을 노덕훈은 이성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그 공유자의 한편을 차지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결과적으로 그 이상한 합의가 단순한 영화적 판타지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공유는 단순히 무책임한 이상적 도피의 수순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느 개인의 특수한 이상이 다른 개인에게 수용되는 합리적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제도적 규범과 유전적 관습과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는 비합리적 한계가 나란히 노출된다.
일처다부제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주인아의 그것은 개방된 신념의 행위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단 소유에 대한 견해차에서 비롯된 결과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자신만의 아내로 소유하고 싶어하는 노덕훈의 심리와 달리 주인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들을 자신의 남편으로 소유하고자 한다. 이는 제도에 대한 정치적 저항처럼 읽힐 가능성도 있지만 실질적으론 그것과 무관하게 그저 취향을 무분별하게 따르는 본능적 선택에 불과하다. 관습과 제도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이 간과되고 윤리적 가치관에 대한 물음이 무력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FC 바르셀로나’를 ‘바르샤’라고 지칭하는 주인아는 어쩌면 (축구를 좋아하는) 남성을 충족시키는 판타지다.-유럽 클럽 축구 중계를 함께 봐주는 애인이 있다니!- 사실 주인아는 이 외에도 지극히 남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여성상으로서의 매력이 넘친다. 도발적이면서도 다소곳하고, 청순하고 지적이면서도 애교가 넘치고 섹스어필에도 능하다. 도시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시어머니 앞에서 구시대적인 며느리 역할에 적극적이다. 어쩌면 주인아라는 캐릭터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판타지에 가까운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행위를 하면 되려 논리적이다. 법적 혼인 관계에 있는 상대에게 또 하나의 사실혼 관계를 천명하는 상황이 기가 막히지만 그럴 듯해 보이는 건 캐릭터가 이미 특이성의 너비를 확보한 덕분이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영화적 상황이 현실적으로 채색되는 건 주인아를 연기한 손예진의 공이 가장 크다. 그녀의 행위가 영화의 비현실성을 부채질하는 만큼 그에 대한 설득력을 겸비하는 것도 중요한 사안인데 손예진의 연기는 그것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다. 다만 주인아의 주변 관계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묘사가 배제된 건 이 영화가 완전한 부연 설명을 포기한 채 자기 편의를 위해 도피처를 마련했다고 지적당할 사항이다.-과연 주인아의 부모가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가장 밀접한 주변인을 누락시킨 건 실수인가, 고의적 포기인가?-
<아내가 결혼했다>가 하나의 실험극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야심은 없어 보인다. 물론 이 영화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이해될 수 없는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다. 그 상황에 굳이 윤리적 잣대 따위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이미 사회적 가치관 안에서 지극히 허락되기 힘든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유형처럼 포장된 이 영화는 유머를 발생시키는데 능숙하고 보편적인 감성을 돈독하게 자극한다. 이는 나름대로 대중과의 접점을 고려한다면 성공적인 전략이라 할만한 것이지만 반대로 영화가 자신의 정치적 잠재력에 스스로 주눅들어 있다고 할만한 사안이기도 하다.
특수한 사연의 전시는 결국 보편적인 감수성으로 종결된다. 아내가 두 남편을 지니려 한다는 사연은 도발적이지만 영화는 그 사연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 나가는 노덕훈의 심리적 변화를 통해 삶의 보편적 물음을 추출하려 한다. 사랑을 포함해 삶이란 여정을 채우는 표지판들의 궁극적 도착지는 행복이라는 것, 그 행복의 잠재적 가능성이 현실적 제한의 너머에 있다면 그것을 기꺼이 넘어설 수 있다는 것. 궁극적으로 <아내가 결혼했다>는 삶의 특별한 유형을 제시하는 영화라기 보단 어떤 특수한 삶조차도 보편적인 행복을 지향하는 방편에 불과함을 설득하려는 영화다. 소재가 지닌 특이성에 거부감을 느낄만한 대한민국 남성(!)이 다수 존재할지 모를 일이지만 손예진의 뛰어난 교태(?)가 이를 중화시킬 여지가 충분하다. 어쩌면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도발적 문장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손예진의 매력에서 기인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한편으로 영화를 또 하나의 비현실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만약 손예진이 아니었다면?-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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